“영남이형은 왜 항상 제게 그런식이세요…” 결국 분노 김세환의 한 마디 그리고 현재 그에게 찾아온 절체절명의 순간을 확인해보세요..

김세환은 1948년에 서울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연극배우 고 김동원으로 집에서 한 번도 목소리를 크게 낸 적이 없을 정도로 온화했고, 김세환이 학창 시절 대학생이던 형들이 이화여대 학생들을 집으로 불러 댄스파티를 열어도 되었을 정도로 개방적인 분이셨는데요.

 

 

게다가 형들이 대학에 가기 전에는 아버지가 서울대에 입학하면 오토바이를 사준다고도 하셨는데, 이후 큰 형이 서울대에 정말 합격하자 아버지는 오토바이는 좀 그랬는지 색소폰을 사주시게 되었고, 당시 형 친구들이 놀러와 색소폰 연주 곡이나 팝송을 즐겨 들어서 김세환도 어깨너머로 음악을 들으며 형들을 따라 색소폰도 불어보게 됩니다.

 

하지만

김세환 하면 통기타인데, 통기타는 그가 고등학교 2학년 여름방학 때 대천 해수욕장에 놀러 갔다가 비가 내려서 숙소에 있는데 한 대학생이 기타를 치면서 팝송을 부르니 주변에 있던 여학생들의 눈이 하트로 변하는 것을 보고 ‘나 저거 배워야겠다’싶어 집에 오자마자 어머니께 기타를 사달라고 졸라서 결국 생일선물로 받으며 기타를 배우게 되었다고 합니다.

홀로 책을 보며 기타 치는 재미에 푹 빠진 그는 고3이 되어서도 공부보다는 기타에 열심이었고, 보다 못한 큰형이 공부 안 하면 기타를 부숴버린다고 해 재수 끝에 경희대 신문방송학과에 입학하게 되는데요.

김세환은 대학에 가서도 음악에 푹 빠져 살았지만, 원래는 가수가 될 생각까지는 없었다가 2학년 때 TBC에서 대학생 재즈 페스티벌이 열린다는 소식에 참가 신청을 해 보게 되는데, 20여 개 팀이 참가한 예선에서 김세환은 덜컥 5등을 차지했고, 그래서 은근히 기대하면서 본선까지 나갔지만 아쉽게도 입상에는 실패하게 됩니다.

 

하지만

대회에 참가한 후 김세환은 경희대에서 유명 인사가 되어 이후 교내 축제 때 여러 과로부터 초대 가수로 연락을 받아 노래를 부르고 다니게 되는데요.

그 과정에서 원래 연세대 의대를 다니며 송창식과 ‘트윈폴리오’로 활동하다가 유급을 하는 바람에, 경희대 의대로 오게 된 윤형주의 눈에 김세환이 들어오게 됩니다.

그 해 여름 김세환은 가족여행을 대천 해수욕장으로 갔다가 거기서 친구들과 놀러 온 윤형주를 우연히 만나 같이 어울리게 되는데요.

윤형주는 저녁에 ‘트윈폴리오 윤형주입니다. 별장에 초대해도 될까요?’라고 쓴 메모지를 김세환에게 건네며 그 쪽지를 들고 즉석 만남을 해오라고 시키게 됩니다.

 

 

그래서 김세환은 메모지를 들고 다니며 한무리의 여학생들에게 말을 걸게 되지만, 그러자 뒤에서 그 여학생들과 함께 온 남학생들이 무섭게 다가왔다고 하는데요.

하마터면 맞아 죽을 뻔한 위기를 겨우 넘기고 김세환이 즉석 만남에 실패하자, 결국 윤형주가 직접 나서 다른 여대생 4명에게 말을 걸어 즉석 만남에 성공하게 됩니다.

그렇게 그들은 별장에서 한참을 놀았지만 그러다 두 여학생이 이제 집에 가야 한다고 말하게 되는데요.

어렵사리 즉석 만남으로 꼬셔왔던 여학생들이 떠나려 하는 일종의 절체절명의 위기가 닥친 순간, 윤형주는 ‘내가 노래를 만들 테니 그 곡을 듣고 마음에 들면 가지 말라’라고 여학생들에게 제안했고, 오선지가 없었지만 임기응변을 발휘해 김세환이 빈 종이에 오선지를 그려주며 윤형주는 30분 만에 노래 1곡을 완성하게 됩니다.

 

노래는 지금은 ‘조개껍질 묶어’로 알려져 있는 ‘라라라’였는데요.

그 노래를 들은 여학생들은 노래가 마음에 들어 결국 그날 집에 들어가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날을 계기로 김세환은 윤형주와 붙어 다니며 함께 노래를 하다가 윤형주를 따라 서울 무교동에 있던 음악감상실 ‘쎄시봉’에 놀러 가며 송창식, 이장희, 조영남 등과도 인연을 만들게 되는데요.

‘쎄시봉’은 얼마 안 가 문을 닫고 말았지만, 쎄시봉의 가수들은 이후 서울 명동의 오비스 케빈으로 옮겨가며 대기업 신입사원 월급이 18000원쯤 하던 시절 하루 저녁 출연료로 500원씩을 받으며, 김세환은 그렇게 그들과 본격적으로 함께 노래를 부르게 됩니다.

 

 

그러던 어느 날 김세환은 윤형주로부터 ‘이따가 MBC 라디오 이종환의 별이 빛나는 밤에 출연하는데, 함께 가자’라는 말을 듣고 따라갔다가 기회를 얻어 노래를 부르게 되었는데, 순식간에 전국의 여학생들의 마음을 사로잡으며 뜨거운 반응을 얻자 이를 계기로 이종환은 둘에게 음반 제작을 제안하게 되는데요.

데비 앨범 발매 후 윤형주, 송창식과 KBS의 ‘노래는 친구’의 진행자로까지 투입된 김세환은 이후 발표한 ‘목장 길 따라’가 많은 사랑을 받으면서 TBC 방송 가요 대상에서 신인상을 받더니, 이후 ‘옛 친구’, ‘토요일 밤에’, ‘사랑하는 마음’, ‘길가에 앉아서’, ‘좋은 걸 어떡해’ 등을 연이어 히트시키며, 2년 연속으로 MBC 10대 가수상과 TBC 방송가요 대상 가수상까지 수상하게 됩니다.

 

게다가

김세환은 당시 영화와 뮤지컬에도 출연하며 당대 최고의 하이틴 스타로까지 떠오르게 되는데요.

하지만 그의 히트곡들 중 몇몇 곡은 사실 원래 그의 곡은 아니었는데, 어느 날 송창식이 혼자 기타를 치면 웅얼거리듯 ‘사랑하는 마음보다 더 좋은 건 없을 것’을 부르고 있는 걸 들은 김세환은 ‘형, 그 노래 나 줘, 그 노래는 내가 더 잘 부를 수 있어’라고 해서 자신의 노래가 된 것이고, 마찬가지로 ‘길가에 앉아서’라는 윤형주에게 달라고 해서 받은 곡이고, ‘좋은 걸 어떡해’라는 이장희한테 받은 곡이라고 합니다.

그 형들이 아니었다면 오늘날 김세환이 있을 수 없기 때문에 단 9개월 차이지만, 김세환은 막내로 형들을 깍듯이 모시고 있다는데요.

하지만 그렇게 ‘쎄시봉’ 형님들을 만나며 큰 고생 없이 빠르게 인기를 얻게 된 그에게 그만 가수로서 사형선고와 같은 끔찍한 일이 발생하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당시 터진 연예인 대XX 사건이었습니다.

당시 가수들은 동두천이나 파주 등 미8군 클럽에서 밤일을 자주 했었기에, 자연스럽게 대기실 등에서 대XX를 접하고 무심코 극서의 일종이라는 말에 피우게 된 것이었는데요.

사실 1970년에 습관성 의약품 관리법이 제정되기 전까지만 해도 대XX는 기지촌을 중심으로 대학가와 연예계에 퍼져 있었는데, 하지만 당시 유신정권에서 인혁당 사건과 긴급 조치 9호 발동 등에다가 오일 쇼크로 물가까지 급등하면서 민생이 불안해지자 정부는 연예인들을 앞세워 정권의 방패막이로 삼고 국민의 시선을 돌리기 위해 조용필, 신중현 등 수많은 가수들을 잡아갔고, 그렇게 김세환도 입건이 되어 활동 중지를 당하게 됩니다.

 

당시

조용필은 끌려가 구타까지 당하는 등 그야말로 연예계는 쑥대밭이 되고 말았는데요.

활동 중단 이후 김세환은 친구 처제 결혼식에서 사회를 보다가 한 여성이 눈에 띄어 첫눈에 반하게 되는데, 그녀에게는 남자친구가 있었음에도 김세환은 ‘상관없다. 같이 사귀어 보고 선택해라. 손에 물을 묻히지 않게 해 주겠다’라며 상남자의 면모를 보인 끝에 결국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게 됩니다.

이후 결혼까지 생각하게 된 그녀는 “우리 아버지가 군인이세요. 좀 엄한 분이라 허락받기 어려울 텐데”라며 걱정했지만, 김세환은 “내가 죄지었어요? 아버지가 훌륭한 분이라면 나같이 훌륭한 사윗감 놓치지 않으실 것”이라고 말했고, 김세환의 배짱에 감복한 장인어른은 두 사람의 결혼을 결국 승낙했다고 하는데요.

후에 방송 정지가 풀려 다시 활동을 하게 되었지만, 시대가 바뀌는 바람에 통기타 음악은 안타깝게도 예전만큼의 인기를 얻지는 못했고, 이렇게 시간이 흘러 중년이 된 김세환도 수입이 불안해지자 노후대비 겸 강남에 한 일식집을 차리게 됩니다.

 

그런데

식당을 차린 자리가 하필 서울 역삼동 르네상소 호텔 주변의 모텔촌이라 식당 주방과 어느 모텔의 한 객실 창문이 너무 가까웠던 바람에 생선 굽는 냄새가 그 객실로 다 흘러가게 되면서 손님들 클레임으로 못 살겠다는 모텔 사장의 항의에 김세환은 한 달에도 몇 번이나 사죄를 하러 가게 되는데요.

하루는 역시 모텔에 사죄인사를 하러 갔는데 한 손님이 투숙을 끝내고 나오더니, 카운터 앞에 서 있는 김세환을 보고 화들짝 놀라며 “이야 김세환이 이놈도 대낮부터 바쁘네 짜식”이라며 웃으며 위아래를 훑어보며 나가게 됩니다.

그 뒤 김세환에게는 모텔에서 이쁜 아가씨와 나오는 장면을 봤다는 헛소문이 돌게 되는데요.

 

게다가

당시 물가로 1kg 20만 원이나 하던 참치에서 가장 비싼 ‘도로’라는 뱃살 부위가 있는데, 당시 고용했던 L호텔 출신의 주방장이 손님들에게 팁을 받기 위해 그 부위를 자기 돈 안 나간다고 서비스로 자꾸 줘버리곤 했고, 또한 그 부위는 영하 45도 이하에서 저장해야 해서 ‘도로’ 전용 냉동고를 비싸게 사야 했던 데다가 조금만 팔더라도 한 덩어리를 전부 녹여야 하는데, 그날 녹인 덩어리를 다 팔지 못하면 신선도가 떨어지며 가격이 떨어지는 등 김세환은 앞으로 남고 뒤로는 밑지는 장사를 하며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은 끝에 일식집을 4년 만에 정리하게 됩니다.

김세환은 그때를 비유하자면 ‘길이 있는데도 굳이 산으로 가느라 너무 고통스러워서 이제 그쪽으로는 소변도 보지 않는다’라고 털어놨는데요.

이후 시간이 흘러 방송을 통해 과거 활약이 재조명되며 다시 많은 이들의 뜨거운 사랑을 받게 된 ‘세시봉’과 김세환은 그러다 또 한 번의 큰 위기를 겪게 됩니다.

어느 날 MBC ‘무릎팍도사’에 ‘쎄시봉’ 이장희 편에 조영남이 초대 손님으로 나가게 되는데, 조영남은 ‘이장희가 화음이 잘 안돼서 얘가 가수가 되면 내 손에 장을 지진다고 했었다’라는 굳이 하지 않아도 될 이야기를 해서 이장희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고, 또 ‘윤형주는 염소 목소리 같아서 가수가 되면 손에 장을 지진다’라고 했습니다.

이어 ‘윤형주는 육촌 사이인 윤동주 시인의 시를 하나도 못 외운다’라고 말하며 그 프로를 보고 있던 윤형주를 전국적으로 망신시키며 분노하게 만든 것인데요.

결국 화가 난 윤형주는 ‘내가 염소 목소리면 같이 노래도 부르면 안 되겠네’라며 김세환에게 ‘쎄시봉’ 탈퇴를 선언했고, 다음 날 김세환은 급히 조영남을 찾아가서 윤형주에게 사과하라고 전하게 됩니다.

 

조영남은

김세환의 이야기를 듣고 윤형주에게 전화해서 ‘너는 장로고 나는 평신도잖아’라며 넓은 마음으로 이해해 달라고 사과한 끝에 극적으로 ‘쎄시봉’은 와해를 면하게 되는데요.

70년대 전성기를 지나 수십 년 후 귀족처럼 다시 사랑을 받게 된 ‘쎄시봉’이 하마터면 조영남 때문에 사라질 뻔했던 큰 위기를 겪었지만, 막내 김세환의 중재로 간신히 재결합을 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이 일을 겪고 김세환은 ‘주변 사람들이 내가 속한 쎄시봉에 대해 꺼진 불도 다시 보자고 말하는데, 우리가 언제 꺼진 적이 있었냐’라며 언제나 청춘의 마음으로 열정적으로 살아가고 있다는데요.

산악자전거 매니아로 알려진 그는 욕심 없는 생활이라는 인생 신념으로 자신이 다니는 교회에서 노래로 봉사하며 거의 매주 산악자전거로 청계산에 오르고 있다고 합니다.

 

게다가

스키와 사진 촬영 취미도 오래되었는데, 매일 새벽 5시면 일어나서 2시간쯤 인터넷 서핑을 하며 각종 블로그에 들어가 취미 활동을 탐색하며, 팔순을 앞둔 나이에도 끝없는 호기심으로 살아가고 있다는데요.

최근에는 자신을 좋아해 주는 60대 이상 팬들을 위해 트로트 장르로 20년 만에 새 앨범까지 내며, 위기도 있었지만 언제나 그 시절 청년처럼 도전을 멈추지 않는 김세환의 인생에 여러분의 뜨거운 응원을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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