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고졸업반 김인순.. 끝내 35세의 나이로 갑작스럽게.. “이토록 허망할 수가…” 퇴근길에 벌어진 그녀의 안타까운 사연…

예능에서는 철없고 푼수 같은 캐릭터로 인기를 끌었던 임예진은 원조 책받침 스타로 한때 국민 여동생의 위치에 있었습니다.

그녀는

아역스타 시절 착하고 똘똘하고 모범적이며 착실한 여학생 이미지로 큰 사랑을 받았는데요.

누구나 좋아했던 소녀이던 임예진은 교복 모델은 물론이며 많은 학생용품의 모델을 도맡아 했습니다.

임예진은 또래 남학생들에게는 그야말로 로망의 대상이고, 여학생들에게는 닮고 싶은 스타였는데요.

임예진을 최고의 하이틴 스타로 만든 작품은 영화 ‘여고 졸업반’으로 영화의 흥행과 함께 임예진은 일약 스타덤에 오르며 큰 인기를 누렸습니다.

이 영화는 임예진을 스타로 만들었을 뿐 아니라, 가수 김인순도 스타로 만들어줬습니다.

 

김인순은

그 시대의 진정한 엄친딸로, 피아노, 노래, 고전 무용, 발레, 운동 공부 등 여러 방면에서 뛰어난 재능을 보였습니다.

 

 

국민학교 2학년 때는 어린이 성우로, 4학년 때는 서울 시립합창단 단원으로 활동했으며, 고등학생 때는 높은 경쟁률을 뚫고 교내 아나운서로 선발되었습니다.

그리고 73년에는 대중 가수로 가요계에 첫발을 내디뎠는데요.

영화’ ‘여고 졸업반’의 주제곡인 동명의 노래가 히트를 하며 인기 가수 반열에 올랐습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 그녀가 무대에 설 기회는 줄어들었고 갑작스러운 비보를 들려줘 팬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는데요.

오늘은 많은 이들에게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노래를 불렀던 가수 김인순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겠습니다.

여고 시절은 성인이라면 누구나 겪어온 청춘의 시작이고 꿈 많은 시절입니다.

세상이 전부 아름답고 낭만스럽게만 보이는 데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은 그 시절은 뒤돌아보면 그리움과 아쉬움만이 가득 남는데요.

이런 마음을 담아 만든 노래가 있습니다.

바로 김인순의 ‘여고 졸업반’입니다.

김인순은 53년 서울특별시 중구에서 태어난 그 시대의 진정한 ‘엄친딸’이었습니다.

그녀의 재능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는데요.

 

어릴

때부터 김인순은 노래는 물론이고, 피아노, 고전 무용, 발레, 운동 등 다방면에서 동시에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김인순은 청아한 목소리로 남산국민학교 2학년에 다닐 때는 어린이 성우로, 4학년 때는 서울 시립 합창단 단원으로 활동했는데요.

중고교 시절에는 성적도 꽤 잘 나왔으며 예체능에서 두루두루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고등학교 재학 시절 당시 김인순은 무려 200 대1 의 경쟁률을 뚫고 교내방송 아나운서로 선발되었는데요.

 

 

그뿐 아니라 합창대회 때는 지휘자로, 교내 배구대회 때는 센터 선수로도 나서며 예체능에서 고루 두각을 보이던 재원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김인순은 오빠의 기타 연주를 보고 음악에 관심을 두게 되었는데요.

1973년에는 급기야 대중 가수로 가요계에 데뷔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75년에는 두 번째로 발표한 ‘여고 졸업반’이라는 노래가 크게 히트를 하며 인기 가수 반열에 올랐는데요.

이 곡은 이듬해 8월 개봉한 김응천 감독의 하이틴 영화 ‘여고 졸업반’의 주제곡으로 분해 영화의 성공과 함께 큰 인기를 누렸습니다.

영화 ‘여고 졸업반’은 당시 4만여 명의 관객을 동원하며 그 시대 기준으로 흥행해 크게 성공한 영화인데요.

이 영화에 출연한 배우 임예진은 이 영화로 제14회 대종상 특별상을 받으며 일약 스타덤에 올랐습니다.

김인순 역시 영화 흥행의 수혜자로 대중 가수의 반열에 금세 오르며 많은 인기를 얻었는데요.

그 이후 발표한 ‘친구 사이’, ‘푸른 교실’, ‘소녀의 기도’ 등의 노래도 연달아 히트를 하며 더 많은 인기를 얻었습니다.

각 방송의 가요 순위에서 1위를 차지하는 것은 물론이고, 76년 MBC 10대 가수로 선정되는 영예도 안았는데요.

아무나 할 수 없다는 라디오 DJ도 최고 인기 가수에 위치해 있었던 김인순은 손쉽게 맡을 수 있었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라디오 DJ는 아무나 맡을 수 있는 자리가 아닙니다.

청취자들에게 목소리로만 닿기에 목소리가 좋아야 하는 것은 물론, 말도 잘해야 합니다.

게다가 그때 당시 라디오 프로그램들은 요즘같이 연예인들의 말장난에 의존한 것이 아니라 교훈적인 메시지를 전달했는데요.

그렇기에 당시 DJ들에게는 좋은 목소리는 물론, 올바른 의식과 바른 언어도 고사할 줄 아는 높은 자질이 요구되었습니다.

김인순은 앞서 밝혔던 것처럼 공부와 모든 방면에 재능이 있었던 엄친딸이었고, 연인 히트곡 발표로 최고의 인기를 구가할 때라 DJ 자리까지 맡을 수 있었는데요.

그녀는 이미 여고 시절 교내에서 7번의 개인 리사이틀을 열었던 재목이었습니다.

그렇게 인기로 맡은 DJ 자리도 완벽하게 소화해 냈는데요.

그 이후로도 왕성한 활동을 보이며 대중들에게 다가갔습니다.

 

사실

김인순이 톱 가수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당시 가요계를 휩쓴 사건이 큰 몫을 했는데요.

그녀가 노래 ‘여고 졸업반’을 발표했던 75년 신문 사회면에 난데없이 당대 최고 인기 가수들의 이름이 등장했습니다.

 

 

절정의 인기를 구가하던 가수 이장희, 윤형주, 이종용 등이 습관성 관리법 위반으로 전격 구속되었다는 내용이었는데요.

외에도 신중현, 김추자, 박인수, 김정호, 정훈희 장현 등이 수배되며 연예계 최대 스캔들이 터졌습니다.

국민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려는 정치적 의도가 다분히 의심되는 이 스캔들로 많은 가수는 무대에서 내려와야 했고 방송 공연금지에 처했는데요.

무려 227 곡이나 금지 처분을 받으며 가요계는 발칵 뒤집어졌습니다.

그 이후로도 김세환, 이태원, 이현, 이수미 등이 붙잡혀가며 한 달도 안 돼 경찰에 50명이 넘는 연예인이 잡혀갔는데요.

당시에는 흡연 여부를 가려내는 방식이 투서나 자백이 전부였기에 쟁쟁한 가수들은 돌연 무대에서 내려오는 수모를 당했습니다.

사건은 대중가요 판에 일대 파란을 몰고 왔는데요.

대중가요 역사의 과도기를 맞이하며 이 사건과 상관없는 일부 가수들과 새로운 신진 세력들이 등장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호랑이 없는 굴에서 김인순은 혜성처럼 등장해 단숨에 가요계를 평정했는데요.

이런 상황들에 맞물려 가파른 인기를 구가했습니다.

전성기를 구가하며 왕성한 활동을 보였던 김인순은 1978년 MBC 아나운서 박유명과 결혼식을 올렸는데요.

 

당시

대부분의 기혼 여자 연예인이 그랬듯이, 김인순 역시 결혼과 함께 무대에 서는 모습은 점점 줄어들고 평범한 주부가 되었습니다.

가정에 전념하던 김인수는 노래에 대한 열망과 과거의 영광을 잊지 못하고, 1981년 ‘언덕에 앉아라’라는 타이틀 곡을 내세워 복귀를 알렸는데요.

하지만, 아쉽게도 그녀에게 과거의 영광은 재현되지 않았습니다.

결혼한 지 2년 만에 김인순은 의욕적인 모습으로 활동을 재기했지만, 소녀의 이미지가 사라진 그녀의 인기는 예전과 같지 않았는데요.

여전히 무대 위에서 노래를 부르고 싶던 그녀는 방송에 설자리를 잃게 되자 밤무대 출연으로 가수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방송에서는 잊을 만하면 한 번씩 얼굴을 비추면서 낮에는 가정주부로, 밤에는 무대에 올랐는데요.

 

언젠가

그녀가 과거의 영광을 되찾는 것을 보고 싶다는 팬들의 염원을 뒤로하고, 그녀는 88년 5월 18일 35살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김인순은 여느 날같이 밤 무대에 올라 노래를 부른 후 집으로 돌아가는 중 사고가 났는데요.

인천 서수 가좌동 사거리를 지나던 중 과속으로 달리던 7.5톤 덤프트럭에 치였습니다.

갑자기 나타난 트럭은 그녀가 탄 승용차 운전석을 들이받았는데요.

병원에도 옮겨지지 못한 채 운전기사와 김인순은 그 자리에서 바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갑작스러운 사고로 세상을 떠난 그녀의 소식에 대중들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는데요.

남편과 하나뿐인 아들을 남기고 가야만 했던 그녀의 소식에 많은 이들이 슬퍼했습니다.

 

이어

한 시대를 풍미했던 비운의 여가수 김인순.

밤무대를 전전하며 가수로서의 재기를 꿈꿨으나, 안타깝게 불의의 사고로 짧은 가수 인생을 마무리했습니다.

비록 그녀는 허망하게 세상을 등졌지만, 그녀가 남긴 아름다운 멜로디들은 팬들의 마음속에 깊이 남아 있을 겁니다.

하늘에서는 그녀가 부르고 싶었던 노래 다 부르고 행복하게 지냈으면 좋겠는데요.

그곳에는 아무 고통 없이 평안만 있기를 바라며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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