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토록 건강한 사람이 한 순간에…” 갑작스레 찾아온 눈물겨운 소식.. 그리고 강호동이 “그의 이별” 에 아무말도 할 수 없던 이유..

“엄마들의 힘은 정말 대단한 거예요. 얼음 깨고 그 한겨울에도 옷을 빨고 하는 어머니들의 노고가 바로 우리나라의 부의 기틀을 잡았다고 봅니다. 그래서 나는 여성은 큰 대인이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엄마들의 일생이 없었다면 어떻게 지금의 우리나라가 존재하겠는가? 정치를 잘해서? 아니요. 그 엄마들의 희생, 노고가 오늘 우리가 이렇게 세계가 부러워하는 곳으로 만들어 놨습니다’

이렇게

말하며 어머니의 위대함을 최고의 가치로 두고 어머니의 사랑을 누구보다 그리워하며 평생을 방랑하다 결국 어머니를 만나러 하늘나라로 간 임지호 셰프의 가슴 아프면서도 아름다운 인생과 요리를 제대로 배워본 적이 없으면서도 세계가 인정한 셰프가 된 치열한 인생에 대해서 전해드리겠습니다.

1956년 경북 안동에서 태어난 임지호는 어린 시절 주워 왔다는 주변의 수군거림을 들으며 자라야 했습니다.

임지호의 아버지는 한의사였는데 이미 네 딸들이 있었지만, 독자라 대를 이어야 해서 임지호의 생모를 데려와서 아기를 가지게 됩니다.

그러나 너무나 집이 가난해서 먹고 살 것이 없어서, 임신한 어머니를 다시 내보냈다고 합니다.

 

 

임지호는 그렇게 다른 곳에서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아버지가 한의사이기는 했지만, 가난했던 이유는 정식으로 한의원을 차려서 돈을 받고 치료해 주는 것이 아니라, 시골 한의사로서 사람들이 오면 치료해 주고 그 대가로 계란이며 닭 등 주는 대로 받는 식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한의사인 아버지가 죽어가던 사람을 살린 적이 있었는데, 그 은혜를 갚는다고 그 집안의 한 사람이 임지호가 태어난 곳에 와서 떡이며 옷 등 물질적인 공세를 퍼붓고, 임지호를 부모님 집에 데려다 놓아 세 살 때 친어머니와 생이별을 하고, 아버지와 양어머니와 함께 살게 되었습니다.

양어머니는 친아들은 아니었지만, 정성으로 임지호를 돌봐주었다고 합니다.

3살 때 헤어진 친어머니에 대한 기억은 전혀 없는데, 어릴 때 몇 분이 와서 ‘잘 큰다’라고 말하고 간 것을 잊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중에 한 분이 친어머니였을 것으로 짐작된다고 합니다.

그 후 임지호는 평생 단 한 번도 어머니를 만나지 못했습니다.

훗날 친어머니는 일찍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고 하는데, 그것도 확실하지 않다고 하고, 친어머니 산소까지 없어졌다고 합니다.

하지만, 어렸을 때 어렴풋이 느꼈던 친어머니에 대한 기억으로 평생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양어머니는 임지호가 22살 때쯤 돌아가셨는데, 너무 죄송해서 엄청나게 많이 울었다고 합니다.

친아들 못지않게 어린 임지호를 잘 키워주셨는데, 자기를 혼이라도 내면 ‘친엄마가 아니라 그렇다’라며 자기 때문에 주위 사람들의 오해를 받으며 억울하고 힘들게 살았을 양어머니를 생각하니 너무 죄송해서 애 꿇는 심정이었다고 합니다.

 

그에게

양어머니도 소중한 어머니였습니다.

임지호가 자연의 재료를 찾아 전국을 돌아다니던 2009년 경, 지리산 자락에서 우연히 밭에서 냉이를 캐던 김승규 할머니를 만났는데, ‘밥 먹었냐’라고 물어봐서 ‘안 먹었다’라고 하니까 바로 자기 집으로 데려가 그 냉이를 가지고 된장찌개를 끓여서 밥을 해 주었습니다.

아무것도 안 들어가고 냉이와 된장 정도만 들어간 냉이 된장식이었는데, 그것을 먹고 오랫동안 사무쳤던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녹아내리는 느낌을 받고, 그 할머니를 길에서 만난 어머니로 삼게 됩니다.

그래서 때때로 찾아뵙고 요리도 해드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할머니가 돌아가시자, 이 기회에 돌아가신 세 어머니를 위한 108가지 음식을 차려 제사를 지냈다고 합니다.

그런 스토리로 만든 다큐멘터리 영화가 ‘밥정’이기도 한데요.

상당히 완성도가 뛰어나고 스토리 또한 탄탄해서 다큐멘터리 치고는 꽤 반응이 좋았습니다.

어렸을 때 동네 같은 또래들이 임지호를 주워온 자식이라며 놀려대어 하루 종일 혼자 강가에 가서 앉아있곤 했습니다.

‘사람을 보기 싫어서..’

이렇게 주변에 마음을 붙이지 못한 그는 10대 때부터 거의 10여 년간 걸핏하면 집을 뛰쳐나와 바깥세상을 떠돌았습니다.

 

그는

12살 때 처음으로 가출을 하게 되었는데요.

마음 한구석에서는 생모에 대한 막연한 그리움으로 ‘어딘가에서 어머니를 만날 수 있지 않을까?’하는 기대를 품었다고 합니다.

일본으로 밀항하면 돈을 벌 수 있다고 해서 시도해 본 적도 있었는데 포기하고, 식당에 들어가 잔심부름과 청소 등을 해주며 취직을 했습니다.

가출했다가 돌아온 그에게 아버지는 이렇게 가르쳤다고 합니다.

‘첫째, 남의 물건은 티끌 하나도 탐내지 마라’

‘둘째, 남의 집에서 일할 때는 주인이 일어나기 전에 일어나라’

‘셋째, 조상에게 부끄러운 말과 행동을 하지 마라’

 

 

또한 한의학을 공부한 아버지는 그에게 자연의 모든 재료가 생명을 살리는 데 유용하게 쓰인다고 일러줬습니다.

그가 훗날 자연 요리 연구를 하게 된 바탕이 그 말씀 속에 있었습니다.

그는 어린 시절 네 누나와 함께 들에 나가 쑥을 캐며 자연의 재료가 음식이 된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체득하기도 했습니다.

셋째 누나는 이복의 남동생을 특별히 아껴주었는데요.

가출을 일삼던 10대 때, 결혼한 누나에게 찾아가면 따뜻하게 품어주며 이렇게 말해주곤 했습니다.

‘험한 욕을 하지 마라’, ‘네 삶이 그렇게 된다’, ‘훌륭한 사람의 모습을 항상 가까이해라. 그러면 너도 그렇게 된다’

그가 숱한 시련 속에서도 세상을 저주하지 않고 다시 일어설 수 있게 한 사랑의 말이었습니다.

 

그는

전국을 떠돌면서 차를 잘 타지 않고 걸어 다니며 방랑을 했고, 닥치는 대로 식당에 들어가 10대 때부터 요리에 입문했는데요.

그는 자신이 요리사라는 직업을 갖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한 거지의 말씀이 있다고 밝히기도 했습니다.

다리 밑에 거지가 있었는데, 거지를 바라보다가 한번 물어봤습니다.

‘내가 이렇게 되지 않으려면 나는 지금 뭘 해야 되나?

‘기술을 한 가지 배워놔야 한다. 기술을 하나 배우면 그 기술은 널 버리지 않는다’

그래서 어떤 기술을 배울까 고민하다가 당시 자신의 형편에서 접근하기 쉬웠던 식당에 가서 일하는 것을 선택했습니다.

의식주 해결도 쉽고, 양식, 중식, 한식, 일식, 경양식, 라면 분식 등 종류를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다 했다고 합니다.

비록 거지이지만 인생에 큰 가르침을 주었네요.

인생의 스승이네요.

 

이렇게

그는 누구에게도 배울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스무 살이 되면서 음식에 평생을 걸기로 다짐하고, 자나 깨나 음식 생각만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는 1977년 23살 때 ‘묘기 대행진’이라는 방송 프로에 연탄 배달의 달인으로 TV에 첫 출연하기도 했습니다.

연탄을 최대 12장까지 한 줄로 들고 나를 정도로 달인의 경지에 올랐는데, 자기가 연탄 배달을 하면 지나가는 사람들이 다 구경할 정도로 거의 쇼 같았다고 합니다.

임지호는 뭐를 해도 몰입해서 최선을 다하는 스타일이었기 때문에, 연탄 배달의 달인도 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연탄 배달도 그냥 한 게 아니었습니다.

사실은 요리에 대해 더 치열하게 공부하는 일환으로, 식당의 주방을 살펴보기 위해 서울 한복판의 식당에 연탄을 배달한 것입니다.

덕분에 유명 식당 주방까지 샅샅이 살펴볼 수가 있었습니다.

연탄 배달 일을 무려 8년을 했다고 하는데요.

연탄 오천 장을 10층에 옮기는 일을 할 때도 있었는데, 너무 힘들어서 연탄을 던져버리고 뛰쳐나오고 싶었다고 한 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한계를 뛰어넘으며 한계단 오르면서 한계를 극복하는 법을 스스로 터득했다고 합니다.

연탄 배달 일을 하면서도 끊임없이 혼자서 요리를 공부했고, 다양한 시도를 했습니다.

그 후 그는 결혼을 하게 되는데요.

뱃속의 아이와 아내를 먹여 살리기 위해 1980년대 사우디아라비아 건설 현장에서 주방장으로 일한 적이 있었습니다.

빠른 시일 내에 28살에 본부 주방장으로 발탁되어 무려 2000명분의 음식을 했다고 합니다.

그 후 한국으로 돌아와 30살에 한 호텔의 주방장을 하기도 했습니다.

나름 잘나가는데 안정된 삶을 포기하고 사표를 쓰고 나왔는데요.

그리고 숱한 실패를 겪었는데 좌절하지 않고 요리에 대한 새로운 도전을 끊임없이 했습니다.

그는 실패해도 실망을 하고 술을 마셔본 적이 없다고 합니다.

실패를 하면 다시 시작한다고 합니다.

임지호는 가난 때문에 첫 번째 아내와 헤어졌다고 하는데요.

무척 고통스러운 기억이고 두 아이의 엄마라고 합니다.

음반 업계에서 일하던 동갑 아내를 만난 것은 40살 때쯤이었는데요.

 

이후

그에게 돈과 명성이 함께 들어왔습니다.

음식으로 세계인과 소통하겠다는 꿈을 꾸게 된 것은 전적으로 아내의 도움 덕분이었다고 합니다.

2000년대 들어 그는 다양한 국제행사에 참가하며 우리나라보다 오히려 해외에서 먼저 인정을 해 준 셰프이기도 했습니다.

특히 2006년 미국의 가장 유명한 요리 관련 잡지 ‘푸드애채’의 표지 모델이 되기도 했는데요.

임지호 셰프가 UN 한국 음식 축제에 나간다고 하니까 한국의 기상을 알려야 한다고 하면서 전라도 광주의 고 김훈 디자이너가 모자를 직접 만들어 주었습니다.

모자가 언뜻 보면 닭벼슬 모양 같지만 경복궁 궁전의 처마와 기와 모양을 형성화했다고 합니다.

옷에는 도깨비 문양을 넣어서 옷과 모자를 같이 만들어 주었는데, 임지호 셰프의 표현대로 하자면 ‘저는 별로 잘생기지 않았는데 옷이나 모자를 기자들이 보고 완전히 난리가 났었다’라고 전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놀랍게도 단 한 번도 요리를 제대로 배워본 적이 없었다는 것을 아시는지요?

그렇다면 그는 누구에게 배웠을까요?

물론 처음에는 식당에서 주방장에게 배웠겠지만, 그는 전국 도처를 다니면서 방랑길에서 만난 할머니, 어머니들 음식 만드는 법을 배웠다고 합니다.

심지어는 해외에서도 그곳의 어머니들에게 배웠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는 이 세상의 모든 어머니가 자신의 스승이었다고 말했습니다.

알고 보면 그는 이승에서는 그리운 생모를 만나지 못했지만, 이 세상 모든 어머니를 어머니로 삼고 사랑의 위대함을 느끼며 음식을 배우는 스승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임지호는 음식으로 철학적인 경지에 오르기도 했고, 또한 철학적인 어휘를 많이 구사했는데요.

놀라운 비결이 있었습니다.

임지호 나이 15~17 당시에 서양 철학사를 다 읽었다고 합니다.

그걸 끼고 다니면서 철학을 전공하냐고 물어볼 정도로 엄청나게 읽었다고 하죠.

사람들이 ‘이해도 못 하는데 어떻게 저렇게 어려운 책들을 읽냐’라고 하면, ‘이해를 못 하니까 읽는 것이고, 지금 깨닫지 않아도 그것이 메모리가 돼서 생활 속에서 풀어져 나간다. 엉켜져 있는 실들을 받아서 내 스스로가 풀어가는 작업이다’라고 답했죠.

 

굉장히

천재적인 발상인데 노력하는 수재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어렸을 때 혼자 하루 종일 말도 안 하고 그랬는데 어떻게 이렇게 말을 잘하냐고 한 방송에서 진행자가 물어봤더니, 임지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한테 연설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나는 어떻게 연설할 것인가?’라는 생각을 하면서 책도 많이 보고 길거리 간판을 보면서 소리 내어 리얼하게 그리고 다양하게 표현을 해 보면서 연습을 많이 했다. ‘나에게 기회가 안 올 것이다’라는 생각하에 준비하는 것은 가장 바보짓이다. 나에게 반드시 기회가 온다는 전제하에 준비하라. 기회가 안 와도 괜찮다. 이미 너는 거기에 가 있으니까”

임지호는 그림도 그렸는데 음식 디자인을 하면서 그림으로까지 연결되었는데요.

요리나 음식이나 같다고 하면서 색채, 구도. 그리고 구상 이런 비구상이나 추상적인 것 모든 게 들어가는데, 캔버스에 얹히면 그림이고, 요리 접시에 담기면 음식이고 차이라고 말했죠.

그림을 따로 배운 적은 없으나 뉴욕 첼시에서 개인전도 했다고 합니다.

 

이어

그림도 요리도 거의 모두 독학으로 경지에 오른 그는 ‘음식으로 고치지 못하는 병은 의사도 고칠 수 없다는 말이 있다’라며 음식의 중요성을 설파하기도 했는데요.

자연 재료를 자기가 직접 먹어보고 테스트를 하는데 자연 요리를 연구하다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했다고 합니다.

며칠씩 자다 깨어난 적도 있다고 하죠.

임지호는 지병도 없었고 너무나 건강했는데, 갑자기 돌아가셔서 다들 충격을 받았습니다.

혹시 또 자연 재료를 직접 드시다가 컨디션이 안 좋은 상태에서 치명적으로 그런 일이 일어나지는 않았을까? 이런 생각도 들었습니다.

임지호 님이 살아계셨다면 더 많은 일을 해내셨을 것 같은데, 갑자기 일찍 돌아가셔서 너무나 안타깝습니다.

‘평생을 그리워하던 어머니를 만나러 빨리 돌아가셨나’라는 생각도 들기도 합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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