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자옥은 아직도 내 이상형..” 결국 최백호의 눈물겨운 소식.. “기타 하나 들고 산 속에 들어가서 지내더니” 안타까운 근황..

최근 김호중이 최백호를 롤 모델로 꼽았습니다.

‘미스터 트롯2’ 결승전 축하 무대에는 ‘원조 낭만 가객’ 최백호가 깜짝 출격했는데요.

최근

김용필과 최백호는 낭만 가객 선후배가 만들어내는 환상 호흡은 물론 연륜의 멋이 제대로 묻어나는 스페셜 컬레버로 결승전의 감동을 한층 드높였습니다.

무대가 끝난 뒤 최백호는 인생 선배이자 가수 선배로서 후배들을 향한 덕담까지 내놓으며 끈끈한 후배 사랑을 드러냈는데요.

최백호는 본래 마라톤 유망주였으나 선수 관리 개념이 확립되지 않던 시절에 몸 상태를 감안하지 않고 출전을 밀어붙이며 무리를 한 통에 선수 생활을 접고 가수 활동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젊은 시절에는 힘 있는 목소리와 운동선수 같은 탄탄한 몸으로 유명했죠.

최백호의 인생은 굉장히 다사다난했습니다.

의원이었던 아버지의 죽음, 인기 여배우 김자옥과의 결혼과 이혼으로 말이 많았고, 인생의 전반기를 방황으로 보내게 됩니다.

 

사실

자옥은 당시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여배우 중 한 명이었고, 아버지 김상화가 시인 겸 우성 영화사 전무로 있으니 집안의 재산 역시 꽤 풍족했는데요.

당시 김자옥과 최백호의 결혼은 시작부터 서로에 대해 서로 ‘격이 맞다’, ‘격이 맞지 않는다’ 등의 말들이 많았죠.

 

 

목소리에 많은 하모니를 가지며 대중들로부터 큰 사랑을 받아 최백호의 삶은 누구보다 화려해 보였지만, 호사다마라고 정작 인간 최백호의 삶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의 젊은 시절은 낭만보다는 오히려 한이 많았습니다.

기구하다고 해도 이렇게 기구할 수가 있을까요?

최백호는 독립운동가이자 대한민국 2대 국회의원을 지낸 아버지 최원봉과 초등학교 교사였던 어머니 사이에 1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최백호의 아버지 최원봉은 당시 28살의 나이로 당선되어 대한민국 제2대 국회의원을 지냈다고 하는데요.

 

하지만

최백호가 태어난 지 겨우 5개월이 지났을 때 교통사고로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할아버지는 아주 부농이었지만 최백호에게 학비 한 번 안 대주고 굉장히 싫어했으며 노여움이 많았죠.

 

 

그 이유는 최백호가 태어나자마자 아들이 죽자 흔히 하는 말로 ‘아비 잡아먹은 자식’이라고 집에서 쫓아내셨다고 합니다.

최백호의 어머니는 시골 초등학교 선생님이었는데, 당시 전근을 많이 다녀야 했고 가족들이 이곳저곳 떠돌이 생활을 하다 당시 교사가 받던 박봉으로는 도저히 자녀들을 교육시킬 수 없다며 부산에서 장사를 시작합니다.

최백호는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또래들보다 조숙했고, 아버지에 대한 정도 모자랐으니 어쩌면 상당히 빗나갈 만한 여건이었는데요.

하지만, 어릴 때부터 아버지에 대한 얘기를 너무나 많이 들어왔는데 당시 그에겐 거의 신화처럼 다가왔다고 합니다.

 

그래서

항상 머리맡엔 아버지 사진이 있었고, 돌아가셨지만 늘 뒤에서 든든하게 받쳐주는 버팀목이라는 느낌이 있었고, 그런 아버지 때문에 빗나가지 않았죠.

최백호의 가수로서의 재능은 어릴 때부터 만들어졌는데 자신의 노래 중에서 두세 곡을 빼놓고는 다 자신이 직접 작사 작곡한 곡들인데요.

잦은 전학과 아버지 부제에서 오는 외로움을 달래려 초등학교 시절부터 나무 위에 올라가 습작하던 습관이 그가 스스로 노래를 만들게 하는데 밑거름이 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사실 그 시절 최백호의 꿈은 가수가 아니라 영화감독이었는데요.

‘영화감독이 되겠다’라고 다짐했던 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모 대학의 연극 영화과에 합격했는데, 가정 형편이 어려워서 진학을 포기했습니다.

대학에 재학 중인 누나가 둘 있었는데, 어머니의 수입으로는 최백호까지 대학을 보낼 수 있는 처지가 안되자 어머니가 ‘1년만 기다렸다가 대학에 다녔으면 좋겠다’라고 하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집에서 혼자 그림 공부를 하는데요.

그런데 최백호가 그렇게 재수를 하던 해 10월, 어머니가 갑자기 사망하게 됩니다.

어머니는 가게를 열어 적은 돈이나마 벌어볼 희망에 부푼 것도 잠시, 췌장암 판정을 받아 돌아가시게 되었죠.

이후 최백호는 입대하게 되지만, 입대 반년 만에 결핵을 앓게 되어 의가사를 하고 혼자 경남 동래둔 일광 해수욕장 인근의 가장 싼 방을 구해 혼자 요양하기 시작했지만, 이마저 월세를 낼 돈이 떨어지자 산속에 들어가서 오두막을 지어서 기거하게 됩니다.

당시 중고 기타 하나 들고 산속으로 들어갔는데, 2년간 이어진 지독하게도 힘들었던 시간은 어쩌면 그가 기타를 치고 노래를 부르고 그때그때 떠오르는 생각들을 습작하는 데 온전히 집중할 수 있게 해준 기회가 되죠.

 

그렇게

약 2년간의 요양을 통해 몸이 어느 정도 회복된 최백호는 친구 매형의 부산의 한 장소에서 노래를 할 기회를 얻게 되었는데, 특유의 허스키 목소리와 짙은 음색으로 큰 인기를 얻게 됩니다.

결국 이렇게 최백호는 먹고살기 위하여 통기타 가수가 되었지만, 하수영과의 인연으로 서울로 진출하고 1977년 그의 데뷔곡 ‘내 마음 갈 곳을 잃어’를 발표합니다.

사실 ‘내 마음 갈 곳을 잃어’는 최백호가 스무 살이 되던 가을에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이듬해 부산의 어느 허름한 거리를 거닐다 어머니를 그리면서 쓴 가사라고 하는데요.

사람들은 이 노래를 듣고 연인과의 이별을 떠올리지만, 그는 어머니를 그리면서 노래를 불렀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그의 노래를 좋아하는 이유가 억지로 꾸미지 않고 있는 그대로 살면서 겪은 삶이 녹아있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데요.

당시 최백호의 데뷔곡인 ‘내 마음 갈 곳을 잃어’는 3개월 만에 6000장이 판매되어 가요계에 최백호의 이름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죠.

 

이후

1978년에는 독특한 창법으로 연이은 히트를 하여 정식 데뷔 1년여 만에 톱 가수 반열에 올랐고, 가요제가 한창 무르익을 1979년에는 인기 포크 록그룹 ‘산울림’, ‘사랑과 평화’, 인기 가수 김만준, 전영 등과 함께 대학가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얻으며 당시 가요계를 휩쓸며 주류를 이루던 트로트 가요를 밀어내고 새 바람을 일으킵니다.

최백호는 당시 국민 배우었던 김자옥과 1980년 결혼식을 올렸지만, 이후 3년 만인 1983년 돌연 이혼을 하게 되는데요.

최백호는 전 부인 김자옥과 이혼 이후 1년이 지난 1984년, 지금의 아내 손소인과 재혼하게 되었는데 최백호와 손소인 두 사람의 나이 차이는 8살 차이가 났다고 합니다.

손소인은 당시 콘트라베이스를 전공하던 학생이었는데. 최백호는 그녀를 친구 집에서 만났다고 하는데요.

 

친구

부인의 친구였는데, 그보다 8살 연하였고 첫눈에 ‘참 괜찮은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었지만, 감히 자신의 상대로 생각하지 못했죠.

그러다 우연히 몇 번 더 만나게 되면서 손소인에게 반해 끊임없이 따라다녔다고 합니다.

최백호는 “그렇게 몇 번 보니까, 좋더라고요. 그래서 친구한테 부탁을 했죠. ‘만나고 싶다’라고, 심각한 자리를 한번 만들어 보라고 했더니, 제 친구가 그러지 말고 자신이 전화할 때마다 자기 집에 놀러 오라고 하더군요. 그리고 지금의 집사람이 올 때마다 전화를 한 거예요. 꼬박꼬박 갔죠. 그랬더니, 나중에 집사람이 하는 말이 자기가 갈 때마다 내가 있으니까 처음엔 제가 그 집의 하숙생인 줄 알았대요. 그렇게 만났어요”라고 말했는데요.

하지만, 두 사람의 결혼에 대해 당시 처가의 극심한 반대로 포기할 상황까지 이르기도 했지만, 결국 결혼에 골인하죠.

하지만, 장인어른은 결혼식에 끝내 참석하지 않았다고 하는데요.

최백호는 “결혼하기 전 처가의 반대가 심해서 내가 물러나야겠구나 생각했죠. 그런데 아내가 굉장히 강한 면이 있거든요. 아마 아내가 아니었으면 결혼 못 했을 거예요. 결혼하고 나서도 굉장히 힘들었어요. 제가 돈을 거의 못 벌었으니까요. 고생 많이 했죠. 아마 내가 처가 도움을 많이 받았을 거예요. 아내 덕분에 집도 사고 편안해졌죠. 저는 워낙 돈 욕심 없는 사람이고요”라며 웃었는데요.

그는 연하의 아내와 재혼한 후 복귀했고, 삼각산 경국사에 들어가 가수로서의 마지막 승부를 걸고 작곡에 전념하기도 했지만, 1년 후 시인과 촌장을 끝으로 미국으로 이민을 가게 됩니다.

이후 최백호는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미국 처가의 도움으로 잠시 한인 방송 라디오 코리아 DJ로 활동하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한인 방송국이 망하고, 또 본인도 다시 노래를 하고 싶어 해서 그 후 1990년 2월에 다시 귀국하여 공연 관련 활동을 재개하죠.

그리고 이후 1996년 삶의 허무와 지나간 시간에 대한 미련을 담은 ‘낭만에 대하여’라는 곡이 드라마 ‘남자들’에 삽입되어 선풍적인 인기를 끌게 되는데, 당시 앨범이 무려 35만 장이나 팔렸고, 지금도 인기를 얻고 있는 곡입니다.

최백호가 부른 노래 중 명곡으로는 ‘내 마음 갈 곳을 잃어’, ‘낭만에 대하여’, ‘영일만 친구’, ‘청사포’, ‘그쟈’, ‘아비’, ‘뛰어’, ‘마이웨이’, ‘다시 길 위에서’, ‘바다 끝’, ‘부산에 가면’ 등이 있는데요.

최백호는 한때 업장을 일곱 군데나 도는 곳에 질려 가수를 그만두려는 생각까지 했었지만, 지금은 노래하는 시간이 너무 행복하다고 합니다.

그는 ‘영일만 친구’, ‘청사포’, ‘낭만에 대하여’ 등 여러 히트곡을 발매한 만큼 저작권료도 많이 받는다고 하는데요.

 

아무런

노력 없이 나오는 돈이라서 많은 액수를 받는 것에 미안하다고 솔직한 마음을 털어놓기도 했죠.

그는 2008년부터 SBS 라디오 ‘최백호의 낭만시대’를 15년간 진행해 오고 있는데, 공교롭게도 ‘낭만 시대’에 이어 방송되는 ‘기분 좋은 밤’의 DJ는 김자옥 씨의 막냇동생인 김태욱 아나운서였습니다.

안타깝게도 김태옥 씨도 고인이 되었죠.

최백호가 앞으로도 지금처럼 편안하고 여유 있게 그리고 오래도록 우리 곁에서 좋은 노래를 들려주기를 바라며 그의 행복하고 건강한 노년을 기원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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