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틴 스타… 고교알개 출연 배우 이승현의 눈물겨운 소식… 15년째 아들 얼굴 한 번 못 보고 결국… 그의 눈물겨운 근황..

개그맨 김국진은 “인생은 롤러코스터와 같다”라는 말을 했는데.

인생에는

때때로 그것은 좋지만 다른 때는 정말 나쁩니다.

작품 ‘식스모스고’로 유명한 이승현의 인생을 보면 롤러코스터가 만만치 않다.

이승현이 근황을 전했다. 2일 방송된 MBN ‘스페셜 월드’에는 배우 이승현이 출연했다. 1970년대 ‘류자고교’를 통해 아역스타의 정점을 알린 이성현은 시골 드라마에 출연했다.

이승현은 4년 전 아내가 운영하는 수집품 가게에서 처음 만났다. 그는 “이 사람이 잘생겨서가 아니라 잘생겨서 공개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 인연이 된 것 같다”고 재혼 이유를 설명했다.

 

 

어린 나이에 이렇게 큰 성공을 거둔 사람은 거의 없고, 그 이후로 실패하고 바닥을 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이승현의 인생사는 많은 이들에게 전환점이 될 것이다.

더 알아봅시다.

오리지널 틴스타

배우 겸 방송인 이승현은 1961년생이다.

1966년 6세의 나이로 영화 ‘육체의 길’로 데뷔해 젊은 신랑 김정훈과 함께 아역 배우로 주목받았다.

배우 이승현이 어머니의 뜻으로 캐나다 유학을 떠났다. 그러나 어머니의 사업에 실패하고 노숙자가 되자 생계를 위해 일선에 뛰어들었다. 그는 “7년 동안 갈 곳 없는 공원에서 밤을 새며 고생했다”며 힘들었던 시절을 회상했다.

 

사실

그가 아역배우로 데뷔하게 된 것은 우연이었다.

이승현의 어머니는 “승현이의 첫 영화는 6살 때였어요”

“당시 조긍하 감독(육체의 길 연출자)께서 저희집 옆에 있는 여관에 묵고 계셨어요”

이승현은 연기에서 굉장한 재능을 보입니다.

이전에 연기를 배운 적도 없지만, 천연덕스러운 그의 연기는 실로 타고난 수준이었다.

요즘도 아역 배우들도 많지만, 당시 이승현의 연기력과 견줄 수 있는 배우는 거의 없을 정도로 뛰어난 연기력을 선보였죠.

1977년 아역배우로 활동하던 이승현은 <고교 얄개>라는 작품의 주인공이 되는데.

 

이승현은

당시를 떠올리며 그는 “‘야가이 ​​고등학교’ 주연 오디션을 봤는데 200명 모두 탈락했다”고 말했다.

“그래서 감독님이 다른 연극에 있는 저를 보시고 그 작품을 해보라고 제안하셨어요.”

“출연비로 100만원을 받았다. 그때 서울에 있는 집을 100만원에 살 수 있었다(지금은 1억원이 넘었다).”

그는 “영화 20편을 만들고 김만 사용해서 집 20채를 감당할 수 있었다”고 회상한다.

아마 40대, 50대, 혹은 더 나이 드신 분들은 당시 나두수(‘옥포토’ 시리즈의 주인공 이름) 역을 맡았던 이승현을 기억하실 것이다.

1977년 개봉한 영화 ‘오리새고교’는 25만명의 관객수를 기록하며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후 이승현을 주인공으로 세운 ‘얄개’ 시리즈가 영화계 흥행 보증 수표가 되면서 그는 엄청난 인기를 누리게 되었는데.

그를 섭외하기 위한 경쟁까지 붙다보니 이승현의 출연료는 150만원에서 200만원 최고 500만원까지 올랐다고 합니다.

이후 그는 <결혼행진곡> <얄개행진곡> <대학 얄개> 등 100여편의 영화에서 주인공 역할을 맡습니다(얄개 시리즈는 약 20편).

이러한 활약으로 1973년 청룡영화제 장려상, 1974년 제13회 대종상 영화제 특별상, 1977년 제13회 백상예술대상 특별상을 수상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얄개 시리즈로 화려한 전성기를 보냈던 이승현에게 안타깝게도 큰 시련이 닥쳐오게 됩니다.

아무도 불러주지 않아..

이승현은 성인 배우가 되면서 이미지 변신을 모색했는데.

 

아역

배우 이미지가 너무 강해서 어떤 영화에 출연해도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한다.

이승현은 “이 작품을 안 해본 사람들은 배우가 아이에서 어른으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겪는 고통을 모른다”고 말했다.

“사람들이 그 과정을 견딜 수 없어서 영화 산업에서 은퇴하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닙니다.”

“이매진 얄개(10대 이미지 이승현)가 섹스신이 있다. 느껴지시나요?”

그는 당시 솔직하게 “결국 ‘이승현은 고등학생 때 똑똑한 소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성인 영화는커녕 일반 영화를 만들기도 어렵다”고 솔직하게 말했다.

이처럼 이승현은 연기 인생에 큰 차질을 빚었다.

캐나다에서의 삶은 지옥과도 같습니다.
이에 대해 이승현의 어머니는 이승현에게 캐나다 유학을 적극 권유하며 “계속 배우로 살기보다 해외에 가서 더 공부하고 더 넓은 세상을 보고 싶다”고 말했다.

결국 힘든 연기 생활에 지친 이승현은 어머니의 뜻에 따라 1986년 캐나다로 유학을 떠났다.

 

 

유학원을 하던 삼촌의 지인을 믿고 캐나다로 떠났지만 얼마 안 있어 심장마비로 유명을 달리하는 바람에 이승현은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던 캐나다 땅에 그야 말로 혼자 남겨지게 되었다.

게다가 한국에 있던 어머니의 사업이 실패하면서, 이승현이 애써 모았던 재산이 모두 날아가게 됩니다.

이때부터 그는 살기 위해 다니던 대학도 포기하고 레스토랑 서빙, 청소, 막노동, 교포슈퍼에서 야채 다듬기, 지렁이 다듬기 등 닥치는데로 일을 하게 되었다.

집이 없어 캐나다 길거리에서 7년동안 노숙을 했다고 하는데.

이승현은 “햄버거를 굽고 화장실 바닥을 닦고 손이 부르트도록 낚시용 지렁이를 잡았어요”

“막노동도 했고, 레스토랑에서 접시도 닦았고, 호텔에서 청소부로도 일했죠”

“내가 남의 나라에서 무슨 짓거리를 하나 싶었어요.후회도 참 많이 했습니다”

“한국에 있었으면 어려움 없이 연기 활동을 계속 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후회도 많이 하죠”라고 밝혔다.

결국 이승현은 1993년 캐나다를 떠나 한국으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당시 필리핀에서 의료 봉사 활동을 하고 있던 어머니를 따라 필리핀으로 떠납니다.

거기서 이승현은 선교사로 활동하면서 목사가 되고, 독실한 크리스천인 아내를 만나 결혼도 합니다.

 

이승현과

부인 사이에는 아들을 한명 두게 되었죠

하지만 필리핀에서의 생활은 이승현에게 맞지 않았다.

어머니가 강제로 시키니 할 수 없이 끌려간 것일뿐 이승현의 성향과 맡지않는 생활이었기 때문입니다.

더불어 이승현이 연기 생활을 시작하면서 아내와의 갈등도 심각해졌는데.

이승현 씨의 아내는 남편이 다시 배우 생활을 하는 것을 반대했다고 합니다.

“게다가 영화 바닥을 워낙 싫어하고 편견이 심했어요.배우 하면 외박, 술, 스캔들 그런 것만 생각했죠.”

“아내는 내가 배우가 아닌 목회자가 되길 바랐죠.”

 

결국

이승현은 연기 활동을 위해 1년여간 가족과 연락을 끊었다.

이승현과 아내가 결국 이혼한 이유이기도 하다.

이후 이승현과 후배들이 영화사를 차렸지만 이 역시 사기로 처참하게 실패했다.

이승현은 결국 감독직을 사임하고 자살을 결심했다.

이승현 “어쩔 수 없어서 초등학교 3학년 때 한강에 술 먹으러 갔다가 자살했다”

하지만 죽음도 쉽지 않다. 어린 아들과 단 둘이 살던 어머니의 얼굴이 생각나서 죽음을 포기했다. ”

이후 이승현은 뮤지컬 ‘홈커밍’ 등 영화에 조연으로 출연하며 컴백을 노리고 있다.

더 이상 이전과 같은 주인공은 없으며 내가 할 수 있는 캐릭터만 있습니다.

이승현의 비극적인 상황이 폭로되면서 류자오의 40~50대 올드 영화 팬들이 주축이 됐고, ‘옥자 이승현 구출작전사령부’까지 세웠다.

또한 두 사람은 최근 연인으로 만나 신혼생활을 즐기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두 번째 부인과 함께 양파집에서 일하는 근황도 방송을 통해 공개됐다. (간헐적으로 공연예술활동을 함)

 

이후

2019년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15년째 남아있는 유일한 혈육인 친아들과 절연하는 등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합니다.

이혼할 당시 경제적인 문제가 컸고, 감정이 많이 상한 상태인 것이 친아들과 절연한 이유로 보이는데.

전 처와 아들이 같이 살고있기에 친아버지와 연락하기가 껄끄러울 수도 있죠.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가 선택한 삶인만큼 앞으로 힘든 일 없이 행복하게 살 수 있기를 바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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