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껏 독신으로 살아온 자신을 후회해본 적은 없다”고 말하는 윤미라 씨. 윤미라 씨가 과거에 괴로웠던 기억은 모두 잊어버리고 행복하고 건강하게 연기 생활 잘 하시기를 응원하겠다.
1970년대 가장 스타를 꼽으라면 단연 윤미라다. 한국 여배우로서 그녀는 전성기의 젊은 스타들이 부럽지 않은 아름다운 여배우다.
어머니를 따라 무용수가 되는 것이 꿈이지만 우월한 외모와 뛰어난 체력으로 주변에서 연예인이 되라고 요구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그녀의 연기 경력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대한민국을 발칵 뒤집는 사건이 발생했다.
인미라 씨는 순식간에 최악의 이미지에 빠졌고, 3년 후 뜻밖의 반전 결말이 나왔다.
지금부터 윤미라 씨의 미혼을 후회하는 이유에 대해 알려드리겠습니다.
윤미라 씨는 1951년 12월 18일 생으로, 2남 3녀 중 장녀로 자랐다.
어렸을 때부터 워낙 예뻐서 미모로 이름을 떨칠 정도였는데요.
또 윤미라 씨는 고등학교 시절에도 남의 눈에 확 띌 정도로 빼어난 미모를 갖고 있었기에, 주위 사람들이 영화 배우를 해보라고 권유를 많이 했다.
키도 그 당시 여자로서 보기 드물게 컸는데, 168cm나 되어서 몸매까지 하늘이 내린, 한 마디로 군계일학이였다.
원래 윤미라 씨는 어머니를 따라 무용가가 되길 꿈꿨다고 해요.
중년이 된 후 주로 주인공의 어머니 역으로 많이 나왔으며, 2013년~2014년 MBC 일일드라마 “빛나는 로맨스”에서 주인공 오빛나(이진 분)를 마구 구박하고 괴롭히는 악질 시어머니 허말숙 역으로 출연해 악역[3]을 맡았다.중견 배우로서는 드물게도 배우로서의 활동에 집중하고 그 외에 예능 출연은 거의 하지 않는 편이다. 결혼에 관련한 식상한 질문들 때문에 출연을 꺼린다고 한다.
그러나
그녀의 빼어난 미모와 몸매 때문에 주변 사람들이 그녀를 배우로 밀어붙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실제로 오디션을 봤는데 2300대 1을 뚫고 배우의 길을 가게 됐다.
윤미라는 1969년 영화 ‘사랑하고 있어요’로 단역 배우로 데뷔했다.
1973년 영화 ‘처녀 뱃사공’에 출연해 참신하고 인상적인 연기를 펼치며 대종상과 신인상을 수상하며 유명세를 탔다.
이후 1977년 영화 ‘고가’에 출연해 대중상과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며 뛰어난 연기력을 선보이며 이 영화를 통해 미모와 연기력을 겸비한 스타 여배우로 인정받았다.
또한 윤미라 씨는 1978년 영화 ‘어머니의 하늘 아래서’에서 뛰어난 연기력으로 백상예술대상과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며 연예계 연승 행진을 이어갔다.
인미라는 당시 흔치 않은 서양식 절묘한 마스크를 소유했고 통통한 몸매와 섹시하고 고혹적인 매력으로 대한민국 최고의 섹시스타로 떠올랐다.
그녀는 ‘한국판 마릴린 멜로’로 불린다. 윤미라가 한국 여배우 대표로 미국에 소개되면서 할리우드 영화에 진출할 기회가 뒤따랐다.
1978년 007 영화까지 촬영한 할리우드 유명 감독 테렌스 영이 당시 570억원이라는 막대한 제작비를 투자해 영화 ‘오! 인천! > 한국 여배우를 찾습니다.
이번 오디션은 윤미라 씨가 31번째로 참가한 것으로 헤론스 영 감독을 비롯한 할리우드 제작진이 그녀의 뛰어난 미모를 보고 단숨에 그녀를 여주인공으로 발탁했다고 전해진다.
당시 윤미라는 기라성을 비롯한 많은 한국 여배우들을 제치고 당당하게 스카우트에 발탁됐다.
개런티가 5천만 원이었는데, 이때가 1970년대 말이니까, 당시 물가를 감안하면 지금 돈으로 무려 10억이 넘는 큰 금액입니다.
그런데
운명처럼 오인천이 촬영에 돌입하려던 찰나 엄청난 스캔들이 터져 윤미라의 인생을 뒤흔들었다.
이 스캔들로 인해 윤미라는 할리우드에서 연기 활동을 중단했다.
1970년대 후반 윤미라와 양말 공장장과의 불륜 스캔들이 언론을 뜨겁게 달궜다.
대종상, 백상예술대상 등 권위 있는 상을 수차례 수상한 윤미라는 연기자로서의 인기가 절정에 달했지만 양말 공장 사장과의 불화설로 장기 소송에 휘말렸다.
지금은 간통죄가 폐지되었지만 1970년대에 간통죄는 법으로 처벌할 수 있는 중대한 범죄였습니다.
하지만 1970년대에는 사람들의 생각이 보수적이었기 때문에 여배우가 불륜에 빠지면 이미지가 크게 훼손될 뿐만 아니라 여배우로서는 사형에 가까운 형벌에 가까웠다.
이처럼 윤미라는 1970년대 후반 간통죄와 사기죄로 피고인으로, 홍씨는 비방과 간통죄로 피고인으로 재판을 받았다.
재판 과정에서 윤미라씨는 “홍씨에게 1000만원을 빌린 것은 맞지만 홍씨 말대로 나와 홍씨 사이에 부적절한 관계는 없다”고 강하게 부인했다.
법정에서 매우 이례적인 사건으로 홍 씨는 자신이 불륜 관계에 있었다고 여러 차례 주장했고 윤미라 씨는 그런 사실이 전혀 없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렇게
윤미라 씨와 홍 씨 간에는 서로 첨예하게 반대되는 주장으로 진실 공방을 벌였기에, 이 재판은 무려 3년을 끌게 되었다.
이렇게 재판을 하는 3년 동안 윤미라 씨는 일체의 연기 활동을 중단하게 됩니다.
이후 윤미라의 간통 혐의에 대한 구속 영장은 기각되는데요.
당시 사건을 담당했던 이용우 판사(서울형사지법)는 1979년 3월 22일 판결에서
“이들이 간통했다는 혐의가 뚜렷하지도 않고, 윤양이 홍씨부인에게 써준 사과문에서 간통사실을 시인했던 것은 홍씨 부인이 고소를 취하해주기로 했기 때문이다”
“설사 간통리라 할지라도 동거한 것도 아니고, 금전 수수가 있었던 점으로 미루어보아 간통으로 볼수없다”
“피의 사실이 인정된다 할지라도, 돈을 받고 정사를 벌였다.따라서 홍문웅이 윤미라와 동거생활을 한 것이 아니고, 돈주고 몇번 바람 피운 정도에 그친 것이다”라고 말했는데요.
판결문을 통해 지금과는 전혀 다른 당시 사회의 분위기를 확인하게 되는데요.
그리고
3년이 지난 후, 대법원 최종 판결에서 윤미라 씨는 무죄 판결을 받게 됩니다.
이후 윤미라는 홍문웅에 ‘명예훼손죄’로 소송을 제기하고 승소하게 됩니다.
처음에는 홍문웅이 징역 10년에 집행유예 2년을 받았지만, 나중 항소에서 벌금 50만원이 선고됩니다.
비록 재판에서 윤미라 씨가 무죄 판결을 받았지만, 그녀의 이미지는 크게 훼손되고 말았다.
그 후 윤미라 씨는 영화 작업은 거의 하지 않았고, 드라마 위주로 작품을 하게 됩니다.
윤미라 씨는 집안의 맏딸이었고 아래로 4명의 동생들이 있었는데, 그녀는 집안에서 사실상 가장 역할을 해왔다.
윤미라 씨는 책임감이 무척 강해서 어머니를 모시면서 네 명의 동생들을 부양하는 데에 전념해 왔고, 또한 너무도 바쁜 연기 활동을 해왔기 때문에 남자를 만나서 연애하는 데에 신경 쓸 틈이 없었다고 합니다.
윤미라 씨가 결혼하지 않은 또 다른 이유를 들자면 유부남 홍 씨와의 불륜 스캔들도 그녀가 남자를 멀리하게 된 계기가 되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실제로
윤미라 씨는 양말 공장 사장과의 불륜 스캔들 이후에는 전혀 남자를 만나지 않고 연기 활동에만 전념해 왔다.
그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거의 3년 동안 연기 활동도 전혀 하지 못하고 재판에 끌려다니면서 여론의 심한 뭇매를 맞아온 그녀가 남자들에게 얼마나 큰 불신감이 생기고 크게 실망하게 되었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몇 가지 이유들로 인해서 눈부신 미모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윤미라 씨가 결혼하지 않고 독신녀로 살게 된 것이 아닌가 추정해 볼 수 있다.
그런데 윤미라 씨가 최근 한 인터뷰에서 자신의 속내를 솔직하게 털어놓은 적이 있다.
“자신이 진정으로 존경할 수 있는 좋은 남자를 만나 결혼해서 자선 사업을 하면서 살고 싶다”는 소망을 밝힌 것이죠.
그럼에도 “지금껏 독신으로 살아온 자신을 후회해본 적은 없다”고 말하는 윤미라 씨
윤미라 씨가 과거에 괴로웠던 기억은 모두 잊어버리고 행복하고 건강하게 연기 생활 잘 하시기를 응원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