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대표 ‘근육남’이라고 하면 항상 첫 번째로 떠오르는 인물은 바로 김종국입니다.
근육질의 몸답게 연예인 싸움 순위에서 늘 상위로 거론되는 인물이죠.
하지만
아주 오랫동안 그는 반 고문 성격의 체벌을 여러 번 받았고 몇 차례 기절했습니다.
오늘은 김종국의 슬픈 삶과 그가 유승준을 사랑한 이유, 중국 사람들이 불러달라고 할 정도로 김종국에 열광하는 이유에 대해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김중국-중국’.
논란이 되고 있는 연예인들이 상황을 회피하거나 약속을 어기기 위해 일관되지 않은 말이나 행동을 사용하는 경우, 우리는 가혹한 비난과 함께 유머 코드로 패러디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대표적인 사례로는 김상혁의 “술을 마셨지만 음주운전은 하지 않았다”는 발언, 신정환의 “뎅기열 입원 가짜 사례” 등이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1순위로 손꼽히는 전설적인 사건은 바로 20년째 전 국민의 욕을 먹는 유승준의 병역 기피 사건입니다.
당시 전 국민의 적이 되어버린 배신자인 유승준이었기에, 평소 그와 친했던 연예인들은 유승준이란 석 자를 입 밖에도 꺼내지 않았죠.
하지만, 김종국은 유일하게 세상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그는 내 친구’라고 당당히 감싸며, 세상이 놀랄 만한 행동을 해서 화제였습니다.
그 후 힘센 이미지와 맞지 않는 공익 복무 논란으로 인해, ‘역시 유승준의 친구답네’, ‘3대 500 근육남 김공익’ 같은 악플과 조롱 및 수많은 비난을 오랜 기간 받으며 꽤나 긴 침체기를 겪었습니다.
김종국은 대체 어떤 인생을 살았기에 가해자보다는 X행 피해자로 지내게 되었는지 그리고 그의 친구 유승준과 나아가 심지어 동생 MC몽까지 보호했던 이유, 마지막으로 중국인들이 그를 왜 ‘김중국’이라고까지 부르는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김종국
1976년 경상남도 합천군에서 태어났다.
원래는 태권도 선수가 되기 위해 일찍부터 준비를 했으나, 허리 디스크로 인해 운동을 그만뒀습니다.
그러다가 가수를 꿈꾸며 본격적인 가수의 길을 걷기 위해 ‘터보’ 오디션에 도전했다.
“사실 2인 터보 오디션에 제가 가장 먼저 합격했어요. 그런데 김종국보다 먼저 선발된 다른 멤버들은 굉장히 혹독하게 연습을 해야 했고, 밤에 다 도망갔어요. 아니, 그런데 제가 도망치면 여기서는 지지자가 없을 거라 화를 참았는데 종국이가 뒤늦게 당선되는 걸 보면서 항상 ‘동생이 버텨야지’ 하는 의심이 들었지만 더 버텼다. 그런데 종국이와 나는 울었다고 맞고, 우리 둘 다 몰래 변기에 매달린 채 어떻게 울었는지 모른다.
실제로 김정남이 그토록 담담하게 들려주는 터보 시대의 일화들은, 파고들면 소름이 돋을 만큼 잔인했다.
당시 터보의 ‘스타뮤직’ 소속사는 조폭과 연줄이 있는 회사로 알려졌다.
김종국이 학창 시절을 보낸 안양에서 그의 싸움 실력은 유명할 정도로, 누구에게 일방적인 폭행을 당할 성격도 체격도 아니었지만, 마치 서커스단의 호랑이처럼 그는 어릴 때부터 일찌감치 조련을 당했던 겁니다.
얼마나 트라우마가 심했는지 그와 김정남은 소속사 대표 이름만 들어도 자다가 경기를 일으킬 정도로 너무나 무서워했으니까요.
빠따를 한번 때리기 시작하면 다리와 둔부가 터지고 물집과 고름이 잡혀 다음 날이면 자력으로 들어갔다 일어설 수도 없었으며, 딱히 아무 잘못을 안 해도 사장 스트레스 풀이용으로 두 사람의 얼굴과 눈을 후려치고 발로 걷어찼다고 합니다.
김정남이야 그렇다 치고 막내 김종국은 왜 이런 말도 안 되는 상황을 버텼을까요?
김정남이 여기에 대해서 얘기합니다.
사실
하루에 17개 중 10개를 소화해 비행기를 4번이나 탔는데, 대부분 잠은커녕 밥 먹을 시간도 없었고, 녹화 도중 갑자기 기절해 기절하는 운전자들을 자주 봤습니다. , 또는 여러 번 파티를 응급실로 데려갔습니다. 나는 그것을 보았다.
이후 노예 생활이 드디어 밝혀지자 ‘스타뮤직’ 관련자들이 구속됐지만 소속사 대표는 해리어처럼 법을 회피했다.
정신을 잃은 김정남은 결국 은퇴해 은둔생활을 하게 됐다. 이어 ‘마이크’라는 새로운 멤버가 합류했지만 CEO는 변함없이 지하에서의 영향력 있는 사기와 구타가 계속돼 ‘마이크’ 역시 터보 해체 이후 우울증으로 장기 치료를 받았다. 나는 막 그것들을 받으려던 참이었다.
당시 김종국은 책임을 지기는커녕 자신도 모르게 서명한 노예계약으로 고통을 겪었다.
계약 만료 후 다른 소속사와 계약을 맺으며 솔로 활동을 시작하려 했으나, 작곡가들이 이를 눈치채고 이전 소속사의 간섭으로 곡을 발표하지 않자 첫 음반을 내고 결국 발매하게 됐다. 하지만 방송사를 장악하고 출연을 방해한 전 소속사의 행동으로 인해 2년 반의 공백기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후 두 번째 솔로 앨범 ‘One Man’으로 대박을 터뜨린 뒤 예능 강자로 자리매김했다.
드디어 김종국이 전성기에 돌입하면서, 군 기피 논란으로 공공의 적이 된 유승준이 결혼을 하게 된다.
언론
대중 모두 유승준이란 단어에 엄청 공격적이고 치를 떨었던 시기라 유승준과 친분이 있던 유명 연예인들은 그의 결혼식에 가는 걸 꿈도 못 꿨었죠.
이때 유일하게 유승준 결혼식에 참석하려고 미국으로 떠난 이가 김종국입니다.
만류를 뿌리치며 다른 연예인들이 그에게 맡긴 축의금을 들고는 홀로 미국으로 떠나 결혼식에 참석한 후, 기자들이 기다리는 고국으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매섭게 몰아붙이는 기자와 네티즌들을 향해 그는 딱 한마디로 대답합니다.
“승준이와 약속했습니다. 친구 결혼식에도 못 갑니까?”
대한민국 모든 남자의 공공의 적이 된 유승준이지만, 단지 친구의 결혼식이자 이미 가겠다고 약속했으니 남들의 시선이야 어떻든 간에 그는 의리를 지키러 떠났습니다.
이유인 즉슨, 김종국이란 인물은 중국인들이 사랑할 수밖에 없는 캐릭터니까요.
인기 배경은 다음과 같습니다.
유승준은 국내 활동이 막힌 이유로 같은 아시아권인 중국에서 제2의 인생을 도모합니다.
중국에서 앨범 2장을 내고 가수로 활동했던 유승준은 월드 스타 성룡의 눈에 띄어 성룡의 소속사와 전속 계약을 맺게 되죠.
그는
성룡의 전폭적 지원 아래 가수뿐만이 아니라 배우로도 성공하게 됩니다.
그리고 ‘런닝맨’이 중국에서 대박을 치며 김종국이란 인물도 주목을 받게 되죠.
중국의 무협지를 보면 중국은 항상 ‘꽌시’, ‘의리’ 이런 것들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이승준의 결혼식 일화가 알려지며 김종국의 의리가 주목받기 시작했고, 또한 중국 배우들에게 찾아볼 수 없는 한국 대표 근육남의 몸매, 나아가 여성이나 약자에게 약한 다정한 모습, 뛰어난 노래 실력 이런 그의 매력은 단숨에 중국인들의 환심을 사며 엄청난 인기를 얻었었죠.
현재도 중국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한국 연예인 1순위에 매번 꼽히는 연예인입니다.
사람은 잘 나갈 때가 아닌 어려움을 겪을 때 진짜 친구를 만나게 됩니다.
개인적으로 이런 친구 한 명만 있어도 성공한 인생인 것 같습니다.
멋있는 김종국의 인생을 앞으로도 오랫동안 봤으면 하는 바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