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척’은 부모 앞에서 자식이 죽어가는 슬픔을 일컫는 말로, 이 세상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지독한 슬픔을 뜻한다. 전 재산을 탕진하고 사랑하는 딸까지 잃은 아내가 실종되면서 인생 최대의 시련을 겪어야 했던 가수 서수남의 파란만장한 삶을 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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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수남은 무당의 외아들이자 독자 3세로 태어났다. 그는 생후 100일쯤 되었을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기 때문에 홀어머니 밑에서 혼자 살았다고 증언했다. 서수남의 어머니는 가수는 늙어서도 할 수 있는 직업이라며 가수 활동을 반대했다.
화학과를 졸업하고 나중에 비료공장에 취직해야 한다고 생각한 그는 몇 년 후 그만두겠다고 약속한 뒤 마침내 가수 활동을 시작했다고 밝혔다. 노래 레슨.
MBC ‘웃다 복이 온다’에서 하청일과 함께 서수남-하청일 2인조로 데뷔한 서수남은 1969년부터 동물소리를 흉내내는 동물농장으로 유명해지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이후 1971년 ‘팔도 크루즈’라는 노래로 대중에게 널리 알려지게 되었고, 1973년 발표한 노래 ‘채터’는 당시 만화가요로 화제를 모았다.
그리고 1975년에는 ‘우리가 잘하는 과수원길’이라는 노래가 인기를 끌며 교과서에도 등장했다. 따라서 서수남과 하청일의 듀오는 컬투와 마찬가지로 노래와 개그를 동시에 하는 듀오로 여겨졌으며, 노래뿐만 아니라 무대에서 개그도 펼쳤다. 서수남은 가수로 데뷔해 많은 사랑을 받았지만 20년이 지난 어느 날 뒤돌아보니 남은 게 없다고 했다.
함께
듀오로 활동했던 하청일은 운동용품 사업이 잘돼 이미 가수가 되었고, 솔로로 활동하던 서수남은 발표하는 곡마다 별로 실력이 없었다. 그 곡이기도 하고 실력이 많이 떨어진 것 같다고 하더군요.
그러나 2000년 9월 24일, 그의 아내는 돌이킬 수 없는 죄를 지었다는 편지 한 장만 남기고 사라졌다. 확인해 보니 아내가 부적절한 투자기법으로 번 돈을 모두 날리고 16억 원에 달하는 막대한 채권을 남겼다고 한다. 그는 당시 “처음에는 아내가 노후 준비를 위해 주식과 부동산에 투자했는데, 일이 잘못돼 돈을 잃어 사채업자에게 빌렸다”고 말했다.
그는 채권자들이 노래 수업을 듣고 나서야 아내의 빚을 알아차렸고, 현금과 집을 모두 잃어버려 새 방을 살 돈조차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무릎을 꿇고 채권자에게 1년만이라도 살려달라고 간청했지만, 채권자들은 간간히 서수남의 집에 찾아와 그를 재촉했다. 이런 상황을 겪은 딸들은 사회공포증을 앓고 있다고 진술했다.
아내의 투자 실패로 전 재산을 잃은 서수남은 한 줄기 희망도 없이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지옥과 같다고 말했다. 물론 그가 이끌었던 음악학원도 모두 문을 닫았고, 그는 평소 “이혼하지 마세요. 행복하게 살아야 해.” 그는 자신도 그런 일을 겪었기 때문에 주부들을 보는 것이 부끄럽다고 말했다.
그는
당시 “작은 희망도 없이 살아갈 용기가 없었고, 심지어 잠에서 깨어나 아파트 창문을 열고 아래를 내려다볼 때마다 마음이 아팠다”고 고백했다.
하지만 이때 자신을 붙잡아준 사람은 어머니였고, 26세의 나이에 혼자 남겨졌을 때 자신을 이렇게 키워준 어머니의 마음에 못을 박을 수가 없었다고 한다.
어머니는 매일 2시간씩 침대 곁에서 서순남을 위해 울며 기도하며 생명을 포기하고 불구가 된 서순남에게 전화를 걸었고, 어머니는 “어떤 사람은 몸이 있고, 살아있다면 그게 고마운 일이고, 그럴 수가 없어요. 일이 없어요.” 처음에는 그 말을 듣지 못했으나, 이제는 엄마가 서수남의 삶의 흔적이 되었다고 하신다.
그런 역경을 딛고 하루하루를 충실하게 살아온 게 정말 안타깝지만 불행이 또 찾아왔다고 한다. 어려울 때 자신을 뒷바라지해주었고 인생에서 가장 존경했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고, 미국에서 결혼한 첫째 딸이 교통사고로 먼저 천국에 가야만 했다고 한다.
어느 날 그녀는 미국의 한 병원에 전화를 걸어 딸을 위한 베이비시터를 찾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에 병원 측에서 한국에 있는 서수남 씨에게 연락을 했는데, 딸이 교통사고를 당해 위출혈로 위독한 상태라 빨리 전화가 오겠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비행기를 예약하고 떠나려던 중 병원에서 다시 전화를 걸어 딸이 이미 죽었다고 했습니다. 병원 규정에 따라 시신을 화장한 뒤 유골을 화물기로 운송했고, 서수남 씨가 유골을 인천터미널까지 가져왔다.
내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런 벌을 받는가?” 그는 마음속으로 많이 울면서 말했습니다. 그는 꽃처럼 아름다웠던 딸의 아름다운 미소를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고, 이는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가슴 아픈 사건 중 하나라고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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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심이 조금 줄어들면 세상이 더 쉬워집니다. 남에게 양보하는 태도도 필요하며, 덕을 베풀 수 없더라도 양보하는 것이 매우 편하다. 한 가지 더 있다면 감사의 마음인데, 감사가 행복의 지름길인 것 같습니다. “서순남의 삶의 목적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그는 “내 작은 재능을 여러분께 드리고 싶다”고 답했다.
내 재능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다면 기꺼이 기부할 준비가 되어 있다. 노래는 이제 사역의 핵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당신이 하는 일은 항상 재미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주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은 내가 그것을 즐기고 있다는 것이다. 요즘은 그게 삶의 가치이고, 주변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고 노래를 부르는 게 작지만 큰 보상이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