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이 해외에서 사업을 할 때 제 돈이 많이 들어갔어요. 그때는 그래도 ‘우리 부부 먹고 살 건 남아 있겠지’라고만 막연히 생각을 했죠. 그런데 제 친구 어머니가 100세이신데, 아직도 정정하세요. 그런 생각을 하니까 앞으로 우리 부부도 얼마나 더 살게 될지 모르는 일이잖아요. 저는 지금까지 제가 쓸 돈을 하나도 안 쓰고 이미 노후 자금으로 돈을 모아뒀었어요. 그런데 돈이 자꾸만 아들 가족한테 다 나가게 되니까 저도 걱정이 되기 시작하는 거죠. 자식이 효도를 한다는 게 별게 아니에요. 자기 몫을 하고 사는 게 그게 효도예요라며 다 커서도 경제적 독립을 못하고 자기에게 얹혀사는 아들 가족을 기막혀 했습니다.
사미자의 며느리도 시부모님 집에 들어가 살게 된 배경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아직
한참 젊은 며느리가 자기도 이제는 아이들도 다 컸고 자유롭게 살고 싶어 하면서, 자식의 손주들까지 거둬 먹이고 경제적 가장이 되어 함께 살아야 하는 시어머니의 불편한 심경은 왜 헤아리지도 못하는지, 사미자의 며느리가 다소 뻔뻔스러워 보이기까지 했죠.
물론 사미자 아들 부부도 처음 한국으로 귀국했을 때는 경제적으로 독립을 하기 위해 애를 썼던 것으로 보입니다.

사미자의 며느리는 자기가 결혼 후 20년 동안 전업주부로 있었지만, 한국으로 귀국한 후 1년 정도 지나서는 이제 자기도 일을 하기 시작했다며 남편과 피자 가게를 하게 되었다고 언급을 했죠.
그런데 그마저도 오래 가지는 못했습니다.
사미자의 아들이 후두암 판정을 받으면서 암 투병에 들어갔기 때문이죠.
오랜 해외 생활로 사미자의 아들 부부는 들어둔 보험도 없었기 때문에, 결국 암 치료에 들어가는 돈은 사미자의 지갑에서 생돈으로 다 나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항암치료 중 일주일에 한 번씩 주사를 맞을 때마다 몇백만 원이 나갔다고 하니, 사미자의 노후 자금은 또 그렇게 어쩔 수 없이 아들에게 쓰이게 되었죠.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사미자도 아침 생방송 도중 뇌경색으로 쓰러지면서 큰 위기를 맞게 됩니다.
이때가 2018년이었는데. 사미자는 2005년에도 급성 심근경색으로 죽을 고비를 한차례 넘긴 적이 있었죠.
2005년 당시 사미자는 지방에서 드라마 촬영 중이었는데. 그날은 새벽부터 몸 상태가 예사롭지 않다는 것을 느꼈다고 합니다.
손과 발 놀림이 자유롭지 않았고 가슴에 묵직한 통증이 느껴졌다고 하죠.
사미자는 식은땀을 비 오듯이 흘리며 겨우 촬영을 마쳤는데 결국 돌아오는 차 안에 쓰러졌다고 합니다.
그렇게 사미자는 서울의 한 대학병원 응급실로 옮겨졌는데, 검사를 해보니 세 개의 심장동맥 모두가 꽉 막혀 있었던 상황이었고 심장 근육에 피가 공급되지 않고 있었다고 하죠.
당시
사미자는 40년이 넘게 눈코 뜰 수 없는 방송 스케줄을 소화하느라 건강을 제대로 돌보지 못했고 스트레스와 운동 부족 상태로 중년을 넘기면서 복부 비만에 체중은 68KG까지 늘었습니다.
사미자는 자기가 혈압과 콜레스테롤이 높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피가 조금 탁하다고만 생각을 했었지 그렇게까지 심각한 상태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고 하죠.
그렇게 사지마는 약도 복용하지 않았고. 그전에는 담배도 피웠다고 합니다.
병원을 옮겨가며 여러 차례 대수술을 받은 끝에 사미자는 겨우 목숨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당시 30분만 늦었어도 큰일 날 뻔한 아찔한 상태였다고 하죠.
4년 만인 2018년 또다시 사미자는 뇌경색으로 쓰러지면서 다시 한번 위기를 맞게 된 것이죠.
당시에도 사미자는 바쁜 스케줄을 이어갔는데 아침 생방송 출연으로 새벽부터 일어나 메이크업을 받는데 자꾸만 몸이 기울어져 계속해서 자세를 고쳐가며 겨우 화장을 받았고 사미자의 몸 상태에 이상함을 감지한 제작진은 사미자를 일부러 맨 끝자리에 앉혔다고 합니다.
아니나 다를까 사미자는 생방송에서 말을 어눌하게 하고 있는 자신이 느껴졌고, 그렇게 생방송 도중에 쓰러진 상태로 다시 한번 응급실로 실려가게 됩니다.
그렇게 사미자는 가까스로 목숨은 구했지만, 이제는 다리가 아예 마비가 되었습니다.
혼자서는 걷지도 못하는 상태가 되자 사미자는 제발 화장실만이라도 혼자 갈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를 했다고 하죠.
사미자는 남편과 함께 꾸준한 재활로 이제는 일상생활에 큰 불편함이 없지만, 아직도 사미자는 발톱을 혼자 깎을 수가 없어서 남편이 돋보기를 끼고 깎아줘야 하고 여전히 발운동을 하면서 재활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이렇게 사미자도 죽을 고비를 가까스로 넘긴 시기에 아들은 후두암 투병 중이었고 사미자의 남편 역시 심하게 넘어지면서 안면이 함몰되는 큰 사고를 당하게 되었다고 하죠.
당시 사미자는 어떻게 이렇게 불행이 동시에 올 수 있을까 기가 막혔다고 합니다.
사미자는 그렇게 큰일을 겪은 후 이제는 아침에 무사히 눈을 뜨는 것에 감사할 줄 알게 되었다며 제발 이렇게 평범한 일상을 유지할 수 있게만 해달라고 기도한다고 하죠.
사미자의 며느리도 사미자에 대해 불만이 많았습니다.
남편의 암 투병 당시 사미자의 며느리는 시어머니에게 큰 충격을 받았다며 방송에 나와 이렇게 말했습니다.
“결혼을 하고 어머님이 저희를 참 많이 도와주시기는 했어요. 그런데 저희 어머니는 항상 주시면서 주시는 티를 내는 그런 분이세요. 아마 저희 어머니는 이런 것 같아요. 내가 이만큼 해주는데 감사하다는 소리는 들어야지라고 생각하시는 것 같아요. 남편이 암 투병 중일 때 어머니도 뇌경색으로 쓰러지셔서 제가 한 2년 동안은 계속 병원과 집을 왔다 갔다 하면서 남편과 시부모님 병수발을 제가 다 했어요. 그렇게 저도 지치고 밥도 잘 못 먹고 다닐 때였는데, 어머니가 전화를 하시더니 ‘와서 밥 좀 해주고 갈래?’라고 부탁을 하시더라고요. 저는 지금은 잊었지만 그때는 그게 안 잊혀졌어요.”
사미자는 본인도 거동이 불편하고 남편도 안면 함몰로 고생 중인 상황에서 며느리한테 식사를 부탁했다가 쓴소리만 듣게 된 것이죠.
물론 사미자도 평생을 악착같이 일만 하고 돈을 아끼며 살던 사람이라 며느리가 그렇게 예뻐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아들 부부가 미국에서 사업을 하던 당시 사미자가 미국을 방문한 적이 있는데, 그때 며느리가 벤츠를 타고 다니고 집은 3000 불짜리 집에서 살고 있었다고 하죠.
그렇게 사미자는 ‘며느리가 돈도 안 벌면서 씀씀이가 크다’라고 생각을 했는데, 그런 며느리가 집으로 들어와 사미자의 돈으로 살림을 하며 같이 살게 됐으니, 당연히 며느리와는 처음부터 잘 맞을 수가 없었습니다.
사미자는 며느리의 자질구레한 씀씀이에도 잔소리를 하게 되었고, 며느리와의 갈등은 깊어질 수밖에 없었죠.
사미자의 며느리 또한 ‘자기도 애교가 있는 스타일이 아니라 시부모님과 한 집에서 사는 스트레스가 심하다’라며 ‘때로는 이렇게 살다가 진짜 큰 병이 생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라고 말하기도 했죠.
그렇게
받으면 분가를 하고 시어머니 눈치 볼 필요 없이 자기가 일도 하면서 사고 싶은 것 벌어서 사고 친구들과 여행 가고 싶으면 같이 여행도 가고 그렇게 편하게 살 것이지, 10년이 넘게 왜 80대 시부모님 집에 얹혀살면서 계속해서 스트레스를 받고 방송에 나와서는 답답함을 호소하는지 이해가 안 될 따름입니다.
심지어 재작년 한 방송에서 사미자의 며느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제가 하나도 안 써도 자식에게 주는 건 정말 하나도 안 아까워요. 물론 제가 가진 게 많지 않으니까 그럴 수도 있고 시어머니는 가진 게 많으시다 보니 그럴 수도 있겠죠. 저는 저희 애들한테 돈 쓰는 건 전혀 아깝지 않고 오히려 못 해주는 게 미안한데 시어머니는 자꾸 그렇게 돈 얘기를 하시니까 제 입장에서는 그게 너무 불편한 거예요”
한마디로 부모가 자식한테 돈을 쓰는 건 당연한 일인데 왜 그렇게 자꾸만 사미자는 아들 가족에게 돈을 쓰면서 자꾸 돈돈돈하며 자기에게 스트레스를 주느냐는 소리였습니다.
그런데 정작 사미자의 큰딸은 원래 서울에서 레스토랑을 운영하다가 해마다 올라가는 렌트비가 감당이 안 돼서 결국 지금은 제주도로 내려갈 레스토랑을 운영하며 열심히 일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서울에서는 이렇게 일만 하다가 죽겠구나 싶어서 선택한 제주도행이라고 합니다.
사미자는 딸에게 애틋한 마음이 있습니다.
딸이 갓난아이 시절 생계를 위해 열심히 뛰어다녔던 사미자가 어느 날 부득이하게 저녁 늦게 집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그때 딸아이가 너무 배가 고파서인지 무기력하게 울지도 않고 사미자를 쳐다만 봤다고 하죠.
사미자가 딸에게 너무 미안해서 급히 젖을 먹이려고 했지만, 아이는 젖을 먹을 힘도 없는 채 축 처져서 젖을 잘 먹지도 못했다고 합니다.
그때 사미자는 ‘딸아 미안하다’를 반복하며 울었다고 하죠.
딸이 초등학생 때도 엄마가 소풍을 같이 가줘야 하는데 일 때문에 같이 못 가고, 뒤늦게 갔다가 그때 딸아이가 혼자 울고 있는 모습을 사미자가 목격하게 됩니다.
이처럼 늘 눈에 밟히고 애틋한 마음이 있는 사미자의 큰딸은 오히려 엄마에게 도움을 받지 않고 자기 능력과 제주도로 내려갈 레스토랑을 하고 있는데, 그러니 사미자의 눈에는 대책 없이 일도 안 하고 자기 돈만 가져다 쓰면서도 살갑게 대하지 못하고 무뚝뚝한 며느리가 당연히 마음에 들 수가 없는 것이죠.
그렇게
평생을 가족들 뒷바라지만 하며 경제적 가장으로 살아온 사미자는 2018년 뇌경색을 경험한 후 조금씩 심리의 변화를 겪게 됩니다.
사미자는 “아직 자기는 살아있는데, 방송 섭외도 좀처럼 안 들어오고 그렇다고 자기가 평생 친구들과 밥을 먹으며 여유 있게 놀러 다니던 사람도 아니라 연락이 오는 친구들도 없었다”라고 하죠.
그렇게 사미자는 ‘왜 아무도 나를 안 찾지’라는 생각에 한동안 우울증에 시달리면서 매일 서러워서 울었다고 합니다.
그제서야
사미자는 자기가 희생양처럼 가족만을 위해 평생 헌신만 하며 살아왔고, ‘네가 일을 안 하면 너희 집은 안 되잖아’라는 사람들의 말에는 ‘내가 놀면 왜 안 돼?’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의 이기심이 생겼다고 하죠.
팔십이 다 되어서야 사미자는 이제 자기도 마음 편히 먹고 놀면서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요즘은 돈만 있으면 병원과 연계되어 있는 고급 실버타운에서 위기 상황의 버튼 하나만 누르면 응급요원들이 곧바로 달려와 응급조치를 취해주고 영양사가 최적의 영양을 고려해 만든 든든한 식사를 매끼 받아먹으며, 또래 친구들과 취미 생활도 즐기면서 그렇게 행복하고 편하게 그리고 보다 안전한 환경에서 건강하게 노후를 보낼 수 있는데, 사미자는 80대에 아들 가족에게 용돈을 받기는커녕 아예 자기가 아들 가족을 먹여 살리고 있는 데다가 며느리가 아침 밥상을 차려주나 안 차려주나 신경전을 벌이면서 아침으로 우유에 설탕이 잔뜩 들어간 시리얼이나 먹으며 궁시렁궁시렁 구실하게 80대를 보내고 있으니 기가 막힐 따름입니다.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인 줄 안다고 평생 가족을 위해 희생만 하고 베풀고 사셨으니, 이제는 아들 손주들 앞가림은 본인들이 스스로 하라고 하시고, 사미자 선생님은 이제부터 본인 부부 건강만 신경 쓰면서 마음 편히 행복하게 노후를 보내시길 진심으로 응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