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야…미안하다..” 임동진 뇌경색 비보를 접한 배우 이정길의 한 마디에 모두가 울음 바다가 되었습니다.

“친구야…미안하다..” 임동진 뇌경색 비보를 접한 배우 이정길의 한 마디에 모두가 울음 바다가 되었습니다.

안 좋은 일은 몰아서 오기 마련이죠.

연극에서 좋은 활약을 보여주고 있으면서 방송, 영화 가릴 것 없이 뛰어난 연기를 펼쳐 보였던 배우 임동진.

그는 2000년경 갑상선암을 겪은 뒤 뇌경색으로 하반신 마비 판정을 받아 희망이 어둠뿐이었던 시기를 견뎌냈던 적이 있습니다.

당시 응급실에 이송됐던 그는 의사에게 “나흘 안에 장례식을 준비하셔야 할 듯합니다”라는 말을 듣기도 했었는데요.

갑상선을 겪고 뇌경색으로 쓰러져 힘든 삶을 살아왔던 그의 삶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려 합니다.

좋은 활약으로 번성한 활약을 이어가다가도 한순간에 모습을 감추는 배우들이 있습니다.

배우가 어떠한 잘못으로 물의를 일으켜 방송에 나오지 않는 게 아닌 이상, 팬들은 건강을 걱정하곤 하는데요.

남다른 발성과 카리스마로 시청자들을 사로잡는 연기를 선보였던 배우 임동진 또한 어느 순간부터 방송에서 보이지 않았습니다.

특히 사극 드라마에서 출중한 능력을 보였던 그가 사라지자 아쉬움의 목소리가 들려왔었습니다. 카리스마로 시청자들을 사로잡았던 임동진은 사실 힘든 유년 시절을 겪었었는데요.

이북 출신이었던 그의 부모님은 한살배기 임동진을 안으며 월남을 시도했고, 인천에 몸을 옮길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정착하고 5년 후 발발한 한국전쟁으로 가족들은 흩어져야만 했습니다.

임동진은 어머니의 손을 잡으며 부산 피난길을 따랐지만, 끝내 가난을 피하지 못했고 어머니를 여의는 슬픔을 겪어야 했습니다. 10살이 되기도 전에 4명의 동생을 책임져야 했던 그에게 세상이란 원망의 대상일 뿐이었습니다.

이후 임동진은 버티고 버텨 서라벌고등학교에 진학했고 연극부로 활동했습니다. 당시 연극부에서 배우 이정길을 만나면서 현재까지 절친 사이가 이어져 왔다고 합니다.

임동진은 “정길이는 진짜 내 친구. 내 이야기를 전부 털어놓을 수 있고, 내가 정길이 이야기를 다 들을 수 있다. 정길이도 마찬가지”라고 말했습니다. 이어 “정길이 어머니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다. 정길이 어머니는 ‘내 새끼들 왔구나’라고 해주셨다. 정길이와 공감하는 부분이 많았고, 서로 깊이 이해했다”라고 덧붙였습니다.

이정길 또한 “동진이는 감성이 정말 풍부한 친구. 서로의 아픔을 이야기하면서 같이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소중한 추억을 함께한 친구”라며 회상했습니다.

 

 

힘든 유년 시절을 버틴 임동진은 성인이 되면서 연극 무대에 섰고, 배우의 길에 올랐습니다. 1964년 그는 연극’생명’으로 데뷔하면서, 많은 이들의 부름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1983년에는 드라마 ‘개국’에서 이성계를 맡으면서 전성기의 시작을 알리기도 했습니다. 이후로도 많은 작품에서 등장했고, 배우로서의 위치를 굳혔습니다.

그러나 2000년경 그는 갑상선암 판정을 받아 수술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수술은 잘 마쳤지만 그의 몸은 너무 약해져 있었고, 다음 해에는 갑작스러운 뇌경색이 찾아와 그를 힘들게 했습니다.

당시 임동진의 아내는 ‘쿵’ 소리와 함께 쓰러져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있는 임동진을 발견했다고 하는데요.

아내가 119를 부르려는 순간, 임동진은 아내를 말리면서 옆에 함께 해달라는 부탁을 건넸습니다.

임동진은 119가 온다 해도 소용없음을 느꼈고, 응급조치를 받는 시간 대신 1초라도 아내와 함께 있고 싶은 마음이 컸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의식을 잃는 순간까지도 “내가 떠나면 장기는 기증하고 나머지는 화장해 줘”라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이에 아내는 “당신이 가버리면 나도 따라갈 것이다”라며 눈물을 쏟아냈습니다.

이러한 아내의 모습에 임동진은 삶의 의지를 다시 붙잡았고, 아내에게 119를 불러달라는 말을 남기고는 의식을 잃었습니다.

임동진은 구급차로 병원까지 이송됐습니다.

그러나 의사는 “너무 늦었다. 장례를 준비하셔야 한다”라고 말했습니다.

당시 임동진은 나흘 동안 생사 사의 경계에서 고군분투를 하고 있었습니다.

임동진은 고군분투할 동안 임사체험을 했다고 전했습니다.

이어 그곳에서 예수님의 뒷모습을 보게 된 순간, 다시 의식을 찾을 수 있었다고 밝혔습니다.

임동진은 의식이 돌아온 후 일반 병동으로 옮겨졌습니다.

이후 의사는 아내를 밖으로 불렀고 한참의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아내는 흥얼거리며 안으로 들어왔지만, 임동진은 무엇인가 잘못됐다는 것을 직감했습니다.

“선생님이 뭐라셔?”

“뭐가?”

 

 

“내가 평생 연기만 했는데 당신 연기하는 걸 내가 모르겠어? 똑바로 얘기해, 뭐라고 하셨어?”

임동진의 나무람에 아내는 울음을 보였습니다.

임동진은 그제야 몸에 힘을 줘봤지만, 목과 손을 제외한 몸이 움직여지지 않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평생 휠체어를 타고 다녀야 하는 운명에, 임동진의 속에서는 통곡의 비명이 쏟아지고 있었습니다.

“나는 배우다. 몸이 이러니 뭘 할 수 있게나. 다음은 어쩌지? 그다음은 어떻게 하지? 라는 생각만 떠오르니 견딜 수 없었다”

그날부터 임동진은 1시간씩 소리 지르며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는 게 싫었던 그는 모두를 병실 밖으로, 심지어 아내까지도 밖으로 내보내며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3일 만에 침대에 앉기를 성공했고, 20일 만에 퇴원을 하는 기적을 보였습니다.

 

병원 측에서도 “그는 말 그대로 기적”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퇴원 후 일주일 채 지나지 않아 다시 연기를 시작했습니다.

임동진은 연기할 수 있을 정도로 몸이 빠르게 회복됐지만, 정신적인 후유증은 커져만 갔습니다.

오랜 우울증으로 아내에게 화내기를 반복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현명한 아내 덕분에 그 시기를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생각해 보면 아내 덕분에 고통을 이겨낼 수 있었다. 불행한 어린 시절에 힘들 때마다 나를 다독여준 사람은 아내뿐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임동진은 마음의 평화를 위해 목회자가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는 목회자의 삶을 살면서 마음의 안정을 찾았고, 정년 퇴임의 시기를 맞아 목회자의 삶을 끝냈습니다.

이후 임동진은 선교활동과 교회 강사로 초청되면서 복음을 나누고 있다고 전해졌습니다.

더불어 교수 준비를 하고 있다고 하는데요.

그는 현재 선교활동, 교수 그리고 연극 무대에서도 꾸준히 얼굴을 보이며 근황을 알리고 있습니다.

그의 모습에는 몸이 아파 힘들었던 시절을 겪은 흔적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는데요.

신앙인의 삶을 살면서 연기에 대한 손 또한 놓지 않으며 여전히 활동 중인 배우 임동진.

힘들었던 삶을 이겨낸 만큼 남은 길은 꽃들로만 가득하길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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