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당신한테 못한게 뭔데…” 절창 송창식.. 등골까지 모조리 빼먹은 부인과 또 다시.. 전재산 빼앗긴 것도 모자라서 이젠…

송창식은 전성기 시절 엄청난 퀄리티의 시대를 앞서간 곡들을 뽑아냈는데, 매우 많은 그의 노래들 대부분이 송창식 본인의 작사와 작곡이었죠.

송창식은

한창 잘나가던 때는 돈을 꽤 많이 벌었다고 하는데요.

하지만 금전 관리가 철저했고. 사업 수완이 있었던 윤형주는 많은 재산을 축적해 재산가가 된 반면에, 사람이 너무 좋아서 보증도 써주고, 돈도 꿔 달라는 대로 꿔주던 송창식은 많은 재산을 잃었다고 합니다.

물론 송창식이 돈을 잘 벌던 시절에 알랑대며 돈을 꿔 간 사람들 중 제대로 갚은 사람은 거의 없다고 하는데요.

그리고 훗날

그의 재산을 가장 많이 이용한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당시 그는 독신주의자를 자신의 타고난 운명이라 생각해 결혼을 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이론적으로 무장하고 다닐 정도였는데, 한 여자를 만나는 순간 자신이 독신 주의자라는 것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말았다고 하죠.

 

 

이후 그는 과연 내가 결혼 생활을 잘 할 수 있을지 겁이 났지만, 그래도 서로 좋아하니까 결국 결혼을 했는데 딱 일주일 만에 ‘이 결혼은 잘못됐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다고 하는데요.

자신도 남편 될 준비가 채 안 된 사람이긴 했지만, 아내 역시 평범한 아내이자 주부로 살 사람이 아니라는 걸 그제서야 깨달았다고 합니다.

송창식은 슬하의 1남 2녀를 두고 있는데, 맏아들 송결 외에 두 딸은 모두 입양한 자식들이라고 하는데, 언론을 통해 공개한 가족사에 의하면 두 딸 모두 처형과 관계가 있다고 합니다.

결국 아내의 쌍둥이 언니 때문에 송창식 부부는 아이가 두 명이 생긴 것인데요.

그는 뛰어난 작곡가인 만큼 저작권 수입이 1년에 1억 원쯤 되는데, 저작권 협회에서 25%를 떼면 7천500만 원쯤 된다고 합니다.

그마저 25년째 별거하고 있는 부인이 사업한다고 써버리고, 자신은 공연 수입으로 먹고산다고 하는데요.

1976년 성대 결절 수술을 받은 그는 3년 전 또 한차례의 수술을 받았는데, 그 뒤 목소리가 갈라졌고 목소리를 잃었다고 고백해 사람들을 안타깝게 했죠.

 

한 시대를 풍미한

가객으로 한국 가요사에 굵은 획을 그은 천재 가수 송창식의 파란만장한 인생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시간을 거슬러 송창식은 인천 중구 답동, 정확히 송도중학교 옆에 붙어 있던 집에서 1947년 태어났는데, 땅이 많고 트럭도 몇 대 굴리며 운수업을 하던 부잣집이었죠.

한국전쟁은 그러나 많은 것을 바꾸어놓았는데요.

 

 

아버지는 6.25 전쟁 때 전사하셨는데, 어머니는 일곱 살 송창식과 네 살 여동생을 할아버지 집에 맡기고 집을 나가버렸습니다.

그는 할아버지와 삼촌 집을 전전하며 학창 생활을 보냈는데, 군경 유자녀 학비 보조금과 학교와 서울시에서 주는 장학금을 받았으나, 간신히 먹고 살 수 있는 수준이었다고 합니다.

인천 신흥초등학교와 인천 중학교를 졸업하고 서울 예술고등학교에 수석 입학했지만, 가정 형편상 중퇴했다고 하는데요.

홍익대 학교 학생으로도 알려져 있었지만, 실제 학력은 고등학교 졸업이죠.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실제로는 고등학교 1년 중퇴이며, 한국전쟁 참전 군경 유자녀를 퇴학시킬 수 없는 대한민국 법률상 규정으로 서류상으로만 졸업 처리된 것이라고 밝히기도 했는데요.

송창식은 과거 ‘세시봉’ 활동 중에 ‘가수 조영남에게 학력을 속였다며, 뺨을 맞기도 했다’라고 고백을 하기도 했습니다.

송창식은 여자한테 푹 빠지는 건 좋지 않다 생각했는데, 물론 사랑은 해봤다고 합니다.

하지만 사랑한다고 해서 완전히 자신을 투신하지는 않는 편이었는데, 집착을 하지 않는 기질이라고 했습니다.

당시에 그는 독신주의자를 천명하고 살았는데, 결혼을 안 해야 할 이유를 이론적으로 무장하고 다닐 정도였다고 하죠.

그런데 그녀를 만나는 순간 자신이 독신 주의자라는 것을 까맣게 잊었다고 합니다.

 

 

서울예고 동창이었고 졸업 후 따로 만난 적이 없는데 미국 공연 갔다가 그 사람의 쌍둥이 언니를 우연히 만났죠.

안부를 물었더니 동생이 인사동에서 골동품 갤러리를 한다고 해서 나중에 하나 사러 갔다가 만났는데, 처음엔 찌릿한 건 없었고 자신과 전혀 어울릴 상대도 아니라 생각했다고 하는데요.

사회적 지위와 품격이 달랐는데, 그 사람은 힘 있는 분들을 상대하는 상류 사회의 비즈니스 우먼이었고, 자신은 유명 가수이긴 하지만 하류사회 출신이었고 세련되지도 않았었다고 하죠.

 

이미지가 워낙 고급스러운

미모의 엘리트 여성이었는데, 어느 날 송창식에게 연말 파티에 갈 파트너를 소개해달라고 했죠.

앞만 생각해도 주변엔 그 사람에게 갖다 붙일 사람이 없어서 못 구했다고 하니, ‘너라도 같이 가자’라고 해서 송년 파티에 같이 가게 됐는데요.

그런데 새해가 밝는 첫날 0시에 남녀 키스타임이 있었는데, ‘다들 하니까 자신한테도 키스 하라’라고 그녀가 말했고, 당황했지만 하라니깐 해버렸다고 합니다.

그날 일 이후, 그의 나이 서른 살이었을 때 슬슬 연애가 시작됐죠.

부인 쪽에서 더 적극적이었는데, 그녀의 집에 가서 저녁까지 먹고 둘 사이에 벽이 점점 무너졌습니다.

상류층 여자와 하류층 남자인 그가 결혼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는데 분위기는 그렇게 몰려갔죠.

연애 시작 두 달 뒤, 그녀의 입에서 결혼 이야기가 나왔고, 과연 자신이 결혼 생활을 할 수 있을지 겁도 났지만 서로 좋아하니까 하기로 합니다.

하지만 둘의 결혼은 생각만큼 낭만적이지도 행복하지도 않았다고 하는데요.

 

그의 표현대로라면

결혼하고 딱 일주일 만에 ‘이 결혼은 잘못됐구나’라는 느낌이 들었고, 보통의 남편과 보통의 아내로 살기엔 특별한 구석이 많았다고 합니다.

자신도 남편 될 준비가 채 안 된 사람이긴 했지만, 아내도 평범한 아내이자 주부로 살 사람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고 하죠.

아내는 사회적 위치가 높은 상류층 여성이었고, 가정에서 남편의 아내 노릇을 할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송창식도 가수로서 존재 가치가 꽤 컸지만, 그것조차 아내에겐 별로 눈에 들어오는 가치가 아니었죠.

살수록 더 많은 불편함이 노출되자 둘은 합리적인 결정을 하기에 이릅니다.

서로의 생활을 존중하고 보장하기 위해 집을 따로 얻어 살기로 한 것인데, 별거한 지 벌써 25년 정도 되었다고 합니다.

송창식 부부는 슬하의 1남 2녀를 두고 있는데, 맏아들 송결 외에 두 딸은 모두 입양한 자식들이라고 하는데요.

언론을 통해 공개한 가족사에 의하면 두 딸 모두 처형과 관계가 있습니다.

송창식의 아내와 처형은 쌍둥이 자매로 둘 다 서울 예술고등학교 미술과에 재학하여 이들 셋은 모두 동기동창 관계였죠.

송창식도 약혼 전에는 처형과 친분이 더 있었다고 하는데, 처형 한성수는 일찍 미국으로 유학하여 회화와 미술관 행정을 전공했으며. 미국에서 ‘소냐한’이라는 이름으로 로스앤젤레스를 중심으로 행위 예술가로 활동했습니다.

첫째 딸의 경우는 난임인 처형이 아기를 갖고 싶어 한국에서 아이 입양을 추진했다가, 관련 법규가 바뀌면서 무산되게 되었는데 이 아이를 거둬 기른 것이라고 하죠.

송창식은 “아내가 쌍둥이인데 쌍둥이 언니가 미국에서 아이를 가지고 싶어 했다. 한국에 있는 아이를 입양하고 싶다고 해서 우리가 아이를 입양 보내려고 우리 집에 데려왔는데, 입양법이 바뀌어서 처형에게 못 보내게 됐다”라고 했는데요.

그는 “지정 입양을 못 하게 된 거다 그래서 미국에 입양을 못 보내게 돼서 아이를 못 보내면 우리가 입양하자고 해서 우리 딸을 입양하게 된 것”라고 설명했습니다.

 

둘째 딸의 경우

이후 처형이 인공 수정을 통해 임신 및 출산에 성공했으나, 당시 처형이 직접 양육할 사정이 못 되어 이 처조카를 입양한 것이라고 하는데요.

송창식은 “근데 미국에서는 엄마가 아이를 못 기르면 나라에 아이를 뺏긴다. 처형이 화가니까 못 기르는 상황이 됐고, 우리가 미국에 갔다가 처형의 자녀를 우리가 데려가자고 해서 데려왔다”라고 말했습니다.

결국 아내의 쌍둥이 언니 때문에 송창식은 아이가 두 명이 생긴 건데요.

송창식은 저작권 수입이 일 년에 일억 원쯤 되는데, 저작권 협회에서 25%를 떼면 7천5백만 원쯤 된다고 합니다.

그건 25년째 별거하는 부인이 사업한다고 썼고, 사실은 공연 수입으로 먹고산다고 하는데요.

70-80년대 한국 가요사에서 단 한 명의 천재를 꼽는다면, 작사 작곡은 ‘송창식’이라고 말할 사람들도 상당히 많은데, 은근히 서로 자존심이 센 ‘세시봉’ 멤버들조차 송창식의 천재성은 입을 모아 칭송할 정도였죠.

송창식은 과거 한국적 정서를 살린 음악과 개성 있는 가창력으로 인기를 모았는데, 주요 곡으로는 ‘고래 사냥’, ‘피리 부는 사나이’, ‘푸르른 날’ 등이 있습니다.

 

그는 윤형주와

함께 듀엣 트윈폴리오로 데뷔했다가, 윤형주가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면서 1970년에 솔로로 전향합니다.

금전 관리가 철저했고, 사업 수완이 있었던 윤형주는 많은 재산을 축적해 재산가가 된 반면에 사람이 너무 좋아서 보증도 서주고 돈도 꿔달라는 대로 꿔주던 송창식은 많은 재산을 잃었죠.

물론 송창식이 돈을 잘 벌던 시절에 알랑대며 돈을 꿔 간 사람들 중 제대로 갚은 사람은 거의 없다고 하는데요.

예전에 ‘세시봉’ 멤버들이 나와서 이야기할 때 송창식의 가난하던 시절을 회상하는 부분에서는 찢어지게 가난한 것을 넘어서 달랑 기타 하나를 들고 노숙하면서 지내고, 노래 불러주면서 밥을 얻어 먹고 이 집에서 며칠 저 집에서 며칠 나는 식으로 생활했을 정도로 매우 가난했다고 합니다.

이후 방황하다가 그는 어느 날 ‘AFKN’ 흑인 아마추어들의 블루스 경연 대회를 보고 크게 충격받았는데, 아마추어라고 비웃다가 자신보다 월등한 실력을 보고 ’20년간 음악을 해왔는데 아마추어만도 못한 실력이었다’라고 눈물을 흘리며 절망했다고 하는데요.

 

이후 그는 연습을

통해 자신의 실력을 더욱 갈고닦아 클래식 창법으로 대중가요계에 등장한 조영남을 만나면서 가수로 데뷔합니다.

이후 ‘세시봉’과 ‘오빈스 캐빈’에서 윤형주, 이장희, 김세환, 김민기, 양희은 등 당대 최고의 뮤지션들을 만났고, 특히 윤형주와 트윈 폴리오를 하면서 재능이 만개했죠.

송창식의 창법은 대충 부르는 듯하지만 절대로 따라 부르는 것이 쉽지 않다는 점이 특징이고, 마치 해탈한 도인이 너털웃음을 짓는 듯한 가창을 하는데, 다른 사람이 따라 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고 흉내만 내는 것도 쉽지 않을 정도인데요.

아닌 게 아니라 음악으로 득도한 천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1976년 성대 결절 수술을 받은 그는 3년 전 또 한차례의 수술을 받았는데, 그 뒤 목소리가 조금 달라졌다고 하는데요.

양쪽 성대에 다 메스를 댔으니 더는 수술을 받을 생각이 없다고 합니다.

이제 70이 훌쩍 넘은 송창식은 아직도 자신의 이름을 딴 라이브 카페에서 노래하는 모습을 볼 수 있으나, 이제는 노래하는 모습을 직접 볼 수 있는 날은 그리 많이 남아 있지 않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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