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예인’이란 말 그대로 연예계에 종사하는 사람으로 일반적으로는 영화, 드라마, 음악 등의 매체를 통해 그걸 접하는 사람들에게 희로애락을 일으킬 수 있는 사람들을 우리는 연예인이라고 하지요.
그런데
그중에서도 이 모든 걸 다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데 바로 조영남으로 그는 음악뿐만 아니라 작가, 화가, 방송인 등 그야말로 종합 예술인임이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현재는 여러 가지 구설수나 좋지 않은 사건들로 연예계 대표 트러블 메이커가 되었는데요.
오늘은 대한민국 대표 비호감 연예인 조영남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시간을 거슬러 1945년 해방둥이로 황해도 평산군에서 태어난 조영남은 11살 때 6.25 전쟁이 일어나 1.4 후퇴 때 피난 행렬에 섞여 38선 이남으로 탈출하는 데 성공을 하고, 충청남도 예산군으로 이주하게 됩니다.
한편 어릴 적부터 장난질이 둘째가라면 서러웠던 조영남은 그야말로 동네 최고의 장난꾸러기였는데, 예를 들면 가을이면 콩 볶아 먹고 친구들끼리 누가 더 방귀를 많이 끼나 내기를 하고, 또한 치약을 어렵게 구해서 최신 사탕이라 속이고 먹여 동네 아이들을 배탈이 나게 만들곤 했습니다.
그런데 훗날 그의 고백에 따르면 어린 시절 본인의 품성에 문제가 있다면 그건 100% 아버지의 탓이라고 했는데, 그러면서 본인의 아버지가 요즘 식으로 표현하자면 ‘소위 골 때리는 사람’이었다고 했습니다.

예를 들면 그의 아버지는 어린 조영남에게 9살 때부터 화투놀이를 가르쳤고, 그런데 당시만 하더라도 양반과 상놈을 은근히 찾아대는 분위기로 아버지와 아들이 마주 앉아 화투를 친다는 사실은 가히 파격적인 행위였습니다.
아버지의 골 때리는 행위는 여기서 끝나지 않고, 조영남과 동생에게 체계적으로 장난질하는 법을 직접 시범으로 보여주며 가르쳐 주었는데 그중 제일 재미있는 것이 몰래카메라였습니다.
당시 빨랫비누 대용으로 사용하던 양잿물을 시장에서 파는 것처럼 흡사하게 만들어 길목에다 뿌려놓고, 부자가 판자 울타리에 숨어서 지나가는 사람들이 그걸 보고 ‘이게 웬 떡이냐’ 슬쩍슬쩍 사방 눈치를 보며 집어가는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훔쳐보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랬던 아버지가 그가 초등학교 5학년 때 달걀 한 꾸러미를 훔쳐서 도망가던 사람을 장마당까지 쫓아가다가 실수로 쓰러졌는데, 정말 안타깝게도 그길로 반신불수가 되고 말았고, 그렇게 아버지가 쓰러지면서 조영남의 집에는 예전에 없던 가난이 태풍처럼 몰아치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아버지가
병석에 눕자 이때부터는 어머니가 갖은 고생을 하며 3남 2녀를 키우게 되는데, 그래서 당시 어머니가 가족들의 생계를 위해서 했던 일이 가짜 꿀 만들기로 사계절 내내 주걱을 휘 저으며 가짜 꿀을 만들어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지게 됩니다.
한편 당시 어머니는 교회 최고 원로 권사님이라 가짜 꿀을 만들 때도 입에서는 찬송가와 기도가 흘러나왔고, 그런데 권사님의 신분으로 이런 비양심적인 일을 한다는 게 어린 조영남의 시선에서는 이해가 되지 않아 훗날 어머니께 ‘그때는 어떻게 그런 일을 했냐?’라고 물어보니, ‘그렇게 안 하면 방세도 못 내는데 어떡하니’라고 했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아버지가 쓰러지고 몇 년 후, 당시 조영남 그는 안방으로 건너가는 게 너무 싫었는데, 그 이유로는 병들어 누워 있는 아버지의 모습이 싫어서가 아니라 어린 마음에도 소변 썩는 냄새가 너무 지독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중풍으로 쓰러진 아버지로 인해 조영남의 집은 1년 내내 소변 냄새로 찌들어갔고, 심지어 소변 받는 깡통을 자주 새것으로 갈아대지 못해 깡통 안팎에 온통 초록색 이끼 같은 게 끼었고, 그래서 거기서 풍겨 나오는 냄새가 사람을 질식시키기에 충분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의
아버지는 왼쪽이 완전히 마비된 상태에 신체 불구자였는데도 정신만은 보통 사람과 다를 바 없이 멀쩡했고, 그래서 말도 큰 불편 없이 구사할 수 있어서 언어에는 아무런 장애가 없었습니다.
그렇다 보니 어린 아들에게 ‘영남아, 아빠가 이렇게 누워 있다고 너까지 기죽으면 안 된다. 꿋꿋하게 잘 살아라’ 정도의 당부 같은 걸 해줄 법도 한데 하지만 단 한 번도 이런 당부의 말이나 구질구질한 말은 아예 입에 담지도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에 비해 그 자식이라고 조영남 역시 당시 고등학교를 서울에서 보내던 그가 방학 때 잠시 내려오면 아버지가 반가울 만도 한데, 서울 생활이 어떻고 누구 집에 얹혀사는 게 어쩌고저쩌고 하는 얘기들을 일절 꺼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앞서 얘기한 대로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던 그가 방학이 돼서 아버지 앞에 나타나면 아버지는 금방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고, 그래서 훗날 생각해 보니 아버지가 아무런 말씀도 없이 얼굴 빛깔만 빨갛게 달아올랐다는 건 당시 반신불수인 아버지의 유일한 기쁨이 서울에서 내려오는 넷째 아들 얼굴을 보는 것이었다는 뚜렷한 증거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그의 아버지는 10년을 넘게 누워 계시다가 아무것도 남긴 것 없이 오로지 성경 한 권과 오줌 깡통 하나만 달랑 남겨놓고, 어느 겨울날 조용히 눈을 감으셨다고 했습니다.

한편 어릴 적부터
노래를 잘했던 그는 고등학교 때 전국 고등학교 음악 콩쿠르에서 1등을 해 한양대 음대 특차 입학생이 되었고, 하지만 이내 한양대를 자퇴하게 되는데 자퇴의 이유가 아주 기가 막힙니다.
그가 한양대 2학년 때 음대 신입생 여자 중 한 명이 그야말로 너무 너무 예뻤고, 그래서 그 여자가 입학한 후로 조영남의 온 정신은 ‘어떻게 하면 저 아이와 이야기할 수 있을까’였습니다.
이후 매일같이 그 여자를 의식하며 몰래 지켜봐 왔고 그런데 놀랍게도 그 여자가 ‘조영남의 노래 부르는 모습이 멋지다’라며 먼저 다가왔고, 그래서 이때부터 두 사람의 꿈같은 데이트가 시작되었는데, 하지만 알고 보니 그 여자는 당시 약혼자가 있었습니다.
아무튼 학교에서는 두 사람이 데이트를 한다는 소문이 쫙 나면서 결국 이게 약혼자의 귀에까지 들어가 실제로 조영남과 담판을 내겠다며 약혼자가 학교로 찾아왔고, 하지만 조영남은 결정적인 순간에 차분해지는 타고난 재능이 있어서 ‘덤빌 테면 덤벼’라는 식으로 무서울 게 없었습니다.
그렇게 약속 장소인 공터로 갔더니 저 멀리서 약혼자가 보였고, 어차피 무서울 게 없었던 조영남은 주먹을 단단히 움켜쥐고 다가갔고 그런데 그 순간 조영남의 다리가 상하로 움직이기 시작하더니 양팔로 아무리 눌러도 다리의 떨림이 멈추질 않았습니다.
아무튼 떨리는
다리를 붙잡고 약혼자 앞에 겨우 앉았는데, 그런데 이때부터 조영남의 다리가 ‘타타타’ 구두 뒤축 바닥을 치는 소리가 김국환의 ‘타타타’는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엄청 심해졌고, 이처럼 오자마자 벌벌 떠는 조영남의 모습을 본 약혼자는 측은했는지 아무런 말도 없이 돌아서고 말았습니다.
결국 이 사건 이후 한양대 교무처장이 조영남을 불러 ‘음대 특차 입학생이자 전액 장학생이 남의 가정을 파괴하면 어쩌냐’라며 ‘당장 연애를 그만두고 잘못을 빌어라’라고 했고, 하지만 젊은 조영남은 학교와 사랑 중에 겁도 없이 사랑을 택하며 학교를 그만두게 됩니다.
그렇게 학교에서 잘린 조영남은 이후 공부를 더 열심히 해서 1964년 서울대학교 성악과에 입학하게 되었고, 그리고 서울대 음대에 들어가 보니 돈 많은 부잣집 딸들과 예쁜 여자들이 너무 많아 놀랍게도 사랑했던 한양대 그 여자를 서울대 성악과 선배에게 소개시켜주게 됩니다.
결국 그 여자는 선배와 결혼까지 하며 미국으로 이민해 갔고, 참고로 훗날 우연한 자리에서 한양대 그 여자의 친동생으로부터 소식을 들었는데, 언니는 선배와 이혼하고 외국인과 재혼해서 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고 했습니다.
아무튼 다시 돌아와 그 후 조영남의 삶은 알려진 대로 등록금 마련을 위해 명동 쎄시봉에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고, 그리고 그곳에서 평생의 친구들과 첫 결혼 상대자가 된 배우 윤여정도 만나게 됩니다.
그렇게 조영남은 당대 엘리트들과 어울리며 아쉬울 것 없는 청춘을 보내고 있었고, 그러다 어찌어찌 해 번안곡 ‘딜라일라’를 발표했는데 이게 완전히 떠버리면서 대학생 신분으로 외제차에 운전사까지 둘 정도로 엄청나게 잘 나가다가, 어느 날 거짓말처럼 하루아침에 범죄자 신세가 되게 됩니다.
당시 조영남
그는 군대 갈 나이가 되자 너무 가기 싫었는지, 아무런 이유도 없이 3년째 군 입대를 연기해 놓고 있었고, 그런 와중 시민회관에서 김시스터지 귀국 공연에 초대 가수 겸 mc를 맡게 됩니다.
아무튼 이날 공연에서 자신의 차례가 되자 요란한 박수를 받으며 ‘신고산 타령’이라는 노래를 부르기 위해 통기타를 들고 무대로 나가는데, 그런데 그 순간 몇 주 전 tv에서 본 ‘와우 아파트’ 붕괴 모습이 떠오르게 됩니다.
그렇게 노래의 반주가 시작되고, 원래라면 ‘함흥차 떠나는 소리에’라는 가사를 불러야 하는데, 그런데 앞서 얘기한 대로 아파트 붕괴 모습이 떠올라 ‘와우 아파트 무너지는 소리에 얼떨결에 깔린 사람들이 아우성을 치는구나’로 고쳐 부르고 말았습니다.
사실 조영남 그는 그저 재미있게 불러 박수 한번 받아보자고 한 노래였는데, 그런데 당시 시국이 서울시가 야심 차게 지은 아파트가 무너져 나라가 온통 비상사태이다 보니 겨우 가수 나부랭이가 무대에 올라와 아파트 붕괴를 콧방귀 끼듯 비웃으며 그걸 노래라고 부르고 있으니, 사태는 그가 생각한 것과 달리 매우 심각하게 돌아가게 됩니다.
결국 방송국 행사 담당자와 조영남의 매니저가 얼굴빛이 누렇게 뜬 채 ‘야 영남아. 무조건 도망가. 어서 자리를 피해’라고 했고, 하지만 서울시청은 이날 이후 ‘조영남을 당장 잡아서 조사하라’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조영남은
이대로 끝나나 했는데, 그런데 천만다행으로 당시 평소 친하게 지내던 이태영 변호사가 그를 변호하면서 겨우 살 수 있었는데, 당시 이태영 변호사가 변호하길 “얘가 와우 아파트 노래를 부른 건 정치적으로 다른 생각이 있어서 그런 게 아니다. 얘는 평소 아무 생각이 없는 놈이다. 그냥 재미있게 해보려다 실수한 거니 한 번만 봐달라”라며 그의 뒤를 봐준 덕분에 조영남은 군 입대하는 것으로 겨우 사태가 수습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이태영 변호사의 로비에 힘입어 겨우 철창행을 면하고 군으로 들어간 조영남은 군에서도 군 행사 단골 가수로 활동하게 되는데, 그리고 시도 때도 없이 높은 분들 앞에서 노래를 불러야 했기 때문에 상관이나 고참들도 그를 어쩌지 못하는 편한 군 생활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다 하루는 무슨 행사인지 모르겠으나 육군본부 참모장이 그를 불러 ‘유난히 심혈을 기울여 노래를 하라’라고 했고, 하지만 그는 속으로 ‘그러던가 말던가 여느 때처럼 별들 앞에서 노래를 하겠지’ 하고 갔더니, 놀랍게도 별 수십 명과 더불어 고 박정희 전 대통령이 무대를 주시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박정희 전 대통령을 보고 당황한 그는 재빨리 머리를 돌려 ‘이 황공무지한 영광에 어찌 보답을 할까’ 생각 끝에 민족의 역사와 애환이 담겨 있는 ‘각설이 타령’이 최고라고 생각해 원래 부르려고 했던 노래를 포기하고 선곡에도 없던 ‘각설이 타령’을 부르게 됩니다.
그러면서
이번에도 또 가사를 개사하게 되는데 “와우 아파트 타령 한 번 잘못 불러서 여기 군대까지 끌려왔네~ 작년에 왔던 각설이가 죽지도 않고 또 왔네~”라고 노래를 부르자, 이를 지켜본 육본 참모장이 무대로 올라와 조영남의 귀에 대고 “살고 싶으면 당장 그만두고, 박 대통령의 애창곡 ‘황성옛터’나 부르라”라고 지시했습니다.
그제서야 사태의 심각성을 알아챈 조영남은 ‘각설이 타령’을 뚝 그치고 ‘황성 옛터’를 시작하려고 하는데, 그런데 하필 이때 갑자기 가사가 생각이 나지 않아 앞부분인 ‘황상 옛터의 밤이 되니만’ 세 번 연거푸 부르다가 결국 퇴장당하면서 눈앞이 캄캄해지고 말았습니다.
다음 날 육본 법무감실로 이송된 조영남은 세 가지 혐의점에 대한 심문을 받게 되는데, 첫 번째 ‘왜 대통령의 애창곡인 황성옛터를 세 번이나 거부했나’, 두 번째 ‘시키지도 않은 각설이 타령은 왜 불렀나’, 세 번째 ‘작년에 왔던 각설이는 누구를 말하는가’였습니다.
결국 조영남은 아무 말도 못 하고 있는데 이번에도 천만다행으로 법무관실에 근무하던 서울대 동문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하길 “저 친구는 정치색이 없다. 그저 똥 된장도 못 가리는 한심한 성격일 뿐이다”라는 말로 그를 적극 변호하는 덕분에 겨우 풀려나면서 이후 조영남은 제법 생각이 깊은 가수라는 이미지가 생겨나게 됩니다.
후의 조영남 이야기는 다음 시간에 다루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