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진희는 지금으로부터 73년 전 우리나라의 6.25전쟁이 일어나기도 전인 1949년에 태어났습니다.
한진희는 너무 멋있게
잘 생겼던 미남 배우로 한 시절을 풍미했던 그도 어느덧 70대의 노인이 되어 원로급의 배우가 되면서, 건강에 문제가 생기게 될 정도로 시간이 그렇게나 많이 흘러가 버렸는데요.
그동안 워낙 관리를 잘해와서 실제 나이에 비해 젊어 보이기도 했지만, 사실 최근 그가 나왔던 방송들을 보면 그가 백발이 된 모습에 ‘이제 그도 더 이상 나이를 속일 수 없는 천상 백발 노인이 되어버렸구나’라는 서글픈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시청자 여러분도 한진희가 젊었을 당시를 한 번 생각해 보세요.
훤칠한 키에 서구적인 마스크로 전국의 여심을 흔들리게 했던 너무나 멋진 배우였는데, 이제는 그의 안타까운 소식이 전해지면서 많은 시청자들의 가슴을 아프게 하고 있습니다.
생각해 보면 한진희는 그동안 근엄하고 멋있거나, 아니면 조금 무서운 역할들을 주로 맡았었는데요.
시아버지 역할을 자주 해서 ‘국민 시아버지’ 또는 회장님 역할도 많이 해서 ‘재벌 회장님’으로, 매년 다양한 작품을 통하여 대중들에게 익숙했던 그였습니다.
사실 그는 비록 중간에 중퇴했지만, 연세대학교 철학과를 나온 실제로도 명문대를 다녔던 엘리트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처음 데뷔한 건 1969년, tbc 9기 공채 탤런트에 선발되었는데요.
1970~80년대 선배 노주현과 함께 안방극장 미남 주인공 역을 독점하다시피 했던 그였지만, 사실 그도 데뷔 초부터 바로 주인공으로 잘나가기만 했던 것은 아닙니다.
멋지고 잘생긴 그에게도 데뷔 초의 가슴 아픈 시절이 있었는데요.
여러분은 한진희의 키가 몇인지 아시나요?
동년배의 다른 배우들에 비해 키가 크다는 건 다들 알고 있지만, 그의 키가 정확히 몇 센티인지는 정확히 아는 사람이 많이 없는데요.
한진희의 키는 무려 178cm입니다.
물론 요즘 젊은이들과 비교하면 178의 키는 보통의 키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한진희는 요새 젊은 세대가 아닌 1940년대 사람입니다.
해방되고 우리나라가 한창 힘들 때 태어나서 6.25를 겪은 세대 사람이 키가 178이란 건 지금으로 치면 188 정도라고 생각해도 될 정도로 동시대 사람들에 비해 아주 큰 장신을 자랑하는데요.
그렇게
큰 키 때문에 많은 여성들로부터 눈길을 끌 만도 했지만, 그의 직업인 배우라는 측면에서 보면 그 큰 키는 사실 그에게 배우 활동에 많은 제약을 가져다준 걸림돌과도 같은 존재였습니다.
‘도대체 키가 큰 게 뭐가 문제냐’라고 하실 수도 있지만, 당시의 178은 상당히 큰 키라서 상대 여배우와 함께 연기를 할 때마다 카메라에 함께 잡히지가 않았고, 다른 배우들과 함께 있을 때 혼자만 너무 튀면서 어울리지 않다 보니, 데뷔 초반만 해도 그에게는 드라마 주인공의 역할이 잘 안 들어왔고, 단역만 맡아서 연기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무엇보다 당시 드라마는 주로 스튜디오 촬영을 했고 세트가 실제 집보다 작고 낮게 지어졌는데, 그 키로는 문지방에 머리가 닿거나 담장 위로 머리가 쑥 올라오는 불상사가 자주 일어났었는데요.
덕분에 tv에서는 이낙훈, 이순재, 송재호 등 지금 기준으로 단신 배우들이 활약을 많이 했고, 겨우 영화 촬영에서야 세트가 아닌 실제 집과 야외에서 찍었기에 키 제한이 없어서 남궁원 같은 장신 배우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데뷔 초 5년간 단역만 맡아서 연기할 수밖에 없었던 한진희.
그는 당시
동갑내기임에도 불구하고 2살 연상의 TBC 스타 김수옥과 교제를 시작했고, 1974년 결혼하면서 두 사람의 사랑은 꽃피웠다.
그 사이 김수옥은 한진희가 주연을 맡지 못하자 동료로서 위로했고, 금세 친해지며 결혼식을 올리게 됐다.
한진희는 1974년 11월 김수옥과 결혼했다.
그녀를 만난 후 한진희의 삶은 뒤바뀌기 시작한다.
결혼식을 마치고 드디어 한진희의 전성기가 시작됐다.
이때부터 그의 훤칠한 키와 잘생긴 외모가 눈길을 끌기 시작했고, 덕분에 그는 TBC 대표 청춘스타 순위에 올랐다.
1976년 드라마 ‘결혼행진곡’을 통해 알려지기 시작해 귀족의 이미지를 지닌 노주현과 함께 대표적인 꽃미남 배우로 자리매김했다. 그는 대한민국 대표 미남으로 불리며 극중 남자주인공을 독점했다.
1975년, 1976년 두 차례 연속 TBC 연기대상을 수상했고, 주말극 ‘애정의 조건’으로 제13회 백상예술대상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주연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최우수상을 받으며 해냈다.
당시 공전의 히트를 친 그 드라마에서 대사 ‘죽겠네’를 유행시키기도 했는데요.
당시 70년대 후반까지 언론 통폐합 이전에는 tv 드라마는 tbc가 kbs, mbc에 비해서 압도적이었는데, 그 tbc의 간판 남자 주인공 투톱이 한진희, 노주현이었고, kbs는 이영하, mbc는 이정길과 박근형이 투톱이었던 시대였습니다.
당시 드라마와 쇼, 프로에서는 워낙 tbc의 위상이 높았기 때문에, 아직까지도 대중들에게 70년대 최고 스타는 노주현, 한진희라는 공식이 통용되고 있는 것인데요.
노주현과 한진희가 함께 1980년대 초에 양복 모델을 한 적도 있습니다.
그리고 77년에 부인 김수옥과 부부로 드라마에 출연한 적도 있습니다.
이렇게 한진희가 큰 인기를 끌게 되는 동안, 한진희의 아내 김수옥은 임신 출산을 계기로 방송가에서 점점 멀어졌고, 연예계를 은퇴하고 내조에 집중해 한진희를 뒷받침하게 되는데요.
그 후 한진희는 딸 두 명을 낳게 됩니다.
한진희는 중년이 된 이후에도 왕성하게 드라마에 출연했지만, 맞는 배역마다 아픔이 있는 신사 역할을 주로 맡게 되는데요.
예를 들면 극 중간에 출생의 비밀 폭로나 부하의 배신 또는 사업 실패로 인해 충격을 받아서 병원에 실려간다든지 또는 훤칠한 중년의 회장 역을 자주 맡으면서 극중 아내가 한 명이 아닌 본처와 첩을 둔 역할도 많이 맡았었고, 드라마 ‘금 나와라 뚝딱’에서는 무려 3명의 부인을 거느리는 회장 역을 맡기도 했습니다.
게다가
혼외정사로 밖에서 애 낳아서 들여오는 아버지 역도 자주 맡았는데요.
한진희의 이러한 이미지와는 달리 사실 그는 자기 관리에 철저했습니다.
큰 스캔들도 한 번 없었고, 그동안 70대 나이에 비해 외모도 젊어 보였는데요.
하지만 그에게 너무나 가슴 아픈 사고가 결국 일어나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그가 sbs 드라마 ‘두 여자의 방’을 밤샘 촬영하던 어느 날 새벽, 그의 두 딸 중 한 명의 아들, 즉 그의 손자가 그만 세상을 떠나버리고 만 것입니다.
그의 손자는 백혈병으로 투병하다 끝내 7살에 유명을 달리하게 된 것인데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진희는 드라마에 피해를 주면 안 된다는 생각에 촬영이 끝날 때까지 묵묵히 내색하지 않고 촬영이 끝나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러다
밤샘 촬영 중 여러 가지 문제로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던 한진희는 뒤늦게 제작진에게 양해를 구하고 병원을 찾았다.
당시 SBS 드라마는 물론 MBC 드라마에도 출연 중이던 한진희는 병원에 머물며 예정대로 MBC 촬영장으로 돌아갔고, 촬영이 끝난 뒤에야 손자네 집에 돌아왔다. 장례식.
당시 극장 관계자에 따르면 “한진희 씨가 현장에서 전혀 모습을 보여주지 않아 손을 다친 사실도 몰랐다. 평소처럼 조용히 자신의 모습을 촬영했고, 맡은 역할을 완벽하게 수행했기 때문에 우리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고 말했다.
또한, 나중에 사실을 알게 된 방송국과 제작진은 조화를 보내려 했으나, 한진희는 병원에 대한 사실조차 알리지 않았다고 한다.
갑작스러운 손자의 죽음으로 인한 극심한 슬픔 속에서도 그는 가슴 아픈 일을 억누르고, 주변 스태프와 동료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완전한 프로페셔널함으로 직무를 수행했다.
한진희씨는 너무나 가슴 아픈 사연을 갖고 있었습니다.
프로페셔널한 정신으로 일하는 그녀의 앞으로도 좋은 행보를 기대하며, 배우 한진희에게 따뜻한 응원을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