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간 얼마나 고생을 하셨으면…” 배우 변희봉의 췌장암 발견 그리고 현재 알려진 그의 눈물 소식을 확인해보실 수 있어요..

꽃은 빠르게 피는 것과 천천히 피는 것이 있습니다.

오히려

천천히 피어나는 꽃일수록 생명력이 긴 경우가 대부분인데요.

꽃들은 앞다퉈 한 번에 피지 않으며, 그렇다고 늦게 핀다고 해서 이쁘지 않은 꽃도 없습니다.

인생 또한 마찬가지이지 않을까 싶은데요.

아직 아무것도 모를 때 모두 다 피어버린 꽃보다, 바람도 맞고 햇살도 맞으며 천천히 열리는 꽃이 저는 더 좋은 것 같습니다.

오늘의 주인공 배우 변희봉 역시 사람은 누구나 때가 있고 어느 정도 기다림을 감수해야 한다고 하지만, 유독 그에게 기다림이 길어 한때는 모든 걸 보게 하고 더하면 추접스러워 그만하겠다고 했지만, 그럼에도 70이 넘은 나이에 레드 카펫을 밟으며 자신의 인생을 두고 ‘고목나무에 꽃이 피었다’라고 고백한 변희봉.

그의 파란만장한 인생에 대해 말해 보고자 합니다.

1942년 변희봉의 어머니는 6년이나 절에 가서 공을 들인 뒤에야 막내아들 변희봉을 낳았고, 또한 조부와 부친이 고향에서 면장을 지내며 마을의 큰일은 모두 그의 집에서 결정될 정도로 좋은 집안에서 나고 자라게 됩니다.

 

 

성인이 된 후로는 친척의 소개로 한 제약회사에 다니며 숙직실에서 생활을 하게 되었고, 그러다 하루는 숙직실에서 누워서 라디오 연속극을 듣는데 너무나도 매력적이고 상상력이 생겨 ‘나도 이런 걸 한번 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어 그날부로 그쪽 길을 알아보게 됩니다.

 

그러다

성우 학원이 있다는 걸 알고 높은 꿈을 안으며 성우의 문을 두드렸고, 하지만 현실은 좀 달랐던 게 전라도 출신인 그를 가르치는 선생님마다 ‘너는 사투리가 심해서 성우가 될 수 없다’라고 하며 포기할 것을 권유하게 됩니다.

그럼에도 성우가 너무 하고 싶었던 그는 사투리를 고치기 위해 당시 전라도 사람은 일체 만나지 않고, 하루 종일 표준어 방송만 듣고, 책을 읽어도 표준어를 생각하며 읽는 등 처절한 노력을 했고, 그 덕분인지 1965년 MBC 공채 성우 2기로 합격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그의 집안에서는 어렵게 얻은 막내아들이 당시만 하더라도 ‘딴따라’라 불리며 천시 받던 방송국 일을 한다고 하자 난리도 아니었으며, 심지어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 유언으로 ‘서울 가지 마’라고 할 정도로 하여간 변희봉 때문에 사방팔방이 시끄러웠습니다.

 

이와

관련해 그가 고백하길 “지난 세월 후회하는 건 없는데, 아버지 생각만 하면 좀 아쉽다. 내가 제약회사 다닐 때는 아버지가 좋으셨는지 서울까지 한번 와 주시기도 했다.

오셔서는 돈도 좀 주시고 그런데 나는 부친이 고향에 내려가실 때 차표도 못 사드렸다. 외상값이 너무 많아서 아버님이 주신 돈으로 외상값 다 갚고 나니까 가진 돈이 하나도 없더라. 한마디로 철이 없었다.

가끔 아버지가 꿈에 나타나셔서 용돈을 드려야 하는데, 좀 드리고 싶은데, 그러다 꿈이 깬다. 그럴 때는 지독스럽게 길게 좀 아버지 꿈을 꾸어 봤으면 그런 마음이 간절하다. 그래서 만약 그때로 돌아갈 수 있다면 솔직히 지금 생각으로는 배우를 못 할 것 같다. 그냥 아버님의 뜻을 따를 것 같다. 그리고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6살 많은 형님이랑 상가에 앉아 있는데, 형님 친구들이 와서 이러더라. ‘아니 왜 변희봉 씨가 여기 있냐’라고. 그니까 형님도 어디 가서 내가 동생이라고 말을 안 하고 살았던 거다. 나를 부끄럽게 생각했으니까”라고 했습니다.

 

아무튼

다시 돌아와 당시 집안의 극심한 반대에도 멀쩡한 회사를 때려치우고 성우로 시작한 그는 그런데 당시 성우 월급이 너무 작아 형편이랄 것도 없이 굉장히 궁핍한 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래도 고향에서는 나는 밥은 먹고사는 집의 자식이었는데, 괜히 성우 한답시고 어느 순간부터는 하숙비조차 없어 쫓겨나게 일쑤였고, 그래서 결국 그런 괴로움으로 밤마다 외상으로 술만 마셔대기 시작했습니다.

심지어 이때 그는 날이 갈수록 술 외상 값이 불어나 나중에는 고향에 내려가고 싶어도 외상값 때문에 내려갈 수도 없을 정도였고, 그래서 이때 생각한 게 ‘이왕 이렇게 된 거 돈이나 땅을 많이 가진 부잣집 딸이 자신한테 시집이나 왔으면 좋겠다’ 했는데, 그러던 찰나 지금의 아내와 중매를 보고 두 사람은 결혼까지 하게 됩니다.

당시 장인이 엽연초 공무원으로 지금으로 말하면 담배 공사에 있었고, 그래서 솔직히 어느 정도 기대를 하며 딸이 서울까지 시집을 오는데 꽤나 많은 돈을 줘서 보낼 거라 생각했지만, 그런데 결혼식 하루 전날까지 아무런 예기가 없자 이건 아니다 싶어 결국 그날도 술을 진탕 마셔버리고 ‘나 결혼 안 해, 나 장가 안 간다’라고 하며 인사불성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와

관련해 그가 고백하길 “이때 내가 돈이 하도 없으니까 돈을 좀 갖고 땅이라도 좀 갖고 오는 사람한테 장가가고 싶은 그런 마음이 컸다. 그러다 내 형님이 지금의 아내를 소개해 줬고, 그래서 내심 장가를 가면 얼마라도 주겠지 그런 기대를 했는데, 하지만 부인을 만나보니까 그게 아닌 거다. 나한테 뭘 해준다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어찌 됐든 광주에서 결혼식을 올린 후 빵이라도 사서 여기저기 인사를 가야 해서 마누라 되는 사람한테 ‘너 지금 혹시 돈 얼마 있냐’라고 물었더니, 겨우 1만 7000원을 내놓자 그제서야 돈이 하나도 없다는 걸 알고 나가 자빠지고 말았고, 그래서 이후 정말 기고하게 살았다”라고 했습니다.

아무튼 그렇게 유부남이 된 그는 라디오 성우를 좀 하다가 TV로 옮겨왔으나 첫 역할부터 노역을 해야 했고, 그리고 이후부터 수사반장에서 잡범, 도둑놈, 간첩, 도굴꾼, 교주 등 어쨌든 높은 놈은 아니고 바닥만 하다 보니 당시 가정적으로 상당한 어려움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어느 날 6학년 다니는 큰아이가 친구들이 놀렸는지 “아빠, 그런 거 안 하면 우리는 못 먹고 살아?”라며 울면서 들어오기도 했고, 그리고 애들 생활기록부의 아버지 직업을 쓸 때도 항상 ‘방송국’이라고 썼는데, 그런데 구체적으로 쓰라고 하면 ‘제작부’라고 써서 보내곤 했습니다.

결국 이러한 일들이 본인에게도 불만이었는지 한 번은 방송국 부장한테 자신이 악역만 하는 것에 대한 항의를 했다가 입에 담지도 못할 욕만 듣고 말았고, 아무튼 그때만 하더라도 잘나가는 배우 몇 명 빼고는 대부분의 배우들이 돈을 제대로 벌 수 없었고, 그리고 돈도 돈이지만 얼마나 괄시를 받고 살았던지 그때의 서러움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그래도 하늘은 그를 버리지 않았던 게 역할이 점점 좋아져 이완용의 인력거꾼 역할을 하다가 이완용 역할을 하고, 흥선대원군의 머슴 연기를 하다가 흥선대원군 역할까지 하며, 마침내 누구한테든 자신이 하는 일을 당당히 얘기할 수 있는 수준이 되게 됩니다.

 

그러다

1980년대에는 ‘조선왕조 500년’에서 ‘유자광’이라는 역할을 맡아 ‘이 손에 있소이다’라는 대사를 유행시키며, 감기약 광고까지 찍을 정도로 큰 인기를 누르며 이때부터 살림이 피어 당시 갈현동에 마음에 드는 집도 장만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다른 배우들처럼 많은 돈은 벌진 못했는데, 그 이후로는 밤업소 일을 하지 않았기 때문으로 당시 나이트클럽 같은 데서 노래 한 곡씩만 불러도 한 달이면 집 한 채를 살 수 있다고 주위 사람들이 그렇게 꼬셨지만, 그는 업소 출연을 절대 하지 않았습니다.

훗날 그의 고백에 따르면 “당시 밤무대 쪽에 서지 않았던 이유로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연기자의 길을 선택했는데, 눈앞의 거액보다는 명예를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라고 했으며 “또한 그때 잘나가던 동료 배우가 업소 출연을 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술을 많이 마시더니, 아침 촬영에 취한 채 술병까지 갖고 온 걸 보고 정이 뚝 떨어졌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때 그가 하도 거절을 하다 보니 나중에는 신변의 위협을 느끼기도 했는데, 왜냐하면 그때는 업소가 주먹이랑 연결이 돼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한 번은 미국에서 동포 상대로 위문 공연을 한다며 이선희, 심형래 등 잘나가는 연예인들이 위문 공연을 가야 하는 일정이 생겼고, 그리고 그도 당시 ‘유자광’ 캐릭터로 큰 인기를 끌었기 때문에 이 멤버에 속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는 앞서 얘기한 대로 배우가 연기 외에 다른 걸 한다는 걸 누구보다 싫어했기 때문에 미국 공연을 가는 걸 굉장히 꺼려 했고, 그래서 당시 조건을 걸었던 게 ‘공연을 하더라도 술집에서만큼은 절대 하지 않겠다’라는 조건을 걸고 미국으로 건너가게 됩니다.

하지만, 미국에서의 마지막 공연 장소가 그가 우려했던 워싱턴 술집으로, 심지어 공연 벽보를 봤더니 ‘유자광. 미국 땡땡 클럽에 오다’라는 벽보까지 붙어있자, 결국 그는 마지막 공연은 하지 않고 혼자 한국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런데 이런 그의 고집 때문인지 이후부터 점차 일이 없어지더니, 1996년 그는 무려 1년을 쉬면서 아무 일도 못 하게 되자, 결국 또다시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그리고 이때 할 일 이 너무 없다 보니 산에 다니기 시작했는데, 새벽에 눈 뜨면 주섬주섬 옷을 입고 뒷산에 올라가 경사진 곳을 단숨에 오르고 숨이 차기 시작하면 그나마 괴로운 것들을 잠시나마 잊어버릴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때는 아침 먹고 산에 가고, 점심 먹고 또 가다 보니 그것을 달력에 표시를 해봤고, 그러다 어느 날은 친구들이 놀러 와서 달력을 보더니, ‘야 이 자식 일이 이렇게 많구만. 매일 표시를 해놨네’라고 하자, 자신의 상황을 실토하기도 했습니다.

 

이와 관련해

그가 고백하길 “당시 일이 하나도 없다 보니 정말 고통스러웠다. 첫째로 집에 미안해서 못 있겠더라. 사실 어느 정도 절약하면 살 수 있지만 1년을 놀아버리니까 결국 빚이 점점 커지더라. 그 무렵 내가 산에 오르기 시작했는데, 아침에 올라갔다가 열한 시 반에 내려와서 목욕탕에 들른 다음에 소주 한 병을 큰 잔에 부어서 한 병을 그냥 다 마시는 거다. 그러고 또 바로 자고 그걸 한 1년 가까이하고 나니까 결국 내 다리가 지금처럼 이렇게 되고 말았다”라고 했습니다.

설상가상 이 무렵 IMF까지 닥치면서 당시 방송사들이 ‘나이 많은 배우부터 출연료를 덜 받는 솔선수범을 보여야 한다’라며 하루는 그에게도 출연료를 깎자는 전화가 오게 됩니다.

하지만, 원래부터 출연료를 많이 받는 편이 아니었던 그는 ‘당신이 언제 내 사례를 준 적이 있냐. 왜 당신이 그런 얘기를 꺼내냐. 나를 부자 되게 해준 일도 없고, 편하게 밥 먹게 해 준 일도 없고, 관계도 없는 사람이 무슨 소리냐”라고 쏘아붙이고는 전화를 끊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아내에게 전화를 걸어 “살을 깎아가면서 이거 하면 사람 꼬라지가 뭐가 되겠나. 더 하면 추잡스럽고 애들도 다 컸으니까 그만하겠다”라고 말한 뒤 서울 생활을 모두 정리하고 고향으로 내려가기로 결심하게 됩니다.

이와 관련해 그가 고백하길 “우리 시절에는 배우를 ‘딴따라’라고 했다. 업신여김을 당했고 정말 그런 일들이 더러더러 있었다. 그리고 나는 시골 사람이기 때문에 특히나 나의 가족, 돌아가신 아버지께서 내가 배우를 한다고 했을 때 정말 싫어하셨다. 그렇게 하지 말라는 그 간곡한 말씀을 거역하면서 맹세한 것은 소리 없는 조용한 배우가 되는 것이었고 그리고 그렇게 사는 것이 내가 부모한테 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이라고 생각했으며, 하지만 그 때문인지 자존심이 강하네 어쩌네 하는 나쁜 소리도 들었다고 본다”라고 했습니다.

 

아무튼

안 좋은 기억만 갖고 연기 인생을 접으려고 할 때, 어느 날 한 젊은 감독으로부터 한 통에 전화가 걸려오게 되는데, 전화 속 감독은 자신이 ‘봉준호’라고 하면서 자신의 데뷔작 ‘플란다스의 개’라는 영화에 그를 모시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앞서 얘기한 대로 그는 방송계를 떠나, 아니 서울 자체를 떠나려고 했기 때문에 봉준호 감독이 출연 제의를 했을 때 두말 않고 거절을 했고, 심지어 당시 뭐라고 했냐면 ‘주인공이 아니면 사람으로도 보지 않는 당신들과 일하고 싶지 않다’라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봉준호 감독은 ‘한 번만 해봤으면 좋겠다’라며 끈질기게 부탁을 했고, 결국 그 성화를 못 이겨 마포구의 한 호텔에서 만났는데, 그런데 봉준호 감독이 그가 과거에 출연했던 작품을 줄줄이 깨고 있고, 그러면서 한다는 말이 “초등학교 6학년 때 ‘수사 반장’ 때부터 좋아했고, 당신을 생각하며 쓴 역할”이라고 하자 결국 거기에 말려들어 영화를 찍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도 맡은 역할이 조금은 민망한 역할이라 영화는 어찌어찌해서 다 찍었지만 솔직히 개봉 후에는 그 영화를 볼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고, 하지만 개봉 며칠 후 봉준호 감독이 직접 전화를 걸어 ‘오늘 꼭 같이 영화를 보자’라고 하자 맨정신으로는 볼 수 없어 소주 한 병을 다 마시고 영화관에 들어가게 됩니다.

 

솔직히

이때 그의 심정은 ‘아는 사람들이 영화 속에서 자신의 민망한 모습을 보고 어떻게 생각할까. 뭐라고 할까’ 하는 생각에 얼굴이 붉게 올라오고 말았고, 그런데 막상 영화를 보니 생각보다 괜찮고 상상하지 못했던 장면들이 있자, ‘이 감독 보통 머리가 아니구나’라는 생각에 그 후로 가족들도 가서 다 같이 영화를 보곤 했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천재 감독 봉준호와의 인연은 이후 세 작품이나 더하며 모두 큰 성공을 거뒀고, 특히 세 번째 작품 ‘괴물’은 무려 1300만 관객을 동원하며 연기 인생 40년 만에 가장 큰 사랑을 받으며, 그에게도 최고로 멋진 봄날이 찾아오게 됩니다.

이처럼 기다림이 길면 열매도 크다던가, 그간 지지부진했던 그의 연기 인생이 봉준호 감독을 만나 활짝 피더니, 남들은 쉬어야 할 나이에 그는 가장 영광스러운 시간들을 보낼 수 있었고, 그러다 지난 2017년에는 또 다시 봉준호 감독의 부름을 받아 영화 ‘옥자’로 데뷔 50여 년 만에 영화인의 로망인 ‘칸 국제영화제’까지 참석하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변희봉 그가 고백하길 “우리가 살아가면서 가장 중요한 건 좌절하지 말아야 한다. ‘이렇게 해서 내가 어떻게 살겠느냐’라는 생각을 갖게 되면 한도 끝도 없이 어려워진다고 생각한다. 꿈을 가지고 때를 기다려야 자기에게 기회가 오는 것이다”

“나도 살아오면서 마음속에 괴롭고 어두웠던 시절이 더러더러 있었다. 하지만, 그런 시련 없이 크게 오는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라고 했습니다.

한편, 변희봉은 지난 몇 년간 건강에 좋지 않았다가 최근에 회복했는데, 당시 췌장암에 걸렸으나 다행히 초기에 발견해 현재는 완치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때문에 봉준호 감독의 최고의 흥행작 ‘기생충’에는 출연하지 못했는데, 그가 불참한 이유가 알려진 후 ‘췌장암 조기 발견이며 오스카상과 바꿀 만하다’라는 농담반 진담반의 이야기를 전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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