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적인 노래로 인기를 거머쥔 가수 오세복…” 뒤늦게 알려진 그의 눈물겨운 사인에 많은 이들이 오열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1970년대 ‘밤배’, ‘긴 머리 소녀’ 등으로 유명한 포크 듀오 ‘둘다섯’의 오세복 님이 2021년 8월 11일 오전 5시 11분에 별세하셨습니다.

그의

나이 향년 67세였습니다.

오세복은 1974년 이두진과 함께 ‘둘다섯’이라는 남성 듀오를 결성해 데뷔 앨범을 발표했습니다.

그런데 팀 이름이 상당히 특이합니다.

‘둘다섯’은 가수 두 사람의 성인 이두진의 ‘이’와 오세복에 ‘오’에서 따왔습니다.

‘둘다섯’은 우연한 만남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서울

휘문중학교, 휘문고등학교 1년 선후배 간인 이들은 우연히도 대학도 같은 동국 대학을 다니게 되었습니다.

1973년 선배 이두진은 후배 오세복이 대학에 입학하자 기분이 좋았습니다.

오세복과 음악적으로 통하는 데다 고교 동문이자 대학 동문이 됐다는 사실에 가슴이 뿌듯했습니다.

 

 

어느 날, 이두진은 오세복을 불렀습니다.

“야. 세복아 이번 신입생 환영회 때 우리 듀엣을 만들어 한 번 발표해 보지 않을래? 너 곡 써둔 거 많잖아”

선배 제의를 받은 오세복도 싫은 표정은 아니었습니다.

 

잘하는

선배가 대학생이 된 자신을 불러준 것에 고마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게다가 써놓은 곡들을 묵히기 아까운 생각도 들었죠.

“그러죠 뭐”

오세복의 대답은 간단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두 사람은 듀엣으로 음악 활동에 들어갑니다.

이들은 그해 대학 신입생 환영회 행사 때 자작곡 ‘긴머리 소녀’를 불러 큰 박수를 받았습니다.

학교 신문에 보도되고 졸지에 대학가의 화젯거리로 떴습니다.

이 소식은 음반업계에 알려졌고, 지구레코드 최경식 상무는 이들을 수소문에서 불렀습니다.

그리고 전속가수로 계약하고 음반을 내자는 최 상무의 제의를 두 사람은 받아들였습니다.

 

그렇게

발표하게 된 1집에 같이 실린 ‘긴머리 소녀’와 ‘밤배’가 방송 전파를 타면서부터 동반 히트했습니다.

‘긴머리 소녀’가 먼저 인기곡으로 떴고, 그 여세를 몰아 ‘밤배’도 덩달아 상종가를 치며 크게 히트한 것이죠.

‘긴머리 소녀’가 대중들에게 애창되면서 대학가의 여대생과 공단의 여공들 그리고 여사원들 사이에 긴 머리가 유행했습니다.

‘둘다섯’이 대학생 가수라는 맑고 깨끗한 이미지와 순수한 목소리 그리고 풋풋한 사랑 얘기가 담긴 노랫말 등이 대중들에게 먹힌 것이죠.

이어 ‘밤배’까지 히트를 치면서 ‘둘다섯’과 그들의 노래는 젊은이들 사이에서 더욱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당시

젊은이들은 머리를 기르고 밤배를 타고 피서를 가는 게 붐을 이루기도 할 정도였습니다.

특히 ‘밤배’는 감성을 자아내는 멜로디와 아름다운 노랫말로 한때 초등학교와 고등학교 음악 교과서에 실리기도 했습니다.

‘둘다섯’은 송창식, 윤형주의 ‘트윈폴리오’와 임창제, 이수영의 ‘어니언스’에 이어 큰 인기를 얻으며, 그 후 ‘일기’, ‘얼룩 고무신’ 등의 주옥같은 노래들을 만들며 전설의 뮤지션이 되었습니다.

‘둘다섯’은 소박하고도 시적인 노랫말과 서정적인 곡조, 밝고 감미로운 하모니를 구사하며 1970년대 통기타 음악 시대를 풍미했죠.

그런데 ‘둘다섯’의 노래는 예상치 못한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습니다.

‘긴머리 소녀’는 소녀와의 우연한 만남과 이별 그리고 그리움과 추억을 담은 내용인데요.

이 노래는 오세복 작사 작곡으로 알려졌지만 실제 작사자는 코미디언 손철이었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당시 손철은 구로공단의 여공들을 생각하며 가사를 썼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긴머리 소년’은 당시 가족의 생계를 위해 작업을 포기하고 상경해 공장 노동자로 취직했던 여성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습니다.

실제로 ‘긴머리 소녀’는 당시 구로공단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자주 열렸던 위문 공연에서 가장 널리 불린 노래였고, 당연히 ‘둘다섯’은 이런 공연의 단골 초청 가수였습니다.

 

또한

‘밤배’의 작사가와 작곡가에 대해서도 논란이 있었습니다.

‘밤배’는 원래 오세복 작사 작곡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에 관련해 오세복은 이렇게 얘기해 왔습니다.

오세복은 대학교 1학년 때 통기타를 메고 제주도 친구 집으로 작곡 여행을 떠났습니다.

 

학생 신분에

비행기 요금이 꽤 부담스러웠던 때라 목포에서 14시간 동안 배를 타고 제주도로 향했습니다.

고동이 울리고 배는 파도를 가르며 육지에서 멀어져 갔습니다.

공해상으로 선수를 돌린 배는 땅거미가 내려앉아 만경창파에 뜬 한 장의 낙엽 같았습니다.

그는 문득 시상이 떠올라 노트를 꺼내 갑판 불 밑에서 일기를 써 내려갔습니다.

그날 있었던 일들과 머리에 떠오르는 상념들을 하나 둘 적어 나간 것입니다.

며칠 후, 그는 제주도 여행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와 갑판에서 적어둔 일기와 메모들을 노랫말로 다듬었습니다.

이어 곡을 붙이니 훌륭한 노래가 됐고, 그 작품이 바로 ‘밤배’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이두진이 노래가 발표된 지 32년이 지나 다른 주장을 합니다.

그는 ‘밤배’를 자신이 지은 곡이라고 주장한 것입니다.

이두진은 2007년 인터넷 팬카페 ‘둘다섯과 다정한 사람들’에 “‘밤배’ 이렇게 만들었다”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렸습니다.

이두진은 1973년 남해를 여행하던 중 금산 보리암에서 하룻밤을 묵게 됐는데 발아래는 남해 바다가 한눈에 들어오고 상주해수욕장이 그림처럼 펼쳐져 있었다고 합니다.

 

그때

캄캄한 밤바다에 작은 불빛이 외롭게 떠가는 것이 정말 인상적이었다고 밝혔습니다.

이어 그 인상을 그대로 메모해, 즉석에서 흥얼거려보니 어느 정도 노래가 되어 그다음 날 서울로 올라와 다듬어 ‘밤배’를 완성했다고 덧붙였습니다.

또한 그는 이 글에서 아직도 보리암에서 바라본 밤바다의 작은 불피, 그 ‘밤배’의 기억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며 가야 할 목적지를 향해 힘없이 가야 하는 ‘밤배’는 거친 바다와 싸우며 삶을 영리해 가는 어민들의 운명이기도 하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밤배’는 그들에게 바치는 노래이기도 하다고 했습니다.

이두진이 뒤늦게 밝힌 노랫말의 사연에 등장하는 금산과 보리암 그리고 상주해수욕장은 많은 사람들이 남해 하면 가장 먼저 떠올릴 만큼 남해의 가장 대표적인 명소입니다.

극히 보리암에서 내려다보이는 상주해수욕장은 70년대부터 전국의 청춘 남녀들이 여름이면 찾아 추억을 쌓은 곳이었습니다.

 

남해의

남쪽 끝자락에 위치한 이 해수욕장은 빼어난 경관과 주변 명승지가 어울려 연중 관광객들이 몰리는 곳입니다.

특히 여름 한철만 해도 전국에서 100만여 명이 찾는 해수욕장이기도 합니다.

‘밤배’의 배경이 상주 앞바다라고 주장한 이두진의 말에 따라 2007년 해수욕장의 명칭을 ‘상주 은모래 비치’로 변경한 남해군은 다음에 해수욕장 송림 야영장 쪽에 노래비를 세웠습니다.

돛대 모양의 삼각형 노래비 산단에 ‘밤배’ 악보를 아래 ‘둘다섯’의 사진과 함께 노래비를 세운 사연을 기록해 놓았습니다.

노래비에는 특히 ‘밤배’를 비롯해 ‘긴 머리 소녀’, ‘얼룩 고무신’, ‘바다’ 등 ‘둘다섯’의 히트곡 10곡을 담은 음향장치가 설치돼 있어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곡을 선택하고 버튼을 누르면 해수욕장과 멀리 금산을 조망하며 ‘둘다섯’의 감미로운 목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다 이두진은 “이 곡의 실제 작사자는 따로 있다. 유의번이라는 무명의 음악교사가 노랫말에 썼고, 여기에 내가 곡을 붙였다”라고 토로했습니다.

이런 논란 때문인지 두 사람은 끝까지 함께 음악을 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고인의 죽음이 더 안타까운 이유가 있습니다.

 

고인은

1970년대 통기타 음악 전성기를 열었고 이후에도 지속적인 음악 활동을 했습니다.

라이브 카페 ‘밤배’를 운영하기도 했고 7080콘서트에서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건강이 악화되어 노래 활동을 못 하게 되었습니다.

두주불사의 오세복은 당뇨로 인한 신장 손상으로 혈액투석을 받으며 힘든 투병을 해오다가 아들의 콩팥을 이식받은 후 건강이 회복되기도 했습니다.

그 후 봉사활동으로 음악 치료를 위한 재능 기부를 하며 보람된 삶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더구나

고인은 최근까지 신곡 발표를 준비했던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가수 김연숙의 ‘그날’을 작곡한 가수 겸 작곡가 이철식과 새롭게 ‘둘다섯’이라는 이름으로 활동을 준비한 것입니다.

‘남자가 사는 이유’라는 제목의 신곡 음반 녹음까지 마쳤지만, 건강 문제로 발표하지 못한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가요계와 유족에 의하면 고인은 패혈증으로 별세했습니다.

살아생전 많은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음악과 추억을 선사해 주신 오세복 님께 깊이 감사드리며, 다시 한번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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