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심한 생활고에 결국 유언장까지… “산전수전 배우 손숙의 눈물겨운 소식..” 그녀의 들려온 정보를 확인해보시길 바래요..

어떤 한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어른들을 마주할 때 우리는 종종 인생의 참뜻과 삶의 진정한 의미를 배우곤 합니다.

오늘

전달하려는 이야기의 주인공 역시 긴 인생을 통해 얻은 삶의 지혜가 말과 행동에 묻어나는 그런 어른이죠.

바로 연극계의 대모, 손숙 씨입니다.

1944년생인 연극배우 손숙 씨.

 

 

그녀는 경상남도 밀양의 지주 집안 손녀딸로, 고래등 같은 한옥의 하인을 몇씩이나 부리며 경제적으로 윤택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손숙 씨는 당시를 무척이나 힘겨웠던 시기라고 기억하는데요.

그 이유는, 서글펐던 어머니의 삶 때문이었습니다.

손숙 씨의 아버지는 네 명의 여자에게서 배다른 자식 10명을 두었을 정도로, 바람기가 다분한 남자였습니다.

심지어 자신은 동경 유학 시절 만난 신여성과 부산에 살림을 차리고, 전형적인 옛날 여자였던 손숙 씨의 어머니는 삼 남매를 키우며 시댁 어른들을 모시고 살게 했다는데요.

그 탓에 손숙 씨는 어린 시절 아버지 얼굴을 제대로 본 기억이 없을 정도라고 합니다.

 

 

그녀는 어린 마음에 사랑 없이 그저 의무만으로 결혼 생활을 유지하는 어머니가 답답했다고 하는데요.

심지어 손숙 씨는 어머니에게 ‘왜 이혼하지 않느냐’라며 대들기까지 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힘든 결혼 생활이라 해도 그 시절 여자들이 이혼을 한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죠.

 

남편

없이 삼 남매만 바라보고 살던 손숙 씨의 어머니는 손숙 씨가 초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갑작스레 쪽찐 머리를 자르고 시댁 어른들 앞에 나타나 ‘서울로 이사하겠다’라는 폭탄선언을 하는데요.

손숙 씨의 어머니는 자신의 아이들이 부산에서 살고 있는 아버지의 다른 아이들보다 나은 삶을 살아야 한다 생각했다고 합니다.

손숙 씨 어머니의 의지가 얼마나 강했던지 시댁 어른들도 할 말을 잃었을 정도라고 하는데요.

결국 손숙 씨의 어머니는 삼 남매를 데리고 서울로 상경했고, 그 덕에 손숙 씨는 연극 무대를 접하고 배우가 될 수 있었습니다.

당시만 해도 손숙 씨는 어머니의 한을 이해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자신도 나이가 들고 엄마가 되어 보니 어머니가 어떤 심정으로 결혼 생활을 견뎠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됐다고 하는데요.

그래서일까요?

손숙 씨는 자신이 출연했던 연극 중 가장 아끼는 작품으로 항상 ‘어머니’를 꼽습니다.

 

아마도

연극 속 어머니의 모습과 돌아가신 친정어머니가 겹쳐 보이기 때문이겠죠.

돌아가신 친정어머니는 손숙 씨가 고난 없는 평탄한 인생을 살길 바라셨을 테죠.

하지만, 안타깝게도 손숙 씨 역시 어머니 못지않은 복잡한 결혼 생활을 견뎌야 했는데요.

 

 

손숙 씨의 남편은 그녀보다 9살 많은 연극배우였습니다.

당시에 남편이 첫사랑이었던 손숙 씨는 대학까지 중퇴하고 남편과 결혼했고, 40살이 될 때까지 가정에 충실하며 매년 한 두 작품 정도의 연극에만 출연해 왔는데요.

하지만, 영원할 것 같던 가정의 평화는 그녀의 남편이 무역업 등 여러 사업에 손을 대기 시작하며 점점 희미해져 갔습니다.

손숙 씨의 남편인 김성옥 씨는 무리하게 사업을 확장하다 결국 사업의 실패로 전 재산을 날리고 해외로 도피하고 마는데요.

손숙 씨 입장에서는 눈 떠보니 딸 셋과 함께 빚더미에 올라앉은 셈이었죠.

채권자들은 손숙 씨가 공연으로 벌어오는 돈 중 절반을 압류해 갔습니다.

딸 셋과 함께 살아갈 길이 막막했던 그 시절, 손숙 씨는 매일 저녁에 아파트 8층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극단적인 선택을 생각했다고 하죠.

하지만, 딸들 때문에 그럴 수 없었다며 당시를 회고했습니다.

이처럼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리던 그녀를 구해준 건 그 유명한 라디오 방송, ‘여성 시대’였는데요.

손숙 씨가 진행을 맡았던 당시는 IMF 시기였습니다.

자연스레, 프로그램을 통해 소개되는 사연 중 대부분은 참 어렵고 힘든 사연들이었는데요.

손숙 씨는 잔잔한 목소리와 조리 있는 말솜씨로 힘들어하는 사연자들과 공감하고 그들을 위로해 주었습니다.

 

그의

명진행에 힘입어, ‘여성 시대’는 라디오 청취율 조사를 할 때마다 1위 자리를 지키기도 했는데요.

프로그램을 통해 위로받은 건 사연자들만이 아니었습니다.

손숙 씨 역시 ‘불행한 이들이 용기를 갖고 살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라며 ‘여성 시대를 통해 많은 위로를 받았다’라고 하는데요.

이처럼 라디오 진행과 연극을 병행하며 손숙 씨는 무려 20년에 걸쳐 남편이 진 막대한 빚을 갚게 됩니다.

이후 손숙 씨는 남편과 이혼을 생각하기도 했지만, 결혼하지 않은 막내딸을 두고 차마 이혼은 할 수 없었다고 하는데요.

대신 그녀가 선택한 것은 남편과의 별거였습니다.

 

현재까지도

무려 20년이 넘는 세월을 남편과 따로 살고 있는 건데요.

신기한 건, 별거 후에야 손숙 씨가 배우라는 직업을 자신의 평생업으로 진지하게 생각하게 됐다는 점입니다.

힘겨운 길을 돌고 돌아 결국 지금의 자리를 찾게 된 그녀, 정말이지 인생에는 정답이 없는 것 같습니다.

이후 손숙 씨는 연극계의 대모라 불리며 존재만으로 모두를 압도하는 연기자로 자리매김하게 되는데요.

이런 그녀를 눈여겨보았던 김대중 대통령의 청으로, 손숙 씨는 놀랍게도 환경부 장관직에 이름을 올리게 됩니다.

그러나 정치계는 만만한 곳이 아니었는데요.

그녀는 1999년 5월 환경부 장관 임명됐으나, 재임 33일 만에 포괄적 뇌물 수수 혐의로 장관직에서 물러나야만 했습니다.

당시 손숙 씨는 장관 지명 전 약속돼 있던 러시아 공연 무대에 올랐고, 공연이 끝난 뒤 공개적으로 격려금 봉투를 받았는데요.

그녀의 말에 따르면 이는 연극계의 관행이었다고 합니다.

손숙 씨는 심지어 봉투를 받자마자 공연 관계자에게 전달했다고 하는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당과 언론의 집중포화가 이어졌고, 결국 손숙 씨는 견디지 못하고 사표를 제출해 한 달여 만에 장관 자리에서 내려오고 맙니다.

권모술수가 기본인 정치파는 배우가 소명인 그녀에게는 맞지 않았던 것이죠.

손숙 씨는 이후 다시 연극 무대로 돌아와 베테랑 배우 신구 씨, 이순재 씨와 더불어 자주 대학로 연극 무대에 서게 되는데요.

세 사람은 우스갯소리로 ‘나이 드니 방송에서 불러주지 않아 좋아하는 연극을 실컷 하고 있다’라며 자신들을 ‘대학로 방탄노년단’이라 칭하기도 합니다.

손숙 씨는 이들과 유난히 많은 작품을 함께 했는데요.

그중에서도 신구 씨와는 ‘장수상회’, ‘아버지와 나와 홍매와’ 등등의 연극에서 부부로 출연했고, 많은 이들에게 ‘정말 두 사람이 부부 아니냐?’라는 오해를 사기도 했습니다.

 

물론

그녀의 연기 활동이 연극에만 국한된 건 아닙니다.

연기를 시작한 초반엔 방송 출연을 꺼렸지만, 지금은 드라마에도 자주 얼굴을 보이며 무게감 있는 조연으로 활약하고 있는데요.

최근에는 많은 이들이 인생 드라마로 꼽는 ‘나의 아저씨’에서 아이유 씨의 청각장애 할머니로 출연했고, 일생일대에 명연기를 펼치며 감동을 주기도 했죠.

손숙 씨는 당시 함께 연기한 아이유 씨에 대해 “책도 많이 읽고 생각도 많이 한다. 연기도 깊이가 있고, 굉장히 잘해. 아이 같지 않다”라고 극찬했는데요.

그녀는 심지어 좋은 작품이 있으면 아이유 씨와 연극을 함께 해 보고 싶다는 바람을 드러내기도 했습니다.

 

아이유

씨처럼 진심으로 최선을 다해 연기하는 후배들이 예뻐 죽겠다는 손숙 씨.

그녀는 여전히 후배들과 함께 연극 무대를 지키고 있습니다.

최근 그녀가 출연한 작품은 ‘햄릿’인데요.

놀랍게도 손숙 씨가 ‘햄릿’에서 맡은 역할은 극중 극에 출연하는 배우로 단역 수준의 비중을 차지한다고 하는데요.

7~8마디의 대사를 소화하면서도 즐겁게 막을 여닫고 있다는 손숙 씨.

어떤 분야에서건 그녀와 같은 인물은 말 그대로 보석 같은 존재일 겁니다.

삶의 황혼기의 무대에서 반짝이는 그녀의 모습은 관객에게도, 후배들에게도 진한 감동으로 다가오는데요.

 

이처럼

여전히 연기에 대한 열정이 넘치는 손숙 씨이지만, 나이가 나이이니 만큼 요즘은 생의 마지막에 대한 고민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고 합니다.

그녀는 최근 라디오 프로그램 ‘컬투쇼’에 출연해 ‘유언장을 미리 써놨다’라며 ‘재산은 줄 게 없지만, 연명치료를 안 했으면 좋겠다. 미리 써놓고 공증을 받아 놓으면 된다고 해서 써놓았다’라고 발언해 모두를 놀라게 했는데요.

손숙 씨는 ‘삶의 마지막엔 존엄하게 떠나기를 바란다’라며 영정 사진도 굳이 나이 든 사진을 한 장만 쓸 게 아니라, 배우로 활동할 때 사용한 각종 포스터를 여러 장 사용하고 싶다는 뜻을 내비쳤습니다.

거기에 더해 손숙 씨는 엄숙한 분위기가 아닌 잔치 같은 장례식을 원한다며 인생의 마지막에 대해 자식들과 많이 대화하면 좋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는데요.

그녀의 말 한마디에서 인생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이 느껴지죠.

가시에 찔리지 않고는 장미꽃을 얻을 수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인생 사 온갖 고초를 겪고 나서야 풍길 수 있는 삶의 진한 향기가 온몸에 배어 있는 배우 손숙 씨.

앞으로도 오랜 시간 무대 위에서 빛나는 그녀를 볼 수 있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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