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상치 못한 시한부 판정 현철의 눈물겨운 소식..” 휠체어 타고 “그가 급히 향한 장소의 정체가” 들통나고 모두가 놀라고 마는데..

현미와 비슷한 80세 이상의 원로 가수는 패티 김과 이미자를 비롯해 1942년생으로서 올해 81세가 된 가수 현철이 떠오르실 것입니다.

현철도 고령의 나이 탓에 4년이 넘게 투병 생활을 했던지라 가까운 송해 선생의 장례식에도 가보지 못할 만큼 건강이 악화됐었죠.

그런

그가 자신의 힘든 몸을 이끌고 현미의 장례식에 힘겹게 찾아가 4살 연상의 누나였던 현미에게 마지막 인사를 오열하며 전했으니, 보는 조문객들로 하여금 크나큰 감동과 슬픔을 안겨줬다고 합니다.

여기엔 대체 어떤 사연들과 어떤 슬픔들이 담겨 있었을까요?

 

 

현미의 별세 소식이 알려지자 미국에 거주하던 그녀의 두 아들들은 미처 놀랄 틈도 없이 귀국한 뒤에야 빈소를 찾아와서 통곡하였습니다.

원래는 가족들이 빈소를 마련하고 조문객들을 맞이하는 게 전통이지만, 현미의 직계 가족인 두 아들들이 모두 미국에서 거주하는 까닭에 그녀의 가까운 지인들과 혈육들이 두 아들의 빈자리를 대신 채워주었죠.

일반적인 사람이었다면 자칫 수개월이나 지나서 발견되는 그런 고독사 중 또 하나의 사례로 남는 안타까운 일을 겪었겠지만, 현미는 팬클럽 회장이 주기적으로 방문하며 그녀의 안부를 확인하였고, 직계 가족을 대신해 지인들이 나서 장례 절차를 진행한 걸 보면 살아생전 훌륭한 인품과 두터운 인간관계를 맺었었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과거

현미의 유명 작곡가인 이봉조 사이에서 두 아들을 출산하였는데, 첫째 아들인 이영곤은 곤이라는 예명으로 가수 도전을 했던 적이 있으며 이 과정에서 현미가 6억이 넘는 돈을 보태줬다는 게 알려져 화제입니다.

둘째 아들 이영준은 가수 원준희의 남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현미도 안타깝고, 아들도 안타깝다고 느끼는 점은 부친 이봉조로 인해 겪은 다사다난하고 복잡했던 가정사입니다.

현미의 아들들은 히트곡 제조기였던 부친 이봉조의 어마무시한 재산을 단 한 푼도 물려받지 못하며 세간의 큰 화제가 되었었는데, 평소에 부친 이봉조는 본처 자식들과의 재산 분쟁을 염려했다고 전해집니다.

 

그러면

공평하게 재산을 나눠주는 게 누가 봐도 당연한 상식이겠지만, 이봉조는 본처 자식에게 살아생전 재산 전부를 상속하였고, 현미의 아들들 또한 이복형제와의 다툼이 싫어 흔쾌히 받아들였다고 하죠.

현미도 살아생전 고백하길 “내가 이봉조와 결혼 생활을 해갔을 때, 모든 재산은 남편 명의로 되어 있었고, 내 명의로 된 건 단 한 개도 없었다”라고 했죠.

 

 

더욱이 이봉조는 현미를 속이며 본처와의 이중 결혼 생활을 유지했기에 훗날 현미가 사기 결혼임을 깨닫고, 두 아들을 데리고 집을 나오자 야구방망이를 들고 찾아가 난장판을 피웠던 건 유명한 일화입니다.

이에 일부 사람들은 현미가 어떻게 이중 결혼 생활을 눈치 못 챘는지 이해가 안 간다는 입장이지만, 이봉조는 가짜 이혼서를 보여주며 15년 동안 완벽하게 속여왔던 인물입니다.

심지어 현미의 첫째 아들과 본처의 셋째 아들은 동갑이라는 사실 및 현미와의 결혼 생활 와중에도 본처와의 자녀 2명을 더 출산했던 점을 보면 제 3자 입장에서도 분노하게 되는 매우 엽기적인 행각이었습니다.

당연히 현미와 자녀의 입장에서는 못난 이봉조가 증오스러울 법도 한데, 현미는 억울하고 분하지도 않냐는 주변 지인들에게 답하길 “20년을 사랑했던 남자이고, 이로 인하여 두 아들을 낳았으며 밤안개를 비롯해 평생의 노래를 작곡해 준 분이기에 밉지 않다”라고 답했었죠.

 

오히려

이봉조를 불쌍해하며 항상 딱하다고 안타까워했었습니다.

이봉조는 현미와의 이별 이후 본처에게 가지 않고 독신 생활을 유지했는데, 훗날 쇠약해진 모습으로 현미를 찾아가 다시 합쳐살자는 제안을 했다고 합니다.

제가 피해자였던 현미라면 당연히 이 제안을 거부했었겠지만, 현미는 바다와 같은 넓은 마음으로 자신이 아니면 누가 불쌍한 이를 챙기겠냐며 결국 이봉조의 재결합 제안을 받아들였고 다시 합칠 준비를 했다고 하죠.

하지만, 갑작스러운 심장마비로 이봉조는 세상을 떠나게 되었는데, 본부인 노전숙의 자녀들이 합장을 요구하자 현미는 흔쾌히 이 제안을 들어주었고요.

사실 이봉조 입장에서 이 합장은 원하지 않던 일이었습니다.

 

 

그는 살아생전 유언하길 ‘자신이 훗날 세상을 떠나게 된다면. 먼저 떠난 본부인 노전숙과의 합장은 절대로 하지 말라’라고 신신당부하였죠.

그러나 자신이 거부했던 본부인이 옆에 나란히 묻히게 되었으니, 뭐랄까 행실에 대한 죄를 받는 운명의 장난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모친과의 합장을 거부했던 부친을 끝끝내 합장시킨 자녀들도 대단하고요.

여담으로 이봉조와 본부인 노전숙 사이에서 태어난 4남매는 모두 다 명문대를 졸업하였고, 외모 또한 출중하다고 전해집니다.

아들 이영대는 서울대학교 법학과를 수석 졸업했으며, 22살에 사법고시에 차석으로 합격한 수재 중의 수재라고 불려지죠.

딸들 또한 이화여대 등을 졸업하고 의사와 교수 남편을 두었다고 전해집니다.

 

이렇게

똑똑한 본부인 자녀들이 유언까지 남기며 합장을 거부했던 자신들의 부친 이봉조의 옆에 모친을 끝끝내 합장했던 이유는 어쩌면 이봉조와 현미의 사랑에 대한 질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현미는 21살 때 미 8군 위문 공연을 하며 이봉조를 처음 만나게 되었는데, 당시 현미가 밴드의 메인이었다면 이봉조는 새내기 마스터에 불과했습니다.

때문에 당연히 현미의 눈에는 이봉조가 성에 차지 않았었겠죠.

현미는 이봉조를 은근히 무시했었고, 이봉조도 이런 현미를 싫어했다고 합니다.

이 둘의 갈등으로 밴드 내 분위기가 점점 혼란스러워지자 밴드 단장은 둘 사이를 좋게 만들기 위해 하나의 작전을 꾸몄다고 하죠.

 

바로

나이트클럽에 데리고 간 후 둘이 함께 춤을 추게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당시에 남녀칠세부동석이라고 스킨십조차 함부로 못하던 시절이었기에 나이트클럽에서는 서로의 손에 손수건을 끼고 춤을 추는 게 예의였지만, 당돌했던 이봉조는 현미의 손을 고민 없이 잡고 신나게 춤을 줬다고 합니다.

서투르던 이봉조의 춤은 계속해서 현미의 발을 밟았지만, 어째서인지 현미는 짜증보단 귀엽게만 느껴져 호감이 생겼다고 하죠.

이날을 계기로 둘 사이는 가까워지며 본격적인 사랑의 감정이 시작되었습니다.

너무 불타는 사랑을 하다 보니 밴드 운영이 안 될 정도루 연애를 했기에 밴드 단장이 이봉조를 내쫓으려 하자, 현미도 같이 밴드를 나왔을 정도였고요.

현미 스스로도 당시의 연애 감정에 대해 말하길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고, 후회 없이 사랑을 했던 뜨거운 시간이었다”라며 이봉조와의 연애 시절에 대한 특별한 감정을 추억하기도 했죠.

때문에 이봉조가 이중 결혼 생활로 사기를 치고 폭X 위협까지 했어도 현미의 인생에선 가장 아름다운 시간의 주인공이었기에 증오보단 애증의 감정으로 발전하며 이봉조를 안타까워했던 것 같습니다.

만약 이봉조가 도망간 현미를 붙잡지 않고 본처에게 돌아갔다면, 아마도 현미 또한 손쉽게 이봉조를 잊을 수 있었겠죠.

하지만, 이봉조는 본처에게 돌아가지 않고 남은 인생을 독신으로 살다 갔으니, 이런 이봉조의 모습은 마음 약한 현미의 동정심을 깊이 자극했던 것 같습니다.

이렇게 용서심 많은 현미를 많은 이들이 안타까워하고 딱하게 여겼는데, 절친 엄앵란과 신성일 부부는 어린 자녀들을 데리고 집 나온 현미를 위해 흔쾌히 자신들의 집에서 몇 개월 동안 함께 살 만큼 따뜻한 의리를 보여 주었죠.

 

그리고

엄앵란에겐 신성일은 이봉조만큼이나 속을 썩였던 남편이니 현미와 엄앵란은 동질감을 서로 느끼며 친구 이상의 관계를 평생 동안 유지했고요.

이 엄앵란만큼이나 현미를 챙겼던 건 바로 4살 터울의 동생 현철이었는데, 현철은 건강하던 현미와 달리 몇 년 동안 큰 투병 생활을 해왔습니다.

현철은 현미에게 같은 시대를 보냈던 친한 동료이자, 몇 안 되는 현역 원로 가수이기에 현철의 투병 기간 동안 극진하게 그를 챙기며 신경 썼다고 하죠.

그런데 건강하던 현미가 갑작스러운 사고로 혼자서 쓸쓸하게 죽음을 맞았으니, 현철은 엄청난 충격을 받으며 식음을 전폐한 통곡을 했다고 전해집니다.

송해 선생의 장례식에도 몸이 너무 아파 조문하지 못했던 그였지만, 주위 사람들의 걱정과 만류에도 불구하고 결국 힘든 몸을 이끌며 빈소를 찾아왔죠.

 

마지막

길을 배웅해야 한다는 그의 고집과 누님 현미를 그리워하며 오열한 모습은 유가족들과 조문객들마저 울게 만든 굉장히 슬픈 순간이었다고 전해집니다.

따뜻하고 인자하게 살았던 그녀이기에 이처럼 많은 이들이 슬퍼하는 것이겠죠.

부디 하늘에 계신 그곳에서는 모든 한을 내려놓고 행복하시기만을 바라며 글을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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