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필귀정’
그러나
우리의 주변에는 이 말이 맞는 경우를 찾기 힘듭니다.
일례로, 대대로 부정한 방법을 써서 재산을 취득한 일가가 아직까지도 부유하고 평화롭게 살고 있는 경우도 많고, 또 반대로 나라를 지키기 위해 노력했던 독립운동가들의 후손들이 뼈저리게 가난한 삶을 사는 사례도 흔히 찾아볼 수 있으니 말입니다.
이번 주인공 또한 어쩌면 이렇듯 너무나 억울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인물인데요.

바로 우리들의 영원한 ‘뽀빠이 아저씨’, 이상용 씨입니다.
한때
이상용 씨는 심장병 어린이들을 돕기 위해 기부금을 받았지만 기부금 전액을 자신의 재산을 모으는 데 사용했다는 의혹을 받았습니다.
그가 최근 보도한 소식은 너무나 안타깝고 충격적이었다.
과연, 횡령 루머 이후 이상용은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그리고 그를 모함한 자의 놀라운 정체는 무엇인가?
또한 모두가 이상용을 전국가창대회 송해의 후계자로 보고 있는데 그가 바통을 이어받지 못한 안타까운 이유를 알아보자.
많은 분들이 “왜 이상용을 호스트로 뽑지 않았는지 이해가 안 된다”는 메시지를 남겼다.
돌이켜보면 생전에 송해와 인연이 깊었던 송해가 차기 MC로 발탁되지 못한 이유가 궁금하다.
실제로 그는 MBC ‘우정의 무대’를 통해 뛰어난 진행력을 인정받은 바 있다.
‘우정의 무대’는 “뒤에 있는 사람은 우리 엄마겠지”, “고향으로 갑니다!” 등 다양한 캐치프레이즈를 남긴 레전드 프로그램이다.
당시 작은 체구에도 불구하고 이상룡은 폭발적인 에너지로 쇼를 진행했다.
이 때문에 1990년대 후반까지 거의 국민MC 못지 않은 사랑을 받은 호스트였다.
하지만 그가 많은 이들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데는 호스팅 능력 외에도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그중 하나가 바로 본인은 4500만 원짜리 집에 살고 30년이나 된 고물차를 몰면서도 안타까운 사연을 가진 학생의 수술비를 흔쾌히 지원해 주었던 일화 때문입니다.
이후에도
지난 16년간 567명의 아이들에게 새로운 삶을 만들어주고, 한국아동보호협회를 직접 설립하고, 심장병 어린이 수술 기금을 모금하는 등의 공적을 남겼다.
이것이 대중이 그를 기억하는 방식입니다.
‘전국노래자랑’ 호스트 자리에 빈자리가 생기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당연히 故송하이의 후계자 이상용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는 고 송하이의 후계자가 되지 못했다.
그렇다면 주후임 이상룡은 왜 ‘전국노래자랑’ 진행의 바통을 이어받지 못했을까.
이상용이 ‘전국노래자랑’에 불참한 이유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먼저 인기를 끈 ‘우정무대’에서 하차한 이유부터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1989년부터 1997년까지 ‘우정의 무대’는 전국민의 사랑을 받았다.
방송 종영 이유는 이상용이 갑자기 공금 횡령 의혹을 받았기 때문이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이상용 씨는 당시 대한아동보호협회를 운영하고 있었고, 방송 활동도 하고 있었습니다.

여느 때처럼 ‘우정의 무대’를 촬영하고 있던 1996년 11월의 어느 날 녹화 현장에 경찰이 들이닥쳤다고 합니다.
이어서 이상용 씨는 그간 심장병 어린이 기금을 횡령해 왔다는 누명을 쓰고 갑자기 취조를 당해야 했죠.
심지어 KBS ‘추적 60분’에서는 이상용 씨가 책 출판 등을 통해 40억 원을 모금한 뒤 그중 단 2000여만 원 가량만 치료금으로 기부하고 나머지 금액은 전부 본인의 부를 축적하는 데 사용하였다는 내용의 방송을 별다른 확인 절차도 없이 송출하기까지 했는데요.
이로 인해 이상용 씨는 모든 방송 활동을 중단해야만 했고 ‘우정의 무대’ 또한 진행자가 교체되었다가 곧 폐지되는 안타까운 수순을 밟게 되었습니다.
당시 이상용 씨는 재산을 부정하게 취득하기는커녕, 오히려 버는 족족 어린이들의 수술비에 보태느라 통장 잔액이 40만 원에 불과했다고 하죠.
오죽했으면 그를 수사하던 담당 형사들조차도 “형님 왜 이렇게까지 하십니까”라며 그를 안타깝게 여겼을 정도였습니다.
물론
의혹 자체가 황당한 루머였기에 이상룡은 첫 신고 후 약 3개월 만인 1997년 2월 ‘혐의가 없어 무죄’ 평결을 받고 풀려났다.
그러나 이런 상황은 그의 명예가 나라 말까지 떨어진 뒤에 찾아왔다.
그의 방송인 생활은 끝이 났을 뿐만 아니라, 이상용의 아버지도 아들의 혐의를 벗기 위해 개인적으로 전단을 살포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그의 결백이 밝혀졌음에도 당초 루머를 보도한 신문과 방송에서는 아무런 정정이 없었다.
따라서 리양이 과거에 공금을 횡령했다는 거짓 뉴스를 여전히 믿는 사람이 적지 않다.
결국 연예계 복귀에 어려움을 겪던 이상용은 미국인 지인들의 도움으로 한국 관광객들을 위한 관광 가이드로 생계를 이어갈 수밖에 없었다.
당시의 압박감이 너무 커서 이상용은 일시적으로 실명했을 뿐만 아니라 정신질환으로 엄청난 고통을 겪었고 극단적인 시도까지 했다고 한다.
이상용은 국민영웅에서 한순간에 세상의 악역으로 전락했다.
그렇다면 그를 위해 또 누가 있습니까? 무슨 이유에서일까요?
알고 보니 당시 그를 공격한 사람은 청와대 관계자 중 한 명이었다.
이상룡 본인에 따르면 1996년 당시 청와대 관계자의 초청으로 대전 국회의원에 출마했다.
이상용이 제안을 거절하자 해당 인물은 직권을 이용해 저질 루머를 퍼뜨린 것이다.
그러나 사실 이상룡 씨를 더 힘들게 한 것은 루머를 퍼뜨린 청와대 관계자도, 확인되지 않은 사실을 뻔뻔하게 보도한 기자들도 아니었다.
대신 자신을 도와준 사람 중 누구도 “이상용 씨가 도와준 사람은 나다”라고 증언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더욱 충격적이었다.
당시
돈으로 인당 1800만 원이라는 거금을 들여 총 567명의 어린이를 구해준 이상용 씨.
그러나 정작 시간이 흘러 어른이 된 그때의 어린이들은 그 누구 하나 이상용 씨를 위해 나서거나 먼저 연락을 취하지도 않고 있다고 합니다.
이상용 씨 스스로는 “아마 그 아이들도 어른이 되고 한 가정의 가장이 되고 나니 과거 자신이 가난해서 수술비까지도 지원을 받아야 했다는 사실이 부끄럽게 느껴진 모양이다”라며 그들을 이해하려는 모습을 보이기는 했지만요.
그래도 어쩜 제 목숨을 구해준 은인을 이렇게까지 모른 체할 수 있는지 도무지 납득이 되지 않습니다.
아무튼 이토록 힘겨웠던 세월을 딛고 일어나 이제는 다시 방송계에 얼굴을 보여주고 있는 이상용 씨.
그렇다면
최근 그의 근황은 어떤 모습일까요?
이제라도 방송을 통해 돈을 벌며 여유롭게 살고 있기를 바라게 되는데요.
일평생 아픈 어린이를 돕느라 모아놓은 돈도 없다는 이상용 씨.
여기에 고된 미국 생활과 한국에 돌아와서까지 남의 논과 밭일을 대신해 주며 보냈던 세월이 겹쳐 현재 그는 건강이 매우 악화된 상태라고 합니다.
전립선 질환과 다리 골절 등 여러 증상이 심각한 상황이지만, 워낙 당뇨가 심한 탓에 제대로 된 수술조차 받지 못하고 있다고 하죠.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그럼에도 그는 80이 가까운 나이까지 오히려 자신보다 더 어려운 이들을 도우며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폐지를 줍는 노인들에게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기 위해서 매일 외출을 할 때마다 뻣뻣한 1000원짜리 10만 원을 챙겨 나선다고 하는데요.
참 이쯤 되니 워낙 송해 씨와 가족과도 같은 사이였던 그가 ‘전국노래자랑’의 바통을 물려받았더라면 어땠을까 하고 상상을 해보게 됩니다.
만약 그가 불명예스러운 루머에 휩싸여 ‘우정의 무대’를 하차하지 않았더라면, 송해 씨 역시도 건강이 나빠지던 무렵 일찍이 이상용 씨에게 진행자 자리를 물려주고 휴식을 취할 수 있지 않았을까요?
아마도 지금 이상용 씨의 입장에서는 나이와 건강 그리고 후배인 김신영 씨를 위하는 마음 때문에라도 ‘전국노래자랑’의 진행자를 맡기가 어려울 것 같아 더욱 아쉽게 느껴집니다.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나보다 남을 더 생각하며 선행을 베풀고 있는 영원한 뽀빠이 이상용 씨.
부디 다시금 건강을 회복하여 오래오래 행복하게 사셨으면 하는 바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