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뿌린 대로 거두는구나… “시한부 인생 최원석의 충격적인 소식..” 4번의 이혼 끝에 전해진 안타까운 상황..

최원석 전 동아그룹 회장이 말기암으로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다고 고백했습니다.

죽음 앞에서 그가 최근 유튜브 채널 ‘소비 더 머니’에서 인터뷰를 가졌습니다.

그는

그는 4번의 결혼과 4번의 이혼 등 사생활에 대해 많은 비난을 받아왔다.

불행하게도 그는 아버지의 발자취를 따랐고, 이로 인해 그의 인생의 마지막 몇 년은 매우 외로워졌습니다.

동아그룹의 역사는 최원석 회장이 아버지 최준문 회장의 창업으로 시작됐다.

창업주 최준문 회장은 일제강점기 건설회사 직원으로 일하다가 1945년 해방 후 자신의 회사인 ‘충남건설’을 창업하고, 이후 사명을 ‘동아건설’로 바꾸었다.

최준문 창업자는 어렸을 때 회사를 창업했다.

 

 

건설 현장에서 일하던 시절에는 옷차림이나 검게 그을린 얼굴만으로는 건설 노동자인지 대표인지 구별하기 어려웠다고 한다.

최원석 회장은 한양대 경제학부를 졸업하고 미국 조지타운대에서 수학한 뒤 귀국했다.

그는 경영 수업을 듣던 중 1977년 34세의 나이에 아버지의 건강 문제로 회사를 물려받았다.

그는 아버지가 회사를 운영하던 1974년 한국에서 처음으로 중동 건설을 시작했다. 그러다가 중동의 붐이 잦아들자 아들 최원석 대표가 아프리카로 향했다.

리비아 대수로 사업은 사막에 수로를 만든 놀라운 사업으로 리비아의 지도자 카다피와 협력해 기적을 이뤘다.

리비아 사람들은 물이 쏟아지는 것을 보고 매우 기뻐했습니다.

이를 계기로 동아그룹은 성공을 이어갔고, 1997년 동아그룹은 11조원의 자산과 22개의 계열사를 갖게 되었고, 동아건설을 필두로 눈부신 경력을 쌓아 세계 10대 대기업으로 올라섰다.

 

그러나

불행은 스멀스멀 다가오고 있었어요.

어느 날 갑자기 성수대교가 무너졌는데 성수대교는 바로 동아건설이 시공사였죠.

1994년 10월 21일 아침 출근길, 성수대교의 중간 부분이 끊어져 6대의 차량이 한강에 추락하며 32명이 사망했습니다.

전대미문의 어마어마한 사건이었죠.

 

 

그렇게 시작된 비극은 여러 가지 문제로 모습을 드러내며 결국 김포 매립지 문제로 터지고 맙니다.

동아건설은 약 500만 평의 김포 매립지를 갖고 있었는데요.

외국 자본 유치를 통해 관광이나 금융 등 국제적인 허브 도시를 만들려고 했습니다.

1998년 놀이공원 시설 투자를 위해 방한한 마이클 잭슨은 김포 매립지를 방문하고 최원석 회장을 만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농림부 장관은 “이 땅이 처음에 농지로 개발되었기 때문에 절대 용도 변경이 안 된다”라고 주장했습니다.

또한, 수십조 원의 이익이 생길 텐데 사기업에 특혜를 줄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이런 이유 등으로 용도 변경이 안되자 결국 동아그룹은 자금줄이 막히게 됩니다.

 

 

최원석 회장은 주거래 은행인 서울은행에 급히 찾아갔으나, 경영권을 포기하고 재산을 다 내놓으라고 하면서 자택 선상까지 포기하고 물러나면 자기들이 동아그룹을 살려놓겠다고 합니다.

그러자 그는 회사를 살리기 위해 눈물을 머금고 인감, 도장, 산소까지 다 주고 물러났다고 합니다.

그러나 약속과 다르게 동아 그룹의 계열사들은 산산조각이 나죠.

 

그러나

그룹의 핵심인 동아건설은 2000년 11월 부도를 맞았습니다.

한때 우리나라에 많은 근로자들과 그 가족들을 먹여 살렸던 최원석 씨는 이렇게 화려한 영광을 뒤로하고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고, 그의 사생활 또한 파란만장하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그는 4번 결혼하고 4번 이혼한 사생활로도 유명하죠.

1969년 배우 김혜정 씨와 결혼했지만 이혼했고, 1976년 ‘펄시스터즈’ 멤버였던 배인순 씨를 아내로 맞았지만 결국 1998년 끝이 났습니다.

마지막으로, 1999년에는 27살 연하인 아나운서 출신 장은영 씨와 비공개로 결혼했습니다.

하지만, 12년 만인 2010년 끝내 결별했죠.

이것만 보면 세 번인데요.

나중에 또 한 건의 결혼과 이혼이 있었다는 것이 밝혀집니다.

일요신문 보도에 따르면 첫 번째 부인으로 알려진 김혜정 씨와 결혼하기 전에 이미 그는 1967년 결혼했다가 1969년 이혼한 전력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 최 전 회장은 최영택이라는 개명 전 이름을 사용해 세간에 이 사실이 잘 알려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렇게 그는 네 번 결혼하고 또 네 번 이혼했는데요.

놀랍게도 그의 아버지도 생전에 네 명의 부인이 있었습니다.

첫째, 부인과의 사이에 최원석 전 회장을 비롯해 삼 남매를 뒀고, 둘째 부인과의 사이에서는 딸을 낳았습니다.

이후로도 셋째 부인과 넷째 부인에게서도 자식을 얻어 총 3남 4녀의 자녀를 두게 되었습니다.

아버지의 전철을 밟은 최원석 전 회장은 네 번의 결혼으로 4남 1녀의 자식을 둔 데다 한 술 더 떠 혼외 자식까지 있었습니다.

최준문 창업주의 화려한 여성 편력 문제는 그가 1985년 사망하면서부터 시작되었어요.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다는 말이 현실로 닥친 것이죠.

 

그러나

회사를 물려받은 장남인 최원석 전 회장에게 가장 먼저 반항한 것은 계모와 둘째 부인, 그리고 이복누나인 딸이었다.

두 사람은 1995년 돌연 최원석 전 회장이 상속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며 소송을 제기했다.

가족 돈싸움이 5년간의 힘겨운 법적 공방 끝에 최원석 전 회장의 승리로 끝났다.

생모는 1996년 자신의 아들인 최원석 전 회장이 자신이 소유한 학교 기업인 공산주의 학원의 재정 관리를 소홀히 했다고 검찰에 신고했다.

이에 최원석 전 회장은 언론 인터뷰에서 “이 사건의 배후에 동생이 있고 학교 법인을 인수하려 한다”며 학교를 비난해 형제간 싸움으로까지 번졌다.

그러나 검찰 조사 결과 최원석 전 회장이 무죄를 선고받고 형제들이 화해해 사건은 깔끔하게 마무리됐다.

그런데 혼란을 야기한 것은 최원석 전 회장과 사이가 틀어졌던 생모가 아들을 고소한 이유가 며느리와의 심각한 갈등 때문이라고 돌연 밝혔다는 점이다. 배. 곧.

또 최원석 전 회장이 직접 관여하지는 않았지만 동아그룹 일가와 삼성 일가가 연루된 소송이 진행 중이다.

 

최원석

주인공은 전직 대통령의 딸이자 20살 때 사랑에 빠진 여배우 A씨다.

A씨는 고(故) 이창희 전 새한그룹 회장의 둘째 아들이자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형인 제찬과 결혼했다.

그러나 새한그룹의 몰락과 제찬씨의 극단적 선택으로 홀로 남겨진 A씨는 2012년 3월 이건희 회장과 삼성에버랜드를 상대로 1000억원 상당의 주식 인도를 요구하는 소송을 제기했다.

A씨는 새한그룹과의 실제 인연을 끊고 홀로 남겨진 이후 친부인 최원석 전 회장의 도움을 받아온 것으로 전해져 배후 조종 의혹이 제기됐다.

그의 인생은, 심지어 사생활마저도 파란만장했다.

그의 결혼과 이혼이 더욱 화제가 된 이유는 이런 대화의 횟수뿐 아니라 전 부인 4명이 모두 연예인이나 방송인이라는 점 때문이다.

이로 인해 그의 주변에는 끝없는 소문과 소문이 퍼졌다.

이에 대해 그는 사회에 떠돌고 있는 소문은 대부분 거짓이라는 점을 강하게 강조했다.

그는 “사업을 하다가 마음에 들고 소통이 잘 되는 사람을 만났고, 상대방이 결혼을 원하면 그냥 결혼했다”고 말했다.

그는 결혼을 시작한 사람이 자신이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또한 자신의 사생활을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러나

인터뷰 말미에 보통 사람처럼 사는 게 가장 행복하다고 말하며 차마 말하지 못한 후회와 아쉬움이 있음을 드러냈습니다.

그런데 그는 왜 이렇게 많은 여자를 만났을까요?

그는 사실 굉장히 낭만적인 사람이었습니다.

학창 시절 영화에 푹 빠져 지냈고요.

나중에는 실제로 영화감독을 꿈꾸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과거는 참혹한 결과를 낳았죠.

자녀들에게 마음의 상처를 준 데 대해 진심으로 용서를 빌고 자녀들도 후회가 남지 않게 마지막으로, 아버지에게 최선을 다하시면 어떨까요?

그리고 우리나라가 힘들었을 때 국민 경제가 일어서는데 크게 기여한 분이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거 같습니다.

Leave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