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소식이 희소식이라더니만… “부활 가수 김태원.. 전재산 다 잃고 결국 전해진 씁쓸한 소식.. 도대체 무슨 일인가..

시나위의 신대철, 백두산의 김도균과 더불어 한국의 3대 기타리스트로 명성을 떨쳤던 ‘부활’의 리더이자 기타리스트 김태원은 ‘비와 당신의 이야기’, ‘사랑할수록’, ‘아름다운 사실’,’ 네버 엔딩 스토리’ 등 수많은 명곡을 직접 작사 작곡한 히트 메이커입니다.

하지만

대한민국 3대 기타리스트 중 한 명으로 꼽히는 김태원의 인생 이야기를 들어보자.

김태원의 집안은 원래 부유한 가문이었지만,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사업 실패로 재산이 쇠퇴했다.

하지만 김태원은 형들이 다니던 사립초등학교에 가까스로 입학했고, 교복을 입고, 가난하다는 이유로 친구들에게 따돌림을 당했다.

 

그리고

이로 인해 김태원은 자존감에 큰 상처를 입었고, 어려서부터 거짓말과 과장을 하기 시작했다.

그는 학창시절 “열 단어를 말하면 그 중 세 단어가 진실이다”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학교에서는 친구뿐 아니라 선생님으로부터도 차별을 받는다.

 

 

숙제를 안 했다는 이유만으로 수업이 끝난 뒤 맞고 쫓겨난 적도 있었다.

김영태원은 숙제를 안 한 것에 대해 변명을 했을지 모르지만, 같은 집안의 아이였다면 이렇게 극단적인 짓을 했을 것이라는 의혹은 여전하다.

이런 일들이 쌓이면서 김태원은 학교에 가기가 싫어지기 시작한다.

그 순간부터 그는 죽는 것보다 학교에 가는 것이 더 싫어서 계속해서 학교 벽을 돌았습니다.

학교에 가면 기뻐야 할 어린 아이가 학교에 가기 싫어서 혼자 담벼락을 걷고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그는 콤플렉스가 많고 경미한 자폐증, 폐쇄공포증, 사회공포증, 우울증을 앓고 있다.

 

 

1986년 1집 앨범 ‘Resurrection’이 발매됐을 당시 그는 사회적 불안이 너무 커서 사람을 만나도 눈을 똑바로 쳐다볼 수 없었다.

그러던 중 우연히 그가 한 거짓말이 그의 운명을 바꾸었다.

중학교 때 친구가 새 어쿠스틱 기타의 줄에 문제가 있는 것을 보고 자랑하고 싶어서 할 수 있다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러면서 기타를 만지기 시작했고, 그는 이후 한국의 3대 기타리스트로 명성을 떨치게 됩니다.

당시 남학생들 사이에 기타를 잘 치는 아이가 인기를 얻었고 여학생들의 관심도 한몸에 받았습니다.

그리 내세울 것이 없는 김태원은 죽자 살자 기타에 매달리게 됩니다.

기타를 잘 치게 되면 자신 역시 다른 사람으로부터 사랑받는 사람이 되지 않을까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다 고등학교 2학년 때 미팅 첫사랑을 만나게 되고 생애 처음 사랑이란 걸 하게 됩니다.

하지만, 만날 때부터 반대는 이미 시작됐고 처음부터 반대 속에서 두 사람은 만남을 이어갑니다.

당시 그는 반에서 72등이었고 그녀는 전교 4등이었습니다.

김태원이 학교를 안 가면 그녀도 같이 학교를 안 갔고, 두 사람은 동반 무단결석까지 하게 됩니다.

 

 

그러나, 두 사람이 헤어질 즈음에 그녀는 전교 380등까지 떨어지게 됩니다.

김태원과 첫사랑은 몰래 섬으로 가출도 했고 동반 극단적 시도도 생각하지만, 마지막에 마음을 바꾸고 서로 이별을 합니다.

아직 어린 나이고 서로에게 상처가 되는 만남이라는 주변의 반대로 더 이상 만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후, 그는 기타에 더 집착하게 됩니다.

그가 직접 첫사랑에 대해 “제가 기타에 더 몰두할 수 있었던 게 그때의 이별 때문이었다. 성격도 폐쇄적이게 되고, 잠을 못 자는 불면증을 앓았다. 밤에 잠을 못 자니까 할 수 있는 게 기타라서 기타를 미친 듯이 쳤다. 제곡의 90%가 그녀에 대한 얘기이다. ‘비와 당신의 이야기’, ‘사랑할수록’ 등 다 그녀 이야기이다. 아마 그녀가 없었다면 저는 가사를 쓰는 작사가는 못 되었을 거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첫사랑과의 이별 후유증으로 김태원은 더욱더 자기만의 세계로 빠져들었는데 그를 구한 것은 또한 사랑이었습니다.

고3 때 그는 지금의 아내를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아내를 만난 순간 자기 자신이 아내의 첫사랑이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보았고 그는 ‘아내의 첫사랑을 동화처럼 만들어주겠다’라는 마음을 먹고 만나는 순간에 곁에 있어 줄 거라고 확신합니다.

하지만, 후에도 김태원의 인생은 그리 녹록지 않았습니다.

‘부활’을 출범시키고 음악 활동을 시작해 김종서 이후 이승철로 크게 성공했지만, 2집을 준비하던 중 그는 불법 약X 사건에 구속됩니다.

이에 2집 앨범이 크게 실패하고 김태원은 교도소까지 갔다 오지만 1991년 재차 불법 약X로 구속됩니다.

하지만, 김태원은 약을 끊을 수 없었고 보다 못한 김태원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김태원을 정신병원에 가둡니다.

그곳에서 그는 ‘1년이든 2년이든 상관없으니 통기타 하나만 들고 들어가게 해달라’라고 애원했지만, ‘기타가 나무로 되어 있어 부러지면 날카로우니 안 된다’라고 하여 한 시간 가까이 실랑이를 벌입니다.

‘기타를 가지고 들어가지 못한다’라는 말에 그의 아버지는 ‘네가 여기 들어가면 너 못 볼 것 같다’라며 그의 손을 잡고 나옵니다.

그는 그때 끊어야겠다고 생각했고 가족과 아내가 자신을 바라보던 시선을 배반할 수 없었습니다.

사실 김태원은 정신병원에 입원당할 뻔합니다.

첫 번째는 학창 시절의 가출과 이탈 등의 성격상 결함으로 부모님이 김태원을 입원시키려고 했고, 두 번째는 불법 약X를 끊기 위해 강제로 입원시키려 한 것입니다.

당시 여자친구였던 아내 역시 김태원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김태원의 ‘부활’이 1986년의 ‘히야’로 인기를 모으기는 했지만, 이미 이승철은 탈퇴해서 독자적인 인기를 얻은 뒤였고 김태원은 이미 X에 찌든 폐인 상태였습니다.

누가 보더라도 재기 가능성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여자친구였던 아내는 김태원을 결코 포기하지 않고 자신이 학원 영어 수학 강사를 하면서 김태원에게 용돈을 줍니다.

결국, 그는 이런 가족과 여자친구의 사랑 때문에 스스로 불법 약X를 끊기로 결심을 하고 외진 섬으로 들어갑니다.

한 번 들어가면 밖으로 나오기 쉽지 않은 섬으로 들어가 마지막으로 가지고 있던 약병을 돌멩이를 묶어서 과감히 바다로 던졌습니다.

반드시 약을 끊고 새사람이 되겠다는 의지를 확고히 하기 위한 행동이었지만, 결국 약병을 건지기 위해 수경까지 쓰고 바다로 뛰어듭니다.

약을 찾지는 못했지만, 당시 그의 심경이 얼마나 비참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여자친구였던 아내의 지극정성은 결국 그가 약과 술을 끊게 했습니다.

그는 이후 불법 약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약을 안 하면 히트곡이 나올 확률이 10분의 1이지만 약을 할 경우 100분의 1이다. 결국 음악 때문에 약을 한다는 것은 망상이다. 요즘도 불법 사건이 많이 일어난다. 하지만 약은 장기가 아니라 뇌로 가는 것이다. 혈관을 녹이고 서서히 죽는 거다. 한 번 하면 무조건 들어간다. 그런 사람이 있는 장소에도 있으면 안 된다’

음악과 예술을 위해 약을 한다는 사람들에 대한 그의 일침입니다.

 

하지만

김태원이 오랜 좌절의 수렁에 빠져 있던 가운데, 이승철의 ‘부활’ 하차가 인기를 끌었다.

2002년에는 ‘부활’과 이승철이 14년 만에 재회했고, ‘네버엔딩 스토리’는 김태원이 KBS 가요대상 작사·작곡상을 수상하는 등 큰 인기를 얻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또 다른 큰 고통이 있었습니다.

그는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해 가족사를 직접 고백했지만, 아내가 아들, 딸을 외국으로 데리고 간다는 루머가 돌았다.

김태원이 이승철과의 갈등으로 히스테리에 빠졌다는 소문이 돌았고, 그의 아내와 아이들은 캐나다로 이주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자폐 아들 때문에 가족이 떠났다는 사실이 밝혀졌지만, 그 뒤에는 더 깊은 사연이 있었다.

당시 김태원은 아들의 자폐증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이를 불행으로 여겼다.

결국 아내는 김태원의 말에 큰 상처를 입고 아이들과 함께 해외로 떠나게 됐다.

아들이 두 살쯤 되었을 때 자폐증 진단을 받았지만 김태원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아내는 더욱 힘들어졌다.

그러다가 김태원이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데 약 10년이 걸렸고, 가족과 헤어진 후 자신의 절실한 심정을 노래로 썼는데, 그 제목이 ‘네버엔딩스토리’였다.

연인 사이의 사랑 이야기라고 오해하시는 분들이 많은데, 김태원이 아내와 아이들을 생각하며 가사를 썼습니다.

김태원은 ‘국민 할머니’라는 타이틀로 예능에서 활약했지만, 예능에서 번개 같은 이야기를 들었다.

특집 방송으로 위암 검사를 받았던 그는 초기 위암 진단을 받고 수술을 받았고, 다행히 완쾌해 정규 콘서트에서 깊은 인상을 남겼다.

2011년 위암 수술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음주를 했고, 2019년에는 패혈증을 앓았다.

그는 이날 방송에서 패혈증으로 병원에 입원한 사실을 밝히며 “죽을 때까지 술을 마시면 안 된다. “갑자기 충격에 빠졌고, 약 4개월간 생사의 갈림길에 섰습니다.”

이어 김태원은 “현재 상태는 호전되고 있는데 후유증으로 후각을 잃었다. 계절마다 향기나는 가사를 썼는데, 후각을 잃어서 우울증이 생겨서 많이 힘들었다”고 말했다.

 

최근

김태원은 가족 모두 함께 한국에서 지내며 교수로 강연과 함께 공연을 이어나가고 있습니다.

김태원의 빈번한 예능 출연을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전설답지 않게 예능에 나와서 웃음이나 사연팔이를 하지 말라는 비난인데요.

이에 대해 그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처음 아이의 병을 알았어요. 충격은 어마어마했지만 그로 인해 5,6년 동안 깊이 사색할 수 있었어요. 그러다 생각이 들었던 것이 나는 그나마 밥을 먹고 사는데 정말 어려운 가정에서 그런 아이를 만나면 얼마나 큰 지옥이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죠. 집사람과 아이들이 있는 필리핀에서도 그런 부모들을 많이 만났어요. 실제로 극단적 시도를 하는 부모들도 많아요. 색으로도 향으로도 맛으로도 표현할 수 없는 그런 상황이죠. 제가 음악을 팔아 장애인 학교를 세우겠다는 생각은 그렇게 해서 나오게 된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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