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하의 이상용은 어디에… “평생을 고생만 하며 살아오더니 결국” 최근 전해진 그의 눈물겨운 근황사를 알아가세요

뽀빠이 이상용 씨.

한편

지금은 많이 잊혀졌지만, 과거 많은 이들에게 눈물과 웃음을 선사했던 인기 프로그램 ‘우정씬’의 건강 아이콘 뽀빠이 이상용 역을 맡아 많은 사랑을 받았다.

독보적인 쇼의 진행자로 오랜 시간 동안 이러한 인기와 명성을 누렸던 만큼, 눈부신 스타의 삶을 살아온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돌이켜보면 그의 삶은 힘들고 힘든 여정이었다.

그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심장병 어린이 수술비를 횡령한 혐의에 대한 검찰 수사였다.

 

무죄가 빠르게 밝혀졌지만, 아직도 이상용이 비리를 저질렀다고 믿는 사람들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그러다 연예계에서 쫓겨나며 하루하루 비참한 삶을 살아야 했다.

이상용 씨는 힘든 시간을 보내며 이제 여든을 앞두고 있다.

 

그런

그가 최근 건강까지 악화되어 안타까운 상황에 처해 있다니, 너무 오랜 세월 동안 몸과 마음을 혹사시킨 탓인 걸까요?

하지만, 무엇보다 그를 힘들게 한 것은 바로 그가 치료해 주었던 심장병 환자들의 달라진 태도였습니다.

그간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뽀빠이 이상용 씨의 안타까운 근황 순서대로 알아보겠습니다.

뽀빠이 이상용이라 하면 그야말로 건강함의 상징이지만, 사실 그는 병약한 미숙아로 세상에 태어나자마자 부모님에 의해 생매장을 당할 정도로 험난한 어린 시절을 보내야 했습니다.

이후 장교로서 군을 제대하고 외판원이나 보험설계사 등의 일을 전전하다 방송계에 첫발을 내디게 된 이상용 씨.

기독교 방송의 진행자를 시작으로, 여러 프로그램의 진행 보조를 거쳐 마침내 운명의 프로그램인 ‘우정의 무대’에서 MC를 맡게 됩니다.

‘우정의 무대’에서 “뒤에 계신 분은 제 어머니가 확실합니다”라는 유행어를 남긴,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전 국민을 웃기고 울리던 그야말로 국민적인 사랑을 받던 대단한 인기 프로그램이었는데요.

하지만, 이 대단했던 ‘우정의 무대’는 불명예스럽게도 중도에 프로그램이 없어지게 됩니다.

지나고 보면 너무도 어처구니가 없게 말이죠.

 

 

1980년, ‘모이자 노래하자’라는 프로그램에 출연하며 한창 인기를 모아가던 이상용 씨.

그러던 어느 날 녹화장에 선생님 한 분이 어린 제자를 데리고 찾아옵니다.

“이 아이가 선천성 심장병을 앓고 있는데, 아버지는 천식으로 일을 할 수가 없고 어머니가 홀로 시장에서 장사하며 육 남매를 키우고 있다”

“수술을 안 하면 이 아이가 죽는다. 아이를 좀 살려달라”라고 말이죠.

너무나도 딱한 사연이지만, 오늘 처음 본 낯선 이의 부탁이기에 외면할 법도 한데요.

그러나, 뽀빠이 이상용 씨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알겠다. 그럼 그렇게 하자’라고 흔쾌히 허락을 합니다.

하지만, 안타까운 사연에 승낙을 한 것은 좋은데 문제는 수술비였습니다.

자그마치 1800만 원가량이 필요하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보증금 600만 원짜리 집에 살며 해당 방송 출연료가 16만 원이었던 이상용 씨가 감당하기엔 너무나도 큰 금액, 도저히 불가능한 금액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상용 씨는 덜컥 약속을 하고 학생을 병원에 입원부터 시킵니다.

 

그런

학생의 수술비를 마련하기 위해 그는 자신의 이미지를 위해 꺼렸던 야간 장사를 하기로 결정하고, 3개월치 선불금을 받고, 나머지 돈은 친구에게 빌렸다. 학생의 수술 비용을 지불할 수 있습니다.

뽀빠이 이상용은 왜 남을 돕기 위해 그토록 멀리까지 갔을까?

 

 

저는 아들 하나, 딸 하나의 어린 두 아이의 아버지입니다. 무엇보다도 어렸을 때 병들어 태어나서 생사의 고난을 겪은 기억이 있어서 이 불행한 일을 차마 무시할 수 없었나 봅니다. 상황. 학생.

다행히 그 학생의 수술은 성공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얼마 뒤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발생하는데, 이상용 씨의 선행에 감동한 학생의 아버지가 이러한 사연을 주위에 전했고, 이후 소문이 퍼져 전국의 심장병 어린이들이 이상용 씨의 집에 구름처럼 모여든 것입니다.

이를 보고 이상용 씨의 아내는 ‘우리는 수술비 반도 안 되는 액수의 전셋집에 사는데, 이제 돈도 없고 어떻게 할 거냐’라며 한숨을 쉬었습니다.

하지만, 결국에는 “아이가 죽게 생겼는데 부모 마음은 어떻겠냐”라며 이상용 씨의 뜻을 이해해 주었고, 이런 아내의 인정과 격려에 용기를 내어 이상용 씨는 합정동에 한국 어린이 보호회 사무실을 내고, 이후 16년 동안 567명의 어린이에게 새 생명을 찾아줍니다.

이후 이러한 선행에 1987년에는 국민 훈장인 동백장을 받게 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상용 씨에게 날벼락이 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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