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송 강원래 부부 결국 이렇게 되는구나… 끝내 천륜을 끊어버리게된 이들의 안타까운 근황사.. 모두가 눈물만..

김송 인생에 찾아온 세 가지 기적, 교통사고 이후 잉꼬부부로 연기하면서 살았던 과거와 남편 강원래와 불화를 극복하고 가정을 지켜낸 이야기를 털어놓았는데요.

한편

그녀의 이야기를 따라가 보겠습니다.

김송은 1972년생으로 경성여고 졸업 후 이태원 댄서들의 성지였던 ‘물나X트’에서 댄스로 이름을 날렸습니다.

강원래는 1969년생으로 경기고등학교 동창이던 구준엽과 1990년 현진영의 댄스팀 ‘와와’의 멤버로 활동하면서 유명세를 탑니다.

 

 

사실 소문난 춤꾼이던 두 사람은 나X트클럽에서 처음 만났는데 중3의 김송은 고3이던 강원래에게 첫눈에 반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성인이 되어 다시 만나 연인이 됐으며, 강원래가 군 복무 중 750통 가량의 편지를 주고받았다.

이후 김송은 박미경, 김건모의 백댄서로 활동했고, 김건모 활동 당시 ‘핑계’는 파격적이고 이국적인 스타일로 많은 화제를 모았다.

이후 김송은 1990년대 가요계 마이다스 손이었던 김창환이 이끄는 혼성그룹 ‘콜라’로 1996년 가수로 데뷔했다.

같은 해 강원래는 구준엽과 ‘클론’으로 활동을 시작했고, 이들을 데뷔시킨 사람은 김창환이었다.

먼저 ‘콜라’는 댄스로 유명한 고등학생 김송, 가수로 유명한 박준희, 댄서로 유명한 김영완으로 구성된 그룹이다. 김창환이 키운 가수들이라 많은 주목을 받았지만, 콜라의 노래는 다소 난해하고 실험적이어서 대중들에게 인기를 끌지는 못했다. 나는 무시당한다.

이 때문에 김창환의 욕심이 너무 크다는 비판이 나왔고, 특히 1집 타이틀곡 ‘무기야’의 경우 특이한 가사와 의상으로 코미디를 닮았다는 주장까지 나왔다.

이후 1997년 10월 라인업 변경과 함께 2집을 발매했으나 2집마저 실패하면서 김송의 그룹 활동은 종료됐다.

한편, 김창환의 또 다른 선택인 ‘클론’은 한국뿐만 아니라 대만에서도 큰 인기를 얻으며 양국을 오가며 바쁜 나날을 보냈다.

‘보이프렌드’ 성공 이후 김송은 강원래의 연인이라는 소식을 잠깐만 전한 바 있다.

그러나 2000년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졌다. 강원래는 오토바이 사고로 하반신 마비 진단을 받았다.

 

 

김송의 입장에서 보면 결혼을 생각할 때 강원래의 재활 기간 내내 늘 옆에 있었고, 2003년 결혼했다.

당시 사람들은 김송-강원래 부부를 세계의 지도자로 여겼고, 김송은 사랑의 힘으로 강원래의 곁을 지키려 했으나, 현실이 점점 더 힘들어지고 있다고 한다. 그녀는 장애가 있는 아들 남편과 함께 살아야 했습니다.

2000년 사고 당시 강원래의 나이는 32세로 전성기였다. 댄서와 가수로 활동한 후, 강원래는 갑자기 다리를 쓸 수 없게 되었습니다. 강원래 씨는 휠체어에 앉아 사인을 요청하는 사람들이 오면 욕설을 퍼붓고 쫓아냈는데, 싸이월드 홈페이지에 올린 댓글에 욕설과 강경 대응을 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이는 평범한 사람이 갑자기 장애를 입고 직장을 잃으며 정신적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지지자들도 많았다.

아무튼 사고를 당한 강원래도, 옆에 있던 김송도 많이 힘들었을 텐데.

하지만 이들의 결혼 생활에는 또 다른 숨겨진 문제가 있었다. 강원래는 건강할 때부터 연인 김송을 항상 바람피웠다고 한다.

사고가 아니라면 결혼을 할 수 있을지 확신이 없었던 두 사람은 사고 이후 커플이 되었지만, 속으로는 점점 감정이 희미해지고 있었다.

김송의 2011년 증언은 그들의 문제를 외부세계에 드러냈다.

 

이어

다음은 내용 중 일부입니다.

“남편 강원래가 연애할 때 ‘내가 믿는 건 내 사랑 송이와 돈밖에 없다’라고 했는데, 제대 이후부터 가수로서 정상의 자리에 서기까지 그리고 교통사고로 장애인이 되기 전까지 7년 내내 바람을 피웠습니다. 장애인이 되고, 나서도 제가 지방에 가 있는 동안 저와 친했던 동생을 집으로 불러들여 관계를 했다는 사실을 몇 년이 지나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너 때문에 내 인생 포기하고 살았는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며 고액의 위자료를 청구하며 이혼을 요구했지만, 돈을 주지 않아서 분하고 억울해 죽을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이혼한다고 해도 사람들의 시선이 두려웠고 이혼하신 부모님 밑에서 언니와 오빠도 이혼했는데 나마저 가족들에게 이혼의 상처를 안겨줄 수 없었기에 매일 이혼과 도피 죽음만 묵상하며 옥에 갇혀 있다”

이 간증 영상은 곧 삭제되었지만 당시 상당한 충격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방송에 동반 출연해 서로를 사랑하는 부부의 모습을 보여 왔는데요.

그런 강원래가 장애인이 된 이후 김송의 지인과 부적절한 행동을 했다는 사실을 몇 년이 지나 알게 되었다는 김송의 이야기는 아픈 남편을 지극정성 돌봤던 김송의 모습을 기억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분노를 일으켰고, 강원래는 인터넷 창에서 비난을 샀습니다.

또한 쇼윈도 부부로 시청자를 속였다며 불쾌하다는 여론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2013년 티비 프로그램 ‘자기야’에 출연한 구준엽이 ‘현재 강원래 김송 부부가 잘 살고 있다’라고 말했고, 2014년에는 8번의 시험관 시술 끝에 아들을 낳게 되면서 두 사람의 불화 소식은 사그라들었습니다.

그리고, 2021년 1월 간증 방송으로 유명한 ‘새롭게 하소서’에 김송은 단독으로 출연해 “그간의 불화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극복할 수 있었던 세 가지의 기적이 있었다”라며 내용을 공개했습니다.

김송은 첫 번째 인생의 기적으로 강원래가 살아서 돌아온 점을 꼽았습니다.

“사고 이후 강원래는 한 달 반 동안 의식 없이 헛소리했는데 김송은 깨어나기만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목뼈가 세 개나 부러졌는데 목을 고정하기 위해 머리에 못을 박았다며 고통 때문인지 강원래가 의식을 찾았다”라고 이야기합니다.

살아 만나면 좋겠다는 자신의 소망이 이뤄진 첫 번째 기적이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장애를 갖게 된 남편과 사는 일은 쉽지 않았다고 합니다.

영원히 휠체어를 타야 하는 강원래의 모습에 김송은 자신만만했던 마음이 사라지고 ‘난 아직 젊은데 평생 어떻게 살아야 하나’란 생각이 들자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고 밝혔습니다.

김송은 “그때 정신과를 알았으면 상담도 받고 약물 치료도 했을 텐데 그조차도 말할 수 없었다”라며 당시의 답답함을 토로했습니다.

심지어 결혼에서 벗어나 이혼하고 싶었던 적도 있는데, 속으로 혼자 끙끙 앓다 보니 위궤양이 생길 정도였다고 합니다.

당시에는 강원래와 지독하게 싸웠는데 방송에 나와서는 ‘우리 부부 행복하게 잘 살아요’라고 했다며 지옥 같던 시절을 고백했습니다.

그래서 메일 이 지옥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기도했는데 어느 날 눈을 뜨니 ‘남편의 존재가 감사함으로 다가왔다’라며 이것이 자신에게 찾아온 두 번째 기적이라고 전했습니다.

한편, 김송과 강원래 부부는 결혼 10년 동안 아이가 없었습니다.

 

결혼

후 시험관 시술을 꾸준히 받았지만 아이가 생기지 않았다고 합니다.

두 사람의 갈등이 더 극단으로 치닫던 배경에는 시험관 시술의 고통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김송은 2001년부터 시험관 시술에 도전했는데 시험관 시술을 한 번 하면 될 줄 알았는데 굉장히 아픈 과정이었고 실패하면 정신적 고통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며 경험에 대한 원망의 대상이 남편이 됐다고 털어놓았습니다.

김송은 “난 배와 엉덩이에 아픈 주사를 맞으면서 고통받고 있는데, 이렇게 아픈데 왜 도와주지 않냐”라고 삿대질에 욕을 퍼부었다고 하는데요.

 

이에

강원래는 “때려치워 누가 아이 원한대?”라고 말해서 두 사람은 시험관 시술을 중단했습니다.

그리고 포기한 지 5년이 지나서야 남편이 시험관을 다시 제안했고 총 8번의 시도 끝에 아들을 가지게 됩니다.

김송은 “남편은 기형정자였고 나는 늙은 난자에 따라 가능성이 거의 없었는데 세 번째 기적이 일어난 것”라고 전했습니다.

 

이렇게

태어난 두 사람의 아들은 올해 9살이 되었고 강원래를 닮은 눈매에 장난기가 가득한 모습으로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결국, 그녀의 가정은 아이로 인해 간극이 메워지고 두 사람은 부모로서 성장하는 모습을 방송을 통해 보여주었습니다.

과거엔 정말 힘들었고 심지어 남편 강원래의 바람으로 큰 상처를 입었지만, 기적을 겪으면서 지켜낸 두 사람의 가정에 더 이상 나쁜 루머나 문제가 없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