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세 백일섭 최근 가족들과 의절한 것도 모자라 결국, 최근 마지막 연락하던 따님마저도 외면한 안타까운 이유.

현재 백일섭은 아내와의 졸혼을 선언하였고, 가족들을 책임지며 자유로운 삶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졸혼을 하게 된 이유는 자신의 성격 때문이었습니다.

백일섭은 군인처럼 소리 지르며 성질을 부리는 성향이 있어 이로 인해 자녀들의 교육에 영향을 줄까 봐 걱정했습니다.

또한

집의 문제로 아내와의 갈등이 심화되어 결국 집을 나와야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보다 못한 딸은 중재하려는 시도도 했었지만, 결국 백일섭의 의지를 꺾을 수 없었고 결국 딸과의 관계는 악화되고 말았습니다.

 

 

이제 현재는 부부 간의 이혼과는 별개로 졸혼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데, 이는 법적인 이혼 절차를 밟는 것보다는 부부가 서로 따로 지내며 더 이상 혼인 관계를 유지하지 않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이러한 표현은 결혼을 마치고 나온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입장에 따라서는 이혼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일 수도 있지만, 졸혼을 한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큰 차이가 있다고 합니다.

백일섭은 1944년에 전남 여수에서 태어났으며 어린 시절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의 이혼으로부터 시작된 어려운 경험을 겪었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9살 때 그를 두고 집을 떠나 이혼을 결정하게 되었는데, 백일섭은 어머니가 다시 돌아올 거라고 생각하며 ‘잘 가’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고, 아버지는 새어머니를 맞이하며 새로운 가정을 형성했습니다.

백일섭은 새어머니들과의 관계에서 구박과 고통을 겪으면서 마음의 상처와 혼란을 갖게 되었습니다.

고등학교에 진학한 후에도 어려운 상황은 계속되었으며 가족 내의 불화와 불안 속에서 자라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어려운 경험을 겪으면서도 백일섭은 고등학교 마치고 친엄마로부터 온 연락을 받아 서울로 찾아가게 됩니다.

아버지는 여러 번의 해외 출장으로 집을 비울 때도 있었고, 그로 인해 가족 간의 결속이 더욱 약해지는 시기도 있었습니다.

고향을 떠나는 결정을 내리게 되자 백일섭은 고향에 대한 미련은 없었지만 떠남을 생각하며 한두 시간 동안 울며 집을 떠났습니다.

그는 여수에서 석탄 기차를 타고 약 14시간을 달려 서울에 도착했는데 여행의 끝에서 어머니를 만났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도 이미 새 아버지와 재혼한 상태였습니다.

여수에서의 상처와 서울에서의 상처로 인해 백일섭은 혼란한 성장기를 보내게 되었습니다.

성인이 된 후 1965년에 백일섭은 KBS의 공채 탤런트로 연기의 길에 발을 딛게 됩니다.

데뷔 후에도 무명을 거치지 않고 주연극 연기자로서 성공을 거두는데요.

어느 날 갑자기 방송국의 문화부장관으로부터 연락이 옵니다.

전화를 받은 방송국 관계자는 백일섭에게 ‘청와대에서 무슨 일을 잘못한 게 없느냐’라고 물어보며 문화부 장관이 전화를 했다고 알려줍니다.

백일섭은 그때까지 까닭을 모르겠다고 말했습니다.

 

 

이 사건 이후 드라마 녹화 중인 어느 날 백일섭은 점심때 청와대 비서관으로부터 전화를 받게 됩니다.

비서관은 2시까지 방송국 현관으로 나와달라고 요청했는데 백일섭은 녹화 중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비서관은 웃으며 ‘오시는 게 좋을 겁니다’라고 전해주었습니다.

백일섭은 이 제안을 거절할 수 없어서 결국 양복을 입고 현관으로 나가게 되었습니다.

 

방송국

앞에는 백일섭을 태운 지프가 있었다.

이로써 백일섭은 이유도 모른 채 생애 처음으로 청와대에 입성하게 됐다.

백일섭은 청와대에 도착하자마자 육영수 여사와 함께 박 대통령이 기다리고 있는 식당으로 향했다.

박정희 당시 대통령의 아들인 박지만 씨가 백일섭, 홍창식, 윤영주를 좋아한다는 소식을 듣고 초청을 받았다.

백일섭은 TV에서 자주 보던 키 작은 인물이 반갑게 맞아 악수를 제안했지만, 긴장한 듯 얼어붙은 듯 팔짱을 끼고 대통령 내외와 악수를 나눴다.

육영수 부인은 백일섭에게 “평소엔 국수를 먹지만 오늘은 특별히 스테이크를 준비했다”며 음식을 권했다.

백일섭이 이 전 대통령을 만났다는 사실은 알려진 바 있다.

그러나 백일섭은 과거 재정 문제로 여러 차례 사기를 당해 총액 9억원이 넘는 돈을 받지 못했다.

백일섭은 술과 사람을 좋아하지만, 남에게 상처를 주기보다는 손해를 보는 쪽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마침 백일섭이 경기도의 한 골프장에서 최씨와 라운딩을 하게 됐다.

두 사람은 분당에 거주하며 골프에 대한 열정을 공유하고 있어 근처 골프 연습장에서 자주 만난다.

그는 주변 사람들에게 서울대 법학사학위를 졸업하고 사법시험에 최고 성적으로 합격했으며 박정희 대통령 밑에서 청와대 경제비서관을 지냈다고 말했다.

백일섭은 과거 청와대를 방문했을 때도 청와대에서 검사로 일했다고 거짓말을 하고 초대손님들의 신상을 확인했다.

그러나 백일섭은 최씨의 주장을 의심하며 당시라면 그런 짓을 했을 가능성이 낮다고 말했다.

최씨는 남들보다 먼저 법조계에 입문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백일섭이 청와대를 방문했을 당시 최씨의 나이는 고작 16세였다.

게다가 최씨는 실제로 국정원 직원들을 4층까지 불러 자신이 투옥돼 고문을 당했고, 아내를 잃고 혼자 살았다는 이야기까지 했다.

이 사실을 들은 백일섭은 최씨의 주장을 신뢰하기 시작한다.

최 변호사는 변호사 시험에 합격해 변호사 경력을 쌓았으며, 그 덕분에 법조계에 대한 폭넓은 지식을 갖고 있었다.

현재 유명 로펌에서 컨설팅 변호사로 일하고 있는 그는 백일섭에게 인천 검단 구지가와 경기 용인 아파트에 투자하면 두 배의 이익을 얻을 수 있다는 유혹을 줬고, 백일섭으로부터 두 차례에 걸쳐 2억 원을 받았다. 섭이랑 1억 2번. 총 5억 원을 갈취했습니다.

 

 

두 사람은 관계가 발전하면서 함께 골프장에 가거나, 서로 술자리를 자유롭게 권유하며 돈독한 우정을 쌓아왔다.

 

한편

백일섭은 최 씨에게 돈을 빌려줄 때에도 흔한 차용증 하나 받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최 씨는 받아간 5억 원을 개인 용도로 사용하게 되었으며 이로 인해 피해자가 늘어나며 결국 경찰에 붙잡히게 되었습니다.

나중에 조사를 해보니 최 씨는 받아간 돈을 투자한 흔적이 전혀 없었습니다.

이에 백일섭은 분노하지만 5억 원의 대가로 그에게 상응하는 가치의 부동산을 받기로 합의하여 사건을 해결하게 되었습니다.

백일섭은 부동산 시세가 좋다면 손해 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이 문제를 부업으로 삼기로 결정했습니다.

비록 최 씨와의 인연은 끝나기는 했지만, 경찰서에서 묶인 최 씨를 보면서 ‘안 됐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백일섭은 이미 다른 피해자들의 고소권으로 인해 최 씨가 죄를 위한 처벌을 받을 것임을 이해하고, 자신으로 인한 처벌은 원치 않는다며 최 씨를 용서해 줍니다.

또한, 백일섭은 한때 영화사를 차려서 일본 대중문화 수입이 허용되지 않았던 시절에 일본 애니메이션을 수입한 적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홍콩 작품으로 소개되었던 애니메이션이 사실은 일본 작품이었던 사실이 밝혀지면서 백일섭의 회사는 영화사 등록을 취소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집을 나와서 작은 오피스텔에 들어가기까지 하는데요.

이후로는 두 달 동안 술만을 마시며 혼자 밖으로 나가 음식을 사 먹는 등 초라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이러한 자신의 모을 보며 점점 집에서 해먹는 것으로 만족해지게 되었고 현재 그런 상황에 익숙해져 괜찮다고 조금 밝히기도 했습니다.

게다가 몇 년 전부터는 디스크 협착증으로 인해 허리 수술을 두 번이나 받았고 무릎 수술까지 받았다 보니 계단을 오르내리는 것이 상당히 힘들어진 상태라고 합니다.

현재 80세에 이르러 불편한 몸 상태에서도 그동안 해보지 않았던 빨래, 청소, 혼밥에 설거지까지 모두 혼자 하게 되면서 아내가 얼마나 힘들었을지를 이해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어릴

적에는 부모님의 도움으로 혼란과 방황 속에서 성장의 기간을 보냈으며, 성인이 되어 배우로서 인기를 얻으며 청와대에까지 초대를 받는 스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을 너무 믿고 여러 사업에 손을 댔다가 큰 손실을 입게 되었고 이로 인해 가족들과 멀어져 팔순이 된 나이에 홀로 비참하게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다른 아픔을 더 겪지 않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