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누구도 기억해주길 바라지 않아요.. “가수 김종민의 눈물겨운 과거..” 모두가 그의 사연에 눈물 흘린 안타까운 이유..

5일 방송된 ‘미운 우리 새끼’에서는 김종민이 추석을 맞아 성묘를 간 모습이 그려졌는데 이날 1년 만에 아버지를 찾아왔다는 김종민은 ‘아버지가 사고로 돌아가셨다’라며 다음과 같은 고백을 했습니다.

“아버지가 원래 택시 운전을 하시다가 몸이 안 좋으셔서 그만두시고 횟집을 하셨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돌아가셨다고 연락이 왔는데 알고 보니 밀물 때 주차하시다가 차가 빠졌다고 하더라. 그렇게 아버지는 문을 못 열어서 너무 허무하게 돌아가셨다. 얼마나 고통스러우셨을지 그게 트라우마가 됐다”라고 했습니다.

사실

김종민은 늘 변함없는 미소와 선량한 웃음으로 활발한 활동을 해왔기 때문에 이 정도의 고통을 겪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화려한 외모 뒤에 감춰진 종민은 사람들이 전혀 모르는 슬픈 비극에 물들어 있었다.

어느 순간 뇌진탕을 당해 이틀 동안 혼수상태에 빠졌고, 돈을 벌어야 하는 이유에 대해 부모를 원망해야 했다. 최악의 위기 속에서 시청자들은 그를 ‘암’이라고 불렀고, 그의 퇴진 캠페인까지 벌였다. “내가 인생을 잘못 살았나?” 은퇴까지 고려했다는 방송인 김종민의 실제 생활에 대해 전하고 싶다. 그는 “인생이 그렇게 힘든 거야?”라고 묻곤 했지만 절대 밝히고 싶지 않았다.

1979년 서울에서 태어난 김종민은 초등학교 시절 수줍음이 많고 말이 많지 않아 ‘얼간이’라는 별명이 있었지만, 초등학교 5학년 때 무대에서 사랑에 빠진 소녀가 춤추는 모습을 목격했다. “나도 그렇게 춤추고 싶다”고 하더군요. 바보 같다고 생각한 그는 그날부터 춤을 추기 시작했다.

 

한편

이 무렵, 친구들과 놀다가 늘 장난과 점프를 좋아하던 김종민은 어느 날 늘 뛰어오던 곳에서 뛰어내렸지만, 같은 날 우연히 뒤를 돌아보다가 옥상에서 추락하고 말았다. 심각한 부상을 입거나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당시 이번 사고가 얼마나 심각한지, 사고 직후 상태가 너무 나빠서 이틀 동안 혼수상태에 빠져 가족 중 일부가 차를 포기했지만 어쩌다 깨어났을까.

 

 

그러나 사고의 후유증이 너무 커서 사고 이전에도 약간 장난꾸러기였지만 우등생이었다. 어린 나이에 사고 이후 삶의 의욕을 잃고 학업을 완전히 포기했다. 천국에 가면 공부할 것도 없고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을 거예요.” 그래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멍하니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습니다.

사고 이후 늘 무력했던 그에게 해결책은 단 하나, 바로 춤이었다. 당시 김종민은 춤을 추는 동안 세상의 모든 근심 걱정을 다 잊고 춤에 푹 빠져들 정도로 행복했다.

그러나 그 당시 춤을 추고 있었기 때문에 학교도 가지 않고 수업도 빼먹어서 처음엔 이해해주던 아버지마저 걱정하기 시작했고, 어느 날 아버지는 김종민에게 전화를 걸어 “아들아. , 아직 학교에 가야 해요.” 그런데 그 전화가 아버지와의 마지막 통화가 됐다.

내가 고등학교 2학년이 되어 춤에 푹 빠졌을 때, 아버지는 20년 넘게 택시 운전사 생활을 그만두고 해변에 횟집을 열 준비를 하고 계셨는데, “이제 내가 차리겠다”고 하셨다. 횟집.” 물이 들어올 생각도 하지 못하고 만조 때 주차를 했다가 추락한 것입니다. 나는 결국 내 자리에서 죽었습니다.

그러던 중 그 차에는 아버지뿐만 아니라 삼촌도 타고 있었는데, 삼촌이 운이 좋게 나와서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지만 수압이 너무 강해서 아버지를 구하지 못했습니다.

 

이와

관련해 김종민이 고백하길, “내가 고등학교 2학년 때 아버지가 충남 서산에 내려갔다가 밀물에 휩쓸려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항상 장난을 좋아하시고 농담을 즐기며 유쾌하셨던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셨다고 하자 당시 나는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때 내가 살아온 인생에 울었던 것 중에 가장 많이 울었었고 또한 눈으로 확인하기 전까지는 모든 게 거짓말 같고, 꿈을 꾸는 것 같았으며 심지어 어머니가 직접 현장을 확인하고 오셨는데도 나는 믿고 싶지 않아서 그랬는지 무엇 때문인지 몰라도 아버지의 소식을 계속 안 믿었던 것 같다”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아버지를 떠나보낸 뒤로는 너무나도 힘들어 하루라도 잊고 싶은 마음에 이때부터 김종민은 그저 춤에만 몰두하게 되는데, 당시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하루 종일 연습실에서 살다시피 하며 한 동작을 익히기 위해 5~6시간씩 연습을 하며 머리카락이 땀에 흠뻑 젖다 못해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게 보일 정도였다고 했습니다.

 

 

당시에는 춤에 모든 에너지를 쏟아 붓다 보니 끝나고 돌아가는 길에 지하철을 타면 서 있을 힘조차 없어서 주저앉았다고 했으며, 그래도 이런 노력 덕분인지 이후 그의 춤 실력이 소문이 나더니 당시 최고의 댄스 전문팀 프렌즈에 들어가게 됩니다.

하지만, 이때 처음 받은 월급이 고작 4만 원뿐이라 아버지를 대신해 가장 노릇을 해야 했던 그는 생계를 위해서는 춤만 출 게 아니라, 다른 일도 병행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래서 당시 공사장도 가고 달력공장, 시계공장, 웨이터 등 몸으로 할 수 있는 일은 가리지 않고 악착같이 돈을 벌어야만 했습니다.

이와 관련해 김종민이 고백하길,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는 아무 생각 없이 매일 놀러만 다니다가 아버지가 딱 돌아가시자 내 다리가 땅에 박혀서 못 움직이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주의를 봤는데 엄마는 일을 안 하고 있지, 누나는 대학생이지, 동생은 어리지 생계고 뭐고 아무 대책이 없었다. 결국 이때 내가 든 생각이 이 집에서 돈 벌 사람은 나뿐이구나. 내가 가장이구나라는 걸 깨달았고, 그런데 공부는 이미 오래전에 놔버려서 좋은 직장에 취직한다는 건 힘들고 내가 가장 할 줄 아는 게 뭐가 있을까 생각을 해봤더니, 춤밖에 없더라. 그래서 이후 안 해본 아르바이트가 없을 정도로 정말 악착같이 돈을 벌었는데, 그런데 지금 생각해도 엄마에게는 그때 돈을 벌면 집에 갖다 주는 게 아니라, 오롯이 나한테 다 썼다. 당시 아니라 오롯이 나한테 다 썼다. 당시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시고 마음이 너무 다쳤기 때문에 내 마음의 상처 치유가 먼저라고 생각했다. 일단 나부터 살고 봐야 하니까. 그래서 이때 놀러도 많이 다니고 버는 대로 내가 다 썼다. 물론 철이 없었던 것도 맞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솔직히 원망도 많이 했다. 내가 왜 이 나이에 돈을 벌어야 할까. 나도 아직 학생인데 왜 우리 부모는 부자가 아닌가라면서 피해의식이 심했었다. 그렇게 엇나가던 시절 엄마가 나에게 돈 좀 달라고 했었는데 거기에 또 원망스럽더라. 그래서 내가 없다고 하고 오히려 엄마에게 용돈을 요구했다. 아무튼 지금 돌이켜봐도 정말 부끄럽다. 그럼에도 그때 고등학생이었던 내가 감당하기에는 인생이 너무 무거워서 그랬던 것 같다”라고 했습니다.

 

아무튼

이후 월급 4만 원을 받아가며 춤과 일을 병행하던 그는 1998년 당대 최고의 인기를 누렸던 가수 엄정화의 전담 댄서로 비중 있게 활약하더니, 굉장히 드물게 백댄서가 주목을 받으면서 4만 원 받던 월급이 120만 원까지 오르는 기적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래서 이때 처음으로 어머니께 생활비를 하라며 월급의 반인 60만 원을 드릴 수 있었고, 또한 그가 가수가 아닌 백 댄서인데도 불구하고, 당시 워낙에 잘생긴 외모와 화려한 춤 실력으로 웬만한 연예인보다 인기가 더 많아서 수많은 팬들이 그의 집 앞에서 기다릴 정도로 호화로운 인기를 누리게 됩니다.

 

 

이와 관련해 비슷한 시기에 댄서로 활동을 했던 가수 휘성의 고백에 따르면, “당시 김종민이 댄서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연예인급의 엄청난 인기를 누리는 걸 보고 어린 마음에 자신도 꼭 김종민처럼 멋있는 댄서가 되겠다고 다짐을 했었는데 하지만 요즘 김종민의 모습을 보면 그때와는 너무 다른 이미지라 영혼이 바뀐 건 아닌지 생각이 들 정도로 신기하다”라고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