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년간의 투병 끝내 안타까운 상황.. “하룻밤 사이 전해진 이상민 어머니의 눈물겨운 소식..” 그의 사연에 모두가 오열한 이유가..

‘룰라’ 출신 방송인 이상민이 모친상을 당했습니다.

“엄마가 점점 안 좋아지는 걸 6년째 보고 있다. 건강이 더 많이 안 좋아졌다. 지금은 나도 못 알아보시고 말도 못 하신다. 악착같이 강했던 엄마였는데 아프신 상황보다 엄마 얼굴 보는 게 더 힘든 게 지금은 차마 볼 수 없을 정도로 콧줄 껴서 의료기기에 의존하고 있다. 또한 현재 엄마는 본인이 아픈 걸 이해 못 하는 섬망 증세로 일시적으로 오는 치매 상태다. 하루는 병원에서 엄마가 행방불명된 적도 있었는데, 밤사이 아무도 모르게 새벽에 사라지셨고 아무리 전화를 해도 안 받더라. 아침이 돼서야 겨우 엄마와 전화가 됐는데 그때 나보고 하시는 말씀이 ‘집인데 왜 안 오냐. 아침에 중국집 열어야 한다고 하시더라’ 알고 보니 내가 초등학교 때 어머니가 망원동에서 중국집을 하셨는데 추억이 있는 동네로 가신 것이었다. 그날 택시 기사님의 도움으로 겨우 다시 병원에 돌아오셨다”라고 어머니에 대해 전한 이상민.

한때는

‘미우새’에도 나와 방송 활동을 했던 어머니.

안타깝게도 뇌출혈과 합병증으로 6년째 병상에 누워계시다 상태가 악화되어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이날 이상민에게 ‘만약 모친이 기적적으로 회복한다면 어떨지’ 묻자 그가 대답하길, “불과 3주 전 아예 못 알아보고 누워만 계시던 어머니에게 평소처럼 인사를 했더니, 기적처럼 어머니도 손을 흔들고 인사를 하셨다. 순간 엄마가 누워서 아무것도 못해도 내 얘기를 듣고 있구나 싶었다. 그런데 이게 혹시 마지막 인사일까 너무 겁이 났다. 그래서 사실 현재 걱정이 너무 많다.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일이 닥치니까 엄마와의 이별이 너무 두렵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만약 엄마가 회복한다면 어떤 말을 전하고 싶냐’라고 묻자 이에 이상민은 “엄마가 알아듣는다면 그냥 사랑해라고 말하고 싶다. 정말 많이 못했던 이야기다. 처음 사랑한다고 말한 게 엄마를 목욕시켜 줄 때였다”라고 털어놓았습니다.

또한 이날 이상민은 김종민 이머니와 함께 성묘길로 향하며 사고로 일찍 세상을 떠난 아버지와의 추억을 떠올리는 그들과 대화를 하다 다음과 같이 고백하게 됩니다.

“그런 기억이라도 있는 니가 부럽다. 난 아빠와 어떤 기억도 없다. 아빠와의 기억은 사진밖에 없다. 우리 집은 아빠가 가끔 오는 집이었다. 나의 어린 시절 기억에 대해서는 안타깝다고 해야 하나. 엄마가 아빠와 나랑 엄마 사진을 합성해서 세 식구의 가족사진을 액자에 넣어두셨다. 그런데 막상 셋이 함께 있었던 적은 없었고 엄마가 함께 있던 시간을 갖고 싶으셨던 것이다. 하지만 아빠가 일찍 돌아가셔서 그럴 수 없었고 그래서 나는 아빠의 존재에 대해 크게 생각해 본 적이 없으며 아빠의 빈자리를 아예 모른다. 그러다 유년기 때 친구들이 나의 이런 모습이 안타깝다며 아버지의 산소를 함께 찾자고 했고 그래서 엄마에게 아버지의 산소 위치를 처음으로 물어봤는데 당시 일산의 한 공원묘지였다. 그렇게 기차를 타고 가서 아버지의 묘를 찾았는데 그런데 비석에 내 이름이 없었다. 그때 내가 한창 방황할 때인 중3에서 고1로 올라갈 때였는데 못으로 내 이름을 적었었다”라고 말해 먹먹하게 했습니다.

이처럼 이상민이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없는 이유로는 훗날 그가 밝히길, “어머니가 아버지의 본처가 아니다. 보니 자신도 혼외정사로 나온 사생아”라고 했으며, 그래서 어린 시절부터 생계가 무척이나 어려워 어머니가 많은 고생을 하셨다고 했습니다.

심지어 그가 태어났을 때는 가난한 형편으로 인해 호적에도 등록되지 못해 2년간 이름도 없이 ‘애기’라고 불렸다고 밝히기도 했으며, 아무튼 이후 어머니가 중국집을 운영하시다가 이상민이 중학교 3학년 때부터는 보험회사에 취직해 불과 1~2년 만에 보험왕도 하시고 영업소 소장까지 하실 정도로 일에 매달리셨다고 했습니다.

한편, 학창 시절부터 공부가 너무 싫고 노는 걸 좋아했던 이상민은 당시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며 매일 춤만 추고 다녔고, 그러다 자신이 노는 게 장점이니까 이걸 목표로 삼아 가수가 되어 보자라는 생각을 하면서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가수가 되기 위해 데모 테이프를 녹음해서 무작정 기획사 오디션을 보러 다니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이상민은 가수가 되기 위하여 신정환과 함께 경기도 팔당의 연습실에서 1년간 연습을 하게 되는데 하지만 당시 돈도 없고 빽도 없었던 그에게 기회가 있을 리 만무했고 그래서 결국 그는 연예계 관계자들이 많이 오는 클럽에 일부러 가거나 직접 데모 테이프를 제작해서 기획사를 방문하곤 했었습니다.

이와 관련해 이상민이 고백하길, “당시 내가 얼마나 절박했냐면 기획사 대표들이나 매니저들이 쉬는 공간 안에 일부러 거울을 붙여놓고 춤 연습을 했었다. 이제 와서 생각하면 좀 창피하기도 하지만 당시에는 정말 절박하게 괜히 그분들 앞에서 춤을 추 죽고 그랬다. 그러다가 명함을 받고 ‘룰라’로 데뷔하게 된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마침내 그룹 ‘룰라’로 데뷔한 이상민은 1995년 ‘날개 잃은 천사’로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게 되는데 한편, ‘룰라’의 ‘날개 잃은 천사’와 관련된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는 게 당시에는 김건모의 ‘잘못된 만남’으로 대표되는 빠른 리듬의 음악이 대세다 보니 사실 처음에는 ‘룰라’의 타이틀곡으로 ‘나에게 잃은 천사’에 대한 반대 의견이 속출했지만, 이때 이상민이 반드시 ‘이 곡으로 가야 한다. 이게 룰라의 색깔이다’라고 끝내 설득했다고 했습니다.

그 결과 전국의 음반 공장이 ‘룰라’의 앨범만을 찍어내며 다른 가수들이 활동을 미루게 됐을 정도로 대성공을 이루었고, 아울러 가요톱 텐에서 혼성 그룹으로는 유일하게 한 해 두 번 골든컵을 수상하고 그해 서울가요 대상과 SBS 가요 대상을 수상할 정도로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미 다음 앨범인 세 번째 앨범에서는 타이틀곡을 표절했다는 비난을 받으며 활동을 중단했다. 이 사건으로 큰 충격을 받은 이상민은 해서는 안 될 선택을 했고, 이때 찾아온 탁재훈이 주머니에서 1000원을 꺼내어, 당첨금을 꺼내 보여주며 “이게 내 인생인데 왜 이러는 거지?”라고 위로해줬어요.

그러나 이에 대해 이상민은 2015년 ‘호박씨’에서 “당시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은 아니지만 너무 화가 나고 화가 나서 유리창을 깨뜨렸는데, 매니저님이 그랬다”고 폭로했다. 오해하고 왜곡됐다”

어찌됐든 ‘룰라’로 지속적인 사랑을 받은 그는 잠시 ‘룰라’ 활동을 중단하고 1999년부터 제작에 돌입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디바’, ‘샵’, ‘컨트리 꼬코’, ‘샤크라’ 등의 앨범을 프로듀싱했다. 그는 앨범 프로듀싱 외에도 많은 곡을 작사, 작곡했다. 이에 비해 1990년대 후반에는 지금보다 합의가 철저하지 않았음에도 저작권료로 한 달에 1500만원 정도를 벌었다고 한다.

게다가 당시 삼성그룹 영상사업부는 이상민에게 계약금 15억 원, 연봉 5억 원을 주고 종합 프로듀서로 영입해 달라는 연락까지 닿았다.

사실 지금 기준으로도 엄청난 금액이지만 당시 물가를 생각하면 정말 큰 금액이지만, 이상민은 늘 그 제안을 거절했다고 말해 주변인들의 안타까움을 자아냈고, 농담이 아니고 만약 그가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면, 그들이 그것에 전념했다면 회사는 현재의 주요 기획사 세 곳만큼 성장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아무튼 1999년의 성공을 바탕으로 2000년 자신의 회사인 ‘상마인드’를 설립한 뒤, 청담동에 당시 명품 브랜드 사업을 위해 건물 전체를 임대했고, 오늘날의 대형 연예기획사처럼 음악 제작뿐만 아니라, 의상제작실과 연습실도 한 건물에 위치해있습니다. 그것을 구현하고 돈을 버십시오.

당시 이상민의 성공은 JYP 본사가 9억 원, 이수만이 길 건너편 SM을 20억 원에 샀을 때 이상민의 자산이 48억 원에 달했다는 것이다. 이상민은 룰라로 시작해 2000년대 초반까지 성공한 사업가로 엄청난 돈을 벌며 부러운 재벌답게 행복한 삶을 살며 성공의 길을 걷고 있었다.

그러나 사업 확장에 대한 잘못된 열망, 자금 관리 부족, 그에 따른 모든 가수의 실패로 인해 이상민의 삶은 서서히 악화되기 시작했고 그 사이에 그는 관심을 돌렸다. 원래 음악 사업을 접고 2004년부터 종합 격투기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식사를 할 수 있는 “Gimme Five” 레스토랑이 오픈됩니다. 당시 이상민이 오픈한 김미파이브 레스토랑은 약 1,000평 규모의 부지에 1,200명을 동시에 수용할 수 있는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초대형 레스토랑이었으며, 투자금액은 12.7원이었다. 10억. 그러나 리모델링 단계에서 주주들 사이의 의견 충돌로 결국 이상민 씨가 모든 식당을 인수하게 됐다. 상황을 극복하고 떠나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상민이 떠난 식당에서 사고가 발생해 선수 중 한 명이 몸싸움을 하던 중 숨졌다.실제로 그 당시 이미 회사를 떠났지만 식당의 얼굴이었던 이상민은 , 상당한 금액의 보상금을 지불해야했고 경찰에 신고되었습니다. 이상민의 삶은 현재 진행 중인 수사를 비롯해 음악계와 요식업계에서 잇따른 차질을 겪으면서 악화되기 시작한다.

 

그러다

2005년 11월 2일 그렇게 잘 나갔던 그가 최종부도 처리를 하면서 69억 8000만 원이라는 엄청난 빚더미에 앉으며, 이때부터 빚쟁이들에게 쫓기는 신세가 되게 되는데 훗날 그가 당시의 상황을 설명하길, “막장 드라마에 나올 만한 사람들이 사무실 문을 뻥펑 차고 들어오면서 ‘이상민 어딨어’ 하고 소리를 지르는데 그야말로 하루하루가 악몽 같고 지옥 같았다”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현금 48억을 손에 쥐고 있던 이상민은 당시 20여 일을 차 안에서 이온 음료만 마시고 버텼다고 하며 참고로 이때에 JYP엔터테인먼트 회사의 가치가 9억이었다고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