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다시금 하늘에 만나는거다…” 70세 배우 양희경의 눈물겨운 최근 전달통에 모두가 슬피 마음을 다잡았습니다.

양희경은 1954년에 서울에서 태어났습니다.

 

양희경 그녀는

어릴 적부터 심할 정도로 혼란스러운 삶을 살아야 했는데요.

아버지는 이북 출신으로 서북청년 사건 때 진남포에서 단신 남하한 후 육사 4기 포병장교를 거쳐 미국 유학까지 다녀온 엘리트 군인이었고, 어머니는 서울예대 성악과 출신의 의상 디자이너였습니다.

양희경의 가정은 유복했지만, 그녀가 초등학교 3학년 때 아버지가 그만 외도를 하게 되는데요.

아버지가 바람이 나는 바람에 어머니는 남편에게 화가 나서 친정으로 가버리게 되었는데, 어머니가 친정에 간 사이에 아버지는 어머니의 도장을 몰래 가져다 이혼 수속을 해버리고 맙니다.

외도를 한 것도 모자라 상대의 동의도 구하지 않고 무단으로 서류에 도장까지 찍었다니, 양희경의 아버지는 그렇게 모질고 악한 사람이었고, 요즘 시대였으면 중범죄로 강력 처벌까지 받을 만한 사안이었을 텐데요.

어머니가 집을 나간 이후 집에는 곧장 계모가 들어오게 됩니다.

 

 

양희경이 고작 3학년이었고, 양희은이 5학년 두 자매가 모두 어린이였던 그때 아버지가 그러는 모습을 본 양희경은 아버지에게 크게 실망하고, 엄청 원망을 하게 되는데요.

양희경은 후에 39살이 되어서야 아버지가 이해가 되더라고 밝혔는데, ‘지나고 보니 아버지가 바람났던 서른다섯은 남자가 한창 철없을 나이인 것 같다’라고 털어놨습니다.

 

언니 양희은 역시

아버지의 불륜으로 인해 사랑을 믿지 않게 됐고, 그녀가 한참 동안 결혼할 생각이 없다가 뒤늦게 결혼을 한 것도 아버지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하는데요.

심지어 그녀는 사랑을 불신해서 맞선을 보고 와도 맞선 자리가 너무 불편하고, 힘든 바람에 체하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그나마 새로 들어온 계모가 친엄마처럼 아이들을 대해줬으면 나았을 테지만, 양희경의 새어머니는 당시 양희경과 양희은을 상당히 핍박하기까지 했다는데요.

보통 계모라도 남편의 자식들에게 자상하게 대해주는 스타일이 있는 반면, 양희경의 새어머니는 아주 무섭게 아이들을 구박하고 나무라는 스타일이었습니다.

어린 나이에 계모 밑에서 한없이 구박을 당하던 양희경은 당시 스트레스가 너무나 커서 항상 먹은 밥이 제대로 소화가 되지 않는 소화 불량에 시달려야 했는데요.

성인도 아닌 어린이가 소화 불량이라니 도대체 스트레스가 얼마나 컸길래, 그렇게 양희경은 어린 시절부터 의지할 사람은 언니밖에 없이 고통스럽게 자라게 됩니다.

하지만 새어머니와 결혼한 아버지는 그만 2년이 지난 후 육군 대령 예편 이후 중병에 걸리게 되면서, 39세라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게 되는데요.

양희은과 양희경에게는 양희정이라는 여동생이 한 명 또 있는데, 그렇게 아버지는 세 딸을 남기고 떠나시게 되면서 가정은 일순간에 풍비박산이 나버렸고, 세 자매는 다시 자신들을 낳아준 어머니에게로 보내졌지만 집안의 가장 역할을 해야 하는 아버지가 안 계시는 바람에 세 자매와 어머니는 그때부터 극심한 가난을 겪으며 빈털터리로 살아가게 됩니다.

 

 

그때 어머니는 자식들을 먹여 살리고자 사업을 버리시게 되는데, 어머니는 디자이너셨기 때문에 사업적인 마인드가 없었던 분이셔서 착한 사람과 나쁜 사람을 잘 구별할 줄 모르시고, 남의 말을 너무 다 믿다가 그만 사업은 쫄딱 망하게 됩니다.

게다가 당시 양희은이 고3이었던 무렵에 어머니가 뒷보증을 써준 친구가 야반도주하면서 빚더미에 오르게 된 뒤, 얼마 안 가 어머니가 운영하시던 양장점에 불까지 나면서 네 식구가 거리에 나앉게 되는데요.

훗날 양희은은 당시를 회상하길 ‘어머니는 너무 우아한 스타일이라 경영 마인드라든지, 보증 서면 안 된다라든지 그런 게 없어서 아마 우아하게 도장을 찍었을 것’라고 말했습니다.

그렇게 양희경의 가정은 완벽히 파산하게 되었고, 집에는 빚쟁이들이 수시로 들이닥치며 식구들을 공포에 떨게 했는데요.

당시 어머니 역시 빚쟁이들이 너무 자주 오는 바람에 많은 충격을 받으셨고, 그 충격으로 한 번은 쓰러지기까지 하셨다고 합니다.

또한 언니 양희은은 집 두 채 가격의 빚을 지며 그때부터 처녀 가장이 되게 되는데, 그렇게 연이어 악재가 이어지자 양희은은 가수 송창식을 찾아가 노래를 시켜달라고 부탁했고, 딱한 사정을 들은 송창식은 당시 노래를 부르던 클럽에서 자기 타임의 10분을 양희은에게 내주게 됩니다.

양희은은 내일부터 일하러 나오라는 사장 이종환의 말에 첫날부터 월급 가불을 해달라고 요청하게 되는데요.

당시 월급쟁이 월급이 1만 5천 원 하던 시절 양희은은 4만 원을 가불 받아 일수쟁이들에게 갖다 바쳤고, 이후 모든 스테이지에 펑크 난 무대를 채워주러 혹독하게 다니게 됩니다.

당시 송창식은 자신이 누군가를 추천한 건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고 하는데요.

 

 

양희은은 원래는 겁이 많고 여린 성격이었지만, 집안의 실질적인 가장 노릇을 하다 보니 남들 앞에서는 강한 척을 해야 했고, 그것이 지금 우리가 브라운관에서 보는 양희은의 남자 같은 성격이 만들어진 계기가 되었다고 합니다.

언니 양희은이 그렇게 가정에 아버지 역할을 하러 다닌 사이 집안 살림은 모두 동생 양희경이 책임져야 했는데요.

그녀는 매일 집에서 밥을 하고 빨래를 하는 날들이 이어졌는데, 당시 언니 양희은은 늘 청바지만 입고 활동했지만 사실 그렇게 늘 청바지를 입고 통기타를 쳤던 건 그러고 싶어서 그랬던 게 아니었습니다.

사실 당시는 여성들이 청바지가 아닌 미니스커트가 유행하던 시절이었지만, 언니 양희은은 돈이 없어 누구한테 받은 청바지 한 벌을 주구장창 입고 다녔고, 그때 양희경은 언니의 청바지를 항상 빨아주고 말려주는 역할을 도맡아서 했던 것이었는데요.

 

양희은은 그렇게

동생 덕분에 늘 같은 청바지를 입고 나갔다가, 집에 오면 동생이 빨아주고 말려주기까지 해서 어쩌다 보니 70년대 통기타와 청바지의 상징적인 인물이 될 수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양희경도 양희은 못지않게 노래를 잘하기로 유명한데, 왜 그녀는 언니처럼 가수가 되지 않았을까요.

언니 양희은은 노래를 부르며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던 당시 어느 날, 가족들에게 공부를 하러 미국으로 떠나겠다고 선언하게 되는데요.

양희은은 당시 명동에 나가 노래를 부르던 시절이었는데, 그래서 동생에게 자신이 하던 걸 이어받으라고 했고 양희경은 이후 정말로 통기타를 메고 명동으로 나가 노래를 잠깐 부르기도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언니와 다르게 양희경에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노래를 부르는 일은 너무나 고역이었는데요.

어릴 때부터 집에서 언니와 그렇게 함께 노래를 불렀지만, 남들 앞에서 부르는 건 정말 싫었고, 그래서 양희경은 결국 나중에 가수가 되지 않고 자신의 전공이었던 연기로 가게 된 것이었습니다.

또한 후에 양희은이 라디오 dj로 활동하다가 사정이 생기게 되었을 때에도 양희경이 자주 대타로 나서기도 했는데요.

양희은 대신 양희경이 일일 dj를 맡게 되면 방송 시작할 때 ‘저는 양희은의 동생 양희경입니다’라고 말하지만, 양희경의 목소리가 양희은과 비슷해서 방송 끝 무렵이 되면 프로그램 중간에서야 방송을 듣기 시작한 청취자들은 양희경이 일일dj를 맡은 지 모르고 ‘양희은 씨 잘 들었어요’라는 문자를 보내기도 했다고 합니다.

게다가 둘은 외모도 닮았다 보니 많은 사람들은 거리에서 양희경을 보면 ‘라디오 잘 듣고 있다’라며 양희은으로 착각을 하고, 반대로 양희은에게는 ‘요새 드라마 잘 보고 있다’라며 양희경으로 착각을 한다는데요.

하지만 사실 양희경과 양희은은 입 모양과 목소리만 닮았을 뿐, 양희경은 이마가 넓은 데 비해 양희은은 좁고, 양희경은 눈이 크지만 양희은은 작은데 반대로 양희경은 코는 작지만 양희은은 코가 크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언니의 바지도 빨아주고, 대타로 나서준 양희경은 언니와 우애가 깊을 것 같지만 예전만 해도 그렇지 못했다고 하는데요.

양희경은 어릴 적에는 언니에게 많이 의지했지만 점점 크면서 언니가 집안에 여러 일을 간섭하고, 동생에게 너무 잔소리를 많이 하는 바람에 너무나 큰 속박과 스트레스를 받으며 도저히 견디지 못할 지경에까지 이르렀다고 합니다.

 

사실 이 간섭은

두 자매의 사춘기 시절 즈음부터 시작된 것인데 양희경은 ‘언니가 너무 다 간섭하니까, 어느 날은 한 번 언니에게 하극상을 한 적도 있다’라고 했는데요.

언니에게 쌓였던 화가 폭발한 양희경은 그만 언니에게 육탄전을 시도했고, 그렇게 자매는 치고받고 싸우다가 양희은이 손가락이 접질리는 등 영광의 상처만 남게 됩니다.

언니 양희은은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당시 동생이 자신에게 대들었다는 마음에 충격과 상처가 남아 있다고 하는데요.

결국 어릴 적에 기댔던 언니였지만 이후 언니로부터 간섭받는 상황에 지쳐버린 양희경은 언니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고자 스물네 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도망치듯 충동적으로 한 남자를 만나 결혼을 하게 됩니다.

도대체 그 스트레스가 얼마나 컸길래, 도망을 치려고 결혼까지 했던 것이었을까요.

당시 전도유망한 연극배우였던 양희경으로서는 이해할 수가 없었던 선택이었지만, 그만큼 양희경은 언니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던 마음이 절박했던 것이었는데요.

그런데 언니 잔소리가 너무 지겨워서 벗어나면 ‘숨 좀 쉴 수 있겠거니’하며 하게 된 결혼 생활에서, 양희경은 더 숨이 막히고 산 넘어 더 큰 태산이 서있고 계곡도 깊고 물살도 센 상황과 마주하게 됩니다.

양희경은 남편과의 사이에 두 아들도 낳았지만 여우를 피하려다가 호랑이를 만나게 된 격으로 고통스러운 시집살이가 양희경을 기다리고 있었는데요.

그녀는 시집살이로 마음고생이 너무 심해서 결혼할 당시 체중이 50킬로였는데, 시집살이를 하는 동안 스트레스 때문에 한 달에 1kg씩 찌는 바람에 1년 만에 60킬로가 되었다고 합니다.

아마도 그녀는 스트레스를 먹는 것으로 풀었던 것 같은데요.

당시 먹어도 먹어도 배가 고팠다는 그녀는 급기야 만삭 때는 무려 83kg까지 살이 찌게 됩니다.

양희경은 결혼 전만 해도 그렇게까지 살찐 체형은 아니었지만, 결혼 후 체중이 늘며 우리가 지금 보는 양희경의 후덕한 체구가 그때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었는데요.

양희경은 고통스러운 시집살이에 남편과 갈등도 있었지만, 두 아이들이 있기에 꼭 참고 지내다가 결국 별거를 하게 되었고, 수년 후에 끝내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게 됩니다.

 

당초 그녀는

아이들 때문에 이혼만은 하지 말자고 생각하며 어떻게든 참고 지내보려 했지만, 시간이 흐르며 도저히 못 견딜 정도로 한계에 부딪히자 결국 법적으로 정식 이혼까지 하게 된 것이었는데요.

그 후 양희경은 혼자 아이들을 키우다가 언니 양희은의 충고를 받아들이게 되는데, 양희은은 ‘좋은 사람 있으면 사귀고 그래야지. 이 세상엔 좋은 사람이 더 많다니까’라며 양희경에게 맞선을 권하게 됩니다.

언니의 소개로 그녀는 당시 수입 가구상을 하던 김광철 씨를 만나게 되는데요.

그는 양희경과 동갑으로 전처와 사별하고 슬하에 1남 1녀가 있는 남성이었습니다.

양희경은 처음만 해도 예의 바르고 투박한 첫인상이 매력 있어 보이진 않았지만, 연예인이던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그 사람을 보고 오히려 의아해하게 되는데요.

양희은이 70년대에 먼저 가수로 유명해지고, 양희경은 한참 후에야 배우로 얼굴이 알려졌지만, 맞선을 봤을 때는 이미 ‘목욕탕집 남자들’에 출연하고도 수년이나 지났기 때문에 대한민국에서 양희경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을 때였습니다.

그 남성은 맞선 자리에서 마치 손님을 대하듯 양희경에게 각오에 대한 설명을 늘어놨고, 그러자 양희경은 ‘이 사람은 어떤 사람이길래’하며 호기심마저 들게 되는데요.

연예인이라고 하면 편견이나 선입견이 있을 텐데 자신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던 눈치라 그녀는 ‘나중엔 자기 입으로 그 유명한 가수 양희은 씨 있잖아요. 그분이 제 언니거든요’라고까지 직접 이야기를 하게 됩니다.

그렇게 맞선이 끝나고 이후에도 간간이 만남을 가지던 양희경은 이 사람과 결혼을 한다면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가끔 들곤 했지만, 이제 막 사춘기에 접어든 그 사람의 딸을 배려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요.

물론 자기 또한 스스로 낳은 아이가 아닌데 그 아이에 대해서 얼마나 많이 알 수 있겠냐며 잘 보살필 자신이 없었는데, 아빠에게 어떤 아이인지에 대해 듣기만 해서는 한계가 있을 뿐만 아니라 어린 시절 본인이 계모로부터 당한 기억도 있기에 그녀는 선뜻 그 남자에게 다가가지 못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렇게

양희경과 김광철이 친구처럼 지내는 사이에 그만 그 누구도 예상치 못한 비보가 날아드는데요.

바로 김광철의 딸이 골육종암이라는 불치병에 걸리게 된 것이었습니다.

양희경은 당시 그의 딸을 이렇게 그냥 보낼 순 없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아홉 살의 엄마를 잃고 이제 열다섯 살 한창 뛰어놀 나이에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는 아이의 현실이 그녀에겐 너무 불공평하게 다가온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아이가 평소에 그런 양희경의 착한 마음씨를 알았던 것일까요.

김광철의 딸은 특이하게도 자신의 집을 놔두고 양희경의 집에서 치료를 받고 싶다고 말하게 됩니다.

본인의 친엄마도 아닌 사람에게 그 아이는 엄마 같은 감정을 느꼈던 것일까요.

결국 양희경 역시 죽어가는 환자의 소원을 저버릴 수가 없었고, 그렇게 김광철은 딸과 아들을 데리고 양희경의 집으로 들어와 더부살이를 시작하게 되는데요.

이후 양희경이 아이를 돌보던 어느 날 아이는 이렇게 말합니다.

‘아줌마. 우리 아빠랑 결혼하면 안 될까요. 난 아줌마가 내 엄마가 됐으면 좋겠어요. ‘엄마’란 말 해본 지도 너무 오래되어서 해보고 싶고요. 제 마지막 소원이에요. ‘

아이들이란 착한 사람과 나쁜 사람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리는 법인데요.

그 말을 들은 양희경은 그저 그 아이의 엄마가 되어주고 남은 식구들에게 의지할 버팀목이 되어주고 싶은 마음에 결국 재혼을 결심하고 언니인 양희은의 집에서 조촐하게 결혼식을 올리게 됩니다.

식사를 하고 사진 한 장 찍고 혼인신고를 한 것이 다였던 결혼식을 올리고 그렇게 그 아이는 양희경의 딸이 되었는데요.

하지만 아이는 친엄마를 잃은 후 다시는 불러보지 못했던 엄마라는 말을 양희경에게 실컷 부르다가 두 달 후 끝내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이후 양희경의 아들들과 김광철의 아들은 성이 다른 형제가 되었지만 동생의 가는 모습을 같이 지켜봐서인지 친 형제와 다름없는 사이가 되게 되는데요.

남편 김광철 씨는 양희경에게 너무 힘든 일을 겪게 해서 정말 미안할 뿐이고, 그리고 진심으로 고마운 건 단 한 끼도 거르지 않고 딸에게 맛깔스러운 반찬과 새 밥을 해주었다는 점 그 은혜는 평생 잊지 못할 거라고 밝혔습니다.

 

자식의 부모 앞에서

임종을 보이면 평생 가슴에 묻고 산다는데, 자신의 딸아이는 가는 날까지 효녀였다고 말하고 있는 양희경.

자신은 못된 계모로부터 나쁜 추억을 가지고 있지만 자신이 계모가 된 다음에는 그렇게 딸에게 좋은 추억을 남겼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사실 사람은 이런 행동을 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누구나 본전 생각이 나기 때문이죠.

비록 김광철의 딸이 시한부 인생이라는 특이한 경우이기는 하지만 그전에 양희경이 착한 마음씨를 알지 못했다면 결코 치료받는 장소로 양희경의 집을 선택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게 새로운 가족들을 인연으로 만든 양희경은 현재까지도 가족들과 행복한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데요.

어린 시절 아버지의 외도로 친어머니와 이별하며 계모로부터 구박을 당하더니, 아버지를 여의자 친어머니에게 돌아갔지만 사기를 당해 온갖 풍파를 겪어야만 했고, 언니의 잔소리가 싫어서 도망치듯 결혼했지만, 고통스러운 시댁살이에 끝내 남편과 이혼했는데 재혼하며 새로 생긴 딸은 그만 불치병에 걸리는 바람에 하늘로 보내야만 했던 양희경.

이제는 그녀의 인생에 다시는 또 다른 아픔은 없기를 바라며 너무나 힘든 삶을 살아온 배우 양희경에게 여러분의 따뜻한 응원을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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