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여보 고생 많았어..” 끝내 기구했던 이순재의 89년 인생 그리고 최근 벌어진 그의 안타까운 상황을 알아보세요..

이순재는 1934년에 함경북도에서 태어났습니다.

 

이순재가 태어난

두만강 근처는 대가족이 살기에는 너무 힘든 곳이었다 보니 이순재는 4살 때 조부모가 계신 서울에 구경을 왔다가 계속 눌러앉게 되는데요.

어릴 적 조부모님이 매우 보수적이고 완고하셨던 데다가 할머니도 생부를 낳은 분은 아니셨지만, 친조모보다 더 극진한 사랑으로 아들처럼 손자 이순재를 돌봐주셨다고 합니다.

이후 해방을 하고 이순재는 중학교에서 스파르타식으로 학생들을 지도하시는 교장 선생님을 만나게 됩니다.

교장 선생님은 스스로 운동장에 휴지를 줍고, 화장실 청소를 하며, 학교를 거울같이 깨끗하게 만드셨던 분이라 그렇게 학교는 떨어진 음식을 주워 먹어도 배탈이 안 난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청결했고, 학생들은 엄격한 규율 속에서 절대로 못 벗어나게 하며 오로지 공부에 전념하도록 완벽하게 통제했다고 하는데요.

심지어는 찢어진 모자에 바느질한 모자를 멋으로 썼다가 들킨 학생은 퇴학을 당했고, 어느 날은 옆 학교 여고생들이 지나가는 모습을 보고 야유를 했던 학생들이 교장 선생님으로부터 모조리 뺨을 맞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엄격한 환경에서 자란 이순재는 고등학생이 된 어느 날 동생과 수영복을 사고 나오다가 거리에서 갑자기 사람들이 아우성을 치고 하늘에는 비행기 두 대가 떠 있던 아찔한 상황과 마주치게 되는데요.

 

 

이틀 후 6월 27일에 피난길에 오르게 된 이순재는 여름 피난길은 그런 데로 넘어갈 수 있었지만, 1.4 후퇴 때 겨울 피난은 강추위 때문에 너무나 고통스러웠다고 합니다.

6.25가 터지면서 이순재의 고등학교 3년은 그렇게 풍비박산이 되었지만, 전쟁 중에도 그는 동생들을 돌보며 손에서 책을 놓지 않고 열심히 공부를 했는데요.

당시 서울대 정치학과에

응시했다가 안타깝게 떨어진 그는 다시 한번 도전해서 결국 서울대 문리대 철학과에 합격하게 됩니다.

전쟁으로 온 나라가 초토화된 상황에서도 열심히 공부해 서울대에 갔다니 참으로 대단한 일인데요.

이후 연극배우로 시작해 방송과 영화 쪽으로 넘어간 그는 다양한 작품에서 활약하던 중 어느 날 라디오 드라마를 녹음하다가 그만 죽을 뻔한 위기를 넘기게 됩니다.

당시 이순재는 라디오 스튜디오에서 삼국지 드라마 녹음을 하고 있었는데, 옆에 있던 음향 스태프가 식칼로 칼싸움 효과음을 내다가 그만 식칼에서 날이 빠지는 바람에 이순재의 목덜미를 스치며 날아가는 상당히 위험한 일을 당하게 되는데요.

당시만 해도 라디오 드라마 녹음은 마이크 하나의 모든 배우들과 효과음 담당 스태프까지 다 붙어서 녹음을 했기 때문에 만일 조금만 운이 나빴다면 이순재는 목숨까지 잃을 수 있는 끔찍한 사고를 당할 뻔했던 것이었습니다.

이 일을 계기로 라디오 드라마는 배우들의 목소리 녹음과 효과 업 녹음을 따로 진행하게 되는데요.

젊은 시절 그렇게 배우로 활동 중이던 이순재는 이화여대에서 한국 무용을 전공하는 아름다운 여대생을 만나며 가정을 꾸리게 됩니다.

연기밖에 몰라 서른을 훌쩍 넘겨서까지 짝이 없던 그에게 노총각 딱지를 떼준 이는 바로 그의 부인 최희정 씨였는데요.

최 씨는 당시 동아일보 주최 콩쿠르에 참여해 신인상을 탈 정도로 실력을 인정받아 세계를 돌며 투어를 하던 재원이었습니다.

두 사람이 인연이 된 것은 바로 최희정 씨의 동생 덕분이었는데요.

이순재가 명성여고 연극반을 지도하고 있던 당시 최 씨의 여동생이 그 연극반 소속이었던 터라, 최희정 씨가 동생을 잘 부탁한다며 인사를 하며 오가다 둘 사이에 사랑이 싹튼 것이었습니다.

이순재는 최희정 씨의 마음을 얻기 위해 6개월간 손 편지를 썼고, 그렇게 이순재와 열애 끝에 결혼에 골인한 최희정 씨는 결혼 후에는 무용을 잊어버리다시피 딱 끊고 내조에 집중하는데요.

 

 

그렇게 한 가정의 가장이 된 이순재는 많은 작품에 출연했지만, 안타깝게도 항상 생활고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90년대 이후에서야 배우의 출연료가 올라가기 시작했지, 그전만 해도 배우들은 방송국에서 아주 적은 출연료를 받으며 활동했는데 오래 활동하더라도 출연료는 오르지 않았고, 작품 하나로 생계를 이어갈 수 없으니까 동시에 일곱 여덟 편을 계약해서 촬영하곤 했는데요.

입에 풀칠을 하기 위해서는 tv 드라마를 동시에 두 개 정도 해야 하고, 1년에 최소 영화 열 작품을 계약한 후 촬영에 매진해야 했습니다.

이를테면 새벽에 A라는 작품을 찍은 후, 해 넘기기 전까지 B를 찍고, 통금 전까지 C를 찍은 후, 다시 다음 날 새벽에 D를 찍는 식으로 이순재는 젊은 날 영화 10편을 동시에 촬영한 적도 있다고 하는데요.

 

그러다 보니

한 달에 20일은 집에 들어가지 못했고, 집에서 잠을 자는 시간은 많아야 5일에서 일주일 정도에 불과했습니다.

지금이야 배우들의 개런티가 올라가서 영화나 드라마를 하나 하면 휴식을 취하며 재충전의 시간을 가지지만, 과거의 연예계는 연기로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구조가 없었기 때문에, 이순재는 60~70년대에만 영화를 100편 넘게 찍었다고 하는데요.

게다가 이순재가 젊었을 적에는 잘생기고 훤칠한 박근형과 남궁원, 이정길, 노주현 등이 활약했기 때문에 이순재는 그 배우들이 주연으로 나오는 작품의 조연으로 주로 나오거나, 주연을 하더라도 멜로드라마가 아닌 시대극의 주인공만 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남편이 없는 집 안의 빈자리를 메우는 몫은 오롯이 이순재의 부인에게 남겨졌는데요.

이순재는 1남 1녀 자녀들이 태어났을 때도 모두 가보지를 못할 정도로 시간이 없었는데, 아이들이 출산 예정일보다 빨리 나왔던 바람에 예정일에 맞춰 가보면 항상 아이는 이미 태어나 있었다고 합니다.

아이들이 자라면서도 운동회를 가본 적도 없고 손잡고 놀이동산에 가본 기억도 없을 정도로, 매일같이 촬영하고 무대에 서느라 도저히 시간을 낼 수 없었던 이순재.

배우라는 직업이 사적인 일에 양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 청와대에서 불러도 갈 수가 없었을 정도로 바빴던 이순재에게는 다행히 모든 것을 이해해 주는 착한 아내가 있었습니다.

 

 

아내는 남편을 대신해

집안의 기둥처럼 모든 것을 주도해 줬고, 그 덕에 이순재는 마음 편하게 밖에서 연기에만 전념을 할 수 있었는데요.

하지만 이렇게 쉬지 않고 일해 겨우 집을 장만해 먹고살던 이순재에게 그만 위기가 오게 되는데, 바로 한동안 캐스팅 연락이 오지 않는 바람에 3개월이나 백수가 되며 결국 생활고에 시달리게 된 것이었습니다.

당시 영화 10편, 20편을 찍어 겨우 굶지 않고 살던 이순재 가족에게 3개월의 공백은 정말 큰 위기였는데요.

그때 무용가 출신으로 결혼 후 내조만 하던 아내가 큰 결단을 내리는데, 바로 여자의 몸으로 직접 만두 가게를 열어 장사를 해보겠다고 선언한 것이었습니다.

장사를 한 번도 해보지 못한 아내에게 식당 장사는 큰 도전이었지만, 아내는 남편에게 돈 벌어 오라고 닦달하기는커녕, 아들의 돌반지를 밑천으로 자신이 직접 ‘코끼리 만두’라는 작은 분식집을 열어 직접 만두통을 들고 배달에 나섰는데요.

아내는 이순재에게 단 한 번도 도와달라고 손을 내밀거나 힘들다는 데 색 한 번 안 했는데, 훗날 이순재는 그런 아내가 아마 견디기 힘들었을 거라고 회상했습니다.

돈을 많이 벌어주는 남편도 아니었기 때문에 요즘 같아서는 당장 이혼 사유가 되었겠지만, 아내는 연기 이외에 장사를 하라거나 부업을 하라는 식으로 이순재를 유도하지 않았다고 하는데요.

또한 이순재 역시 만두 가게에 일절 개입을 하지 않았는데, 그는 결혼 전 젊은 처녀였던 아내가 결혼 후 그렇게 알뜰하게 살림을 할지 몰랐고, 장사까지 나서니 너무나 안쓰럽고 미안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열심히 살던 이순재 부부에게 신이 도왔던 것일까요.

열 평짜리 물만두 가게로 시작한 장사는 점점 사람이 몰리더니 나중에는 너무 장사가 잘 되는 바람에 체인점까지 열자고 할 정도로 대박이 나게 되는데요.

장사가 너무 잘 돼 여기저기 우후죽순 격으로 ‘코끼리 만두’라는 상호를 베낀 가게들이 등장할 정도였고, 아내는 만두집의 성공을 발판으로 후에 이촌동에 중국 음식점까지도 차리게 됩니다.

하지만 이순재는 아내가 아무리 바빠도 식당에는 나타나지 않았는데, 이유는 배우가 얼굴을 팔아 장사를 하는 것처럼 보일까 봐서 그랬다고 합니다.

게다가 그는 아내에게 장사하는 것에 너무 연연해 하지 말라며 본인이 배우로서의 길을 가는 본분을 지키며 돈을 쫓지 말자고 수차례 당부하게 되는데요.

결국 아내도 남편의 말에 수긍하며 아이들이 학교에 입학하고 나서는 모두 그만뒀는데, 그렇게 번 돈으로 이순재는 건물까지 살 수 있었지만, 그 건물은 이후 친척의 보증을 잘못 썼다가 그만 넘어가고 말게 됩니다.

 

이후 이순재는 나이를 먹으며

젊은 시절 멜로 연기를 했던 다른 배우들이 늙어가며 자리를 잃을 때, 오히려 자신은 배우로 더 성공하는 대기만성의 길을 걷게 되는데요.

아직도 대한민국 온 국민이 기억하는 ‘사랑이 뭐길래’에서 이순재는 ‘대발이 아버지’로 최고의 시청률을 기록했고, 또한 한국 방송 연예의 산증인답게 한국 최초의 일일 드라마 ‘누는 나리는데’와 최장수 일일 드라마 ‘보통 사람들’ 그리고 최고 시청률의 일일 드라마 ‘보고 또 보고’까지 대한민국 일일 드라마의 최초와 최고의 작품에는 항상 이순재가 있었습니다.

또한 과거만 해도 배우라고 하면 딴따라라고 무시했지만, 이제는 대한적십자사와 서울시 등 지금까지 9개 기관의 홍보대사도 맡았을 정도로 배우에 대한 인식도 바뀌며, 이순재는 국민 배우로 거듭나게 되는데요.

심지어 그는 원래 정치까지는 하려 하지 않았지만, 권유에 못 이겨 13대와 14대 총선에도 출마하게 되는데, 호남세가 강한 서울 중랑갑에서 13대 때 700 표차로 낙선했다가 14대 때 3800표 차로 설욕을 하며 국회에까지도 진입하게 됩니다.

 

선거운동 당시

이순재는 합동 유세장에서 청중들에게 현역 의원인 상대 당 후보에게 격려의 박수를 보내달라고 말하며, 상대당 후보를 헐뜯기는커녕 전국적으로 최고의 모범 선거구라는 말까지 들었을 정도로 매너 있는 선거 운동을 펼치기도 했는데요.

의원 시절 그는 ‘연예인’ 출신 정치인으로서 유일하게 본회의 정책 질의를 했고, 연기자의 저작인접권을 보호하는 입법도 주도했는데, 지금은 몇백억 원이 왔다 갔다 하는 엄청난 권리를 바로 이순재가 주도하여 입법까지 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이후 14대 의원 임기를 마치고서 정치를 그만두게 되는데요.

정치를 접은 것을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결단으로 꼽고 있는 이순재는 의원을 하는 동안 너무 바쁘고 힘들었는데, 어느 일요일엔 주례를 아홉 번 설 정도로 바쁜 일정을 소화해야 했고, 지역구에 불이 나거나 물난리가 나면 다 자신의 책임 같아 얼른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관료든, 정치를 하든, 연예인이든 주어진 위치에서 국가에 기여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개인의 영달을 위한 출세라면 가치가 없고 자신은 정치보다 연기자로 사회에 일익을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해 정치는 자신의 본업이 될 수 없다고 생각을 했다는데요.

이순재는 지역구였던 중랑구에서 그렇게 정치는 그만두고 중랑문화원장을 거쳐 중랑구 사회복지 협의회장을 맡았는데, 재임 당시 기관장 판공비를 없애니 후임자들도 이후 판공비에는 손을 대지 않는 전례도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그는 정치할 때도 돈은 한 푼도 받은 일이 없다고 하는데요.

그가 위원이었던 시절이 과거 90년대 지금보다 훨씬 투명하지 못하고, 뇌물이 많았던 시절임을 감안하면 이순재는 정말 재물 욕심이 없이 깨끗한 삶을 살아왔다고 해도 될 것 같습니다.

그는 자신의 좌우명인 ‘양보하며 살자’답게 돈 욕심 없이 출연료가 형편없던 과거에도 열심히 일해 집을 장만했고, 외모가 멋있지 못해 멜로 주인공 등 최고의 청춘 인기 스타까지는 못해봤지만, 대신 ‘연기력으로 최고가 되면 밥은 먹고살지 않겠냐’라고 생각을 한 것이 결국 나이가 들어 최고의 국민 배우의 자리까지 올라갈 수 있었던 것이었는데요.

게다가 국내 최고령 배우가 된 현재까지도 왕성하게 활동하며 긴 대사까지도 완벽하게 외우는데, 가끔 비타민 영양제를 먹는 것 외에는 먹는 것도 아내가 주는 대로 먹는 그가 건강을 지킬 수 있었던 비결은 다름 아닌 술과 담배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자기 관리에 철저한 이순재는 존경하며 따르는 후배도 많은데, 그중 배우 김영철은 ‘궁예’와 ‘김두한’ 캐릭터로 전성기를 달리면서 거만해지는 바람에 한때 드라마 제작진 사이에 악명이 높은 배우였다고 하는데요.

 

드라마 연출 과정에서

피디의 의견과 맞서기도 하고, 촬영 대기 시간이 길어지면 촬영을 거부하고 집으로 가버리기도 자주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피디와 드라마 제작진들은 김영철의 의견을 모두 반영하여, 대부분의 촬영 시간은 앞부분에 배치하여 촬영하는 등 드라마 판에서는 한마디로 악평을 듣는 배우가 되었다고 하는데요.

그러던 어느 날 김영철은 한 드라마에서 이순재를 만나며 큰 깨달음을 얻게 되는데, 당시 현역 배우 최고참인 이순재가 무려 다섯 시간 동안이나 기다리고 있으면서 아무런 말 없이 후배들 촬영을 보며 자기 순서를 묵묵히 기다리는 모습에 김영철은 아주 많은 부끄러움이 밀려왔다고 합니다.

대선배인데도 다른 배우들의 촬영에 도움을 주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모습에 감동을 느끼면서 김영철은 지금까지 자신의 편의 만을 위해 모든 것을 우선시해 왔었던 행동들의 부끄러움이 밀려오게 된 것이었는데요.

게다가 이순재는 영화 ‘덕구’ 촬영 당시 한 시골집에서 촬영을 하게 되었는데 시골집은 문지방이 높다 보니, 촬영 중에 그만 문지방에 걸려서 넘어지며 다리가 부어올라 피까지 났다고 합니다.

나이가 많은 사람은 함부로 넘어졌다가는 큰일이 나는데 고령의 배후가 넘어지자 감독은 순간 머리가 하얘지면 너무 죄송한 마음에 눈물이 계속 났고, 스태프들도 울면서 현장이 눈물바다가 됐다는데요.

넘어지면서도 안고 있던 아이가 다칠까 봐 품에 안고 보호했다는 이순재는 울고 있던 감독의 손을 잡으며 ‘괜찮아 다리 안 부러졌어’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감독은 이순재 선생님이 힘들다고 말씀하셔도 되는데, 그 이야기에 더 죄송스러웠다고 말했는데요.

게다가 그날은 영화의 첫 촬영 날이었는데, 이순재는 촬영장에 오는 길에 교통사고도 난 뒤였습니다.

이순재는 첫 촬영 날 스태프들에게 지장이 있을까 봐 사고가 난 것을 비밀로 했고, 감독은 나중에서야 그 이야기를 다른 일을 통해 전해 들었던 것인데요.

게다가 그는 74세의 나이로 향년 95세의 어머니 상을 당했을 때도, 새벽 2시에 어머니를 보내고도, 그날 오후 4시와 8시에 예정되어 있었던 연극 공연을 취소 없이 진행했고, 이튿날 예정되어 있던 kbs 주말 드라마 녹화까지도 거르지 않고 참여한 뒤, 다음 날 아침 8시에 발인을 치르는 투혼을 발휘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송해와

신성일, 강수연이 세상을 떠났을 때에도 조문하며 고인의 명복을 빌었던 이순재는 과거 KBS의 한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해 배우 출신 무속인 정호근의 신당을 찾기도 했는데요.

정호근은 이순재가 “평생 바쁘게 살고, 버는 사람 따로 가져가는 사람 따로 있다며, 굉장히 고독한 사주”라고 밝혔는데, 아니나 다를까 이순재는 구순을 앞둔 나이에도 미국 명문학교로 유학 간 손주들의 학비를 대주느라 일을 쉴 수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의 손녀는 미국 최상위권 명문 사립대인 usc 약학 전문대학원에 다니고 있고, 손자는 디어필드라는 200년이 넘은 명문 고등학교에 다니는데, 손자가 내년에 돈 많이 들어가는 대학에 가겠다고 해서 골치가 아프다고 말하며 허허 웃어 보였는데요.

자식들에게 못해줬던 것을 손주들에게 해주는 거라며 자기가 원해서 열심히 일해서 학비를 대주고 있는 거라 말하고 있는 이순재.

그는 얼마 전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연신 기침을 하며 ‘기침을 한 지 3주나 됐는데 예전과 다르게 약을 먹어도 낫지 않고 있다’라고 말해 많은 이들의 걱정을 자아내기도 했는데요.

평생 자신이 연기에만 집중할 수 있게 해준 아내에게 미안하고, 고맙다고 말하는 그가 손주들이 공부를 마칠 때까지 건강을 잃지 않고 왕성하게 활동하여 끝까지 학비를 대줄 수 있게 되기를 빌며, 너무나 힘든 삶을 살아온 배우 이순재에게 여러분의 따뜻한 응원을 부탁드립니다.

Leave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