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수 혜은이 최근 방송 못 나오는 놀라운 이유가 공개되었는데…” 그녀의 안타까운 근황을 확인해보실 수 있습니다.

오늘의 주인공 ‘혜은이’를 이야기하기에 앞서, 미국의 유명한 여성 저널리스트가 있습니다.

그 남편도 유명한 기자이자, 컴퓨터 전문가였죠.

이렇게 완벽한 여자와 남자가 부부가 되었다면 누구보다 더 잘 살아야 할 텐데, 그런데 이들은 결국 이혼하고 말았죠.

그리고 이 여자와 이혼한 남편이 ‘이제는 좀 더 새로운 인생을 찾아야겠다. 나에게 진짜로 잘 맞고 적합한 아내를 찾아봐야겠다’라며 인터넷에 광고도 내고, 사람들의 추천을 받아서 많은 여자들의 리스트와 자료들을 모으게 됩니다.

그래서 그 여자들 가운데 자신과 가장 잘 맞고 어울리는 사람을 순위별로 1위부터 10위까지 리스트를 뽑았는데, 그런데 정말 놀랍게도 그 순위 중 가장 적합한 결과로 나온 1위가 바로 자신의 전부인이었습니다.

 

 

이처럼 그는 아내만 바꾸면 더 잘 살 것이라고 확신했지만, 그것은 잘못된 결정이었죠.

하지만 오늘의 주인공 ‘혜은이’는 30년 결혼 생활 끝에 이혼 도장을 찍고 나오는데, 덤덤해도 너무 덤덤해 본인 스스로가 30년을 함께 살아왔는데, 어떻게 이렇게 아무 감정이 안 드는지 스스로를 자문하곤 했습니다.

이처럼 그녀는 전 남편 김동현으로 인해 지금껏 날린 집만도 자택과 친정어머니의 집, 시어른들의 집, 작은 아버지의 집까지 다 날리고, 또한 한 채씩 날아갈 때마다 이제 그만 천국으로 가려고 준비하고 종종거리며 살아왔지만, 여전히 100억이 넘는 빚을 아직도 다 청산하지 못하고 있는 혜은이.

그녀의 파란만장한 인생에 대해 말해보고자 합니다.

1954년 제주도에서 태어난 혜은이는 아버지가 지금으로 치면 연예 기획사의 사장인, 유명 악극단의 단장을 하면서 어린 시절 굉장히 부유하게 자랄 수 있었습니다.

당시 전국의 유명한 악극단원들은 거의 대부분 아버지의 악극단 무대에 섰을 만큼 아주 잘 나갔고, 또한 단원들이 어린 혜윤이를 예뻐해 주자 자연스레 하춘화가 그랬던 것처럼, 그녀 역시 베이비 가수가 되어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곤 했죠.

그렇게 극단의 단장인 아버지와 함께 전국을 누비며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고, 하지만 안방극장에 tv가 등장하면서부터는 서서히 쇠퇴의 길을 걷다가 그녀가 고등학교 때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아버지가 후배의 보증을 섰다가 전 재산을 날리면서 집안이 그야말로 쫄딱 망하고 말았습니다.

심지어 이때 아버지가 그 충격으로 풍이 오면서 쓰러졌고, 이후부터는 하루 종일 말 한마디를 안 하시고, 심한 우울증으로 가만히 앉아만 있게 되었고, 그러다 하루는 이런 사연을 들은 아버지의 친구가 고등학생이었던 그녀에게 다음과 같은 제안을 하게 됩니다.

“그래도 가족들은 어떻게든 살아야 하고 그러려면 너라도 돈을 벌어야 하니, 노래를 해보는 것이 어떠냐”라는 제안을 했고, 그래서 결국 고등학생의 나이로 아버지의 친구가 운영하던 서울 무교동의 극장식 맥주홀에서 가수로서 데뷔 아닌 데뷔를 하게 됩니다.

이처럼 그녀는 가족들의 생계를 위해서 18살 때부터 밤무대에 올라 노래를 불렀고, 그런데 당시 워낙에 예쁘고 노래도 제법 하다 보니 정식 가수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금세 쇼의 주인공이 되어 무대를 휘젓고 다니게 됩니다.

 

 

그러자 방송국에서도 pd들이 ‘물건이 하나 있다는데 한번 가서 보자’라며 그녀를 찾아오기 시작했고, 그러다 하루는 작곡가 엄진이 그녀를 찾아와 ‘길옥윤이라는 작곡가가 신인 가수를 찾는데, 오디션을 보는 게 어떠냐’라며 권유하면서, 이때 그녀의 본명 ‘김승주’를 ‘혜은이’라는 이름으로 바꾸고, 마침내 훗날 그녀를 국민 가수로 만들어줄 작곡가 길옥윤을 소개해주게 됩니다.

한편 이 무렵 작곡가 길옥윤은 음악적 파트너이자 부부였던 가수 패티김과 이혼 후, 술과 노름에 빠져 그늘진 생활로 허우적거리고 있을 때로 작곡가로서는 겨우 생명을 유지하고 있는 상태였습니다.

아무튼 해은이와 길옥윤은 그렇게 만나게 되었고, 그런데 당시 혜은이의 몸무게가 지금과 다르게 38kg 정도 나갔을 때로, 스스로 서 있기조차 힘겨워 보이는 가날픈 몸매였는데, 하지만 길옥윤은 그간 패티김과 같이 성량이 풍부한 가수들과 작업을 하다 보니 작아도 너무 작은 혜은이를 보고 사실 별다른 기대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막상 노래를 시켜보니 나이에 비해서 슬픈 정서가 깃들어져 있고, 또한 부드러운 목소리가 잔잔하게 가슴을 파고들자 결국 혜은이에게 곡을 주기로 마음먹게 됩니다.

하지만 미리 써놓은 곡들이 혜은이와 어울리지 않아 오디션을 본 당일 길옥윤은 여관에 누워서 다시 영감을 떠올리게 되는데, 그러자 마침 창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고 일찍이 슬픈 인생을 느껴버린 것 같은 혜은이의 모습을 떠올리며 종이 위에 곡을 그리자 마침내 그녀의 데뷔곡 ‘당신은 모르실거야’가 탄생하게 됩니다.

그렇게 탄생한 희대의 명곡으로 가요계에 혜성같이 등장한 그녀는 얼마 지나지 않아 전국적으로 이 노래가 울려 퍼지게 되었고, 그러다 하루는 그녀가 택시를 타고 가는데 마침 차 안에서 본인의 노래가 흘러나오게 됩니다.

그리고 그녀를 알아보지 못한 기사님이 ‘요즘 이 노래가 최고다. 그런데 가수 이름이 정말 희한한 게 어떻게 성이 혜 씨가 있냐’라며 놀라워했고, 한편 그녀의 이름은 앞서 얘기한 대로 작곡가 엄진이 만들어 주었는데, 그 이유로는 다음과 같습니다.

 

 

당시 작곡가 엄진은 ‘그녀를 최고의 스타로 만들어 줄 테니, 이 은혜를 잊지 말라’라고 해서 처음에는 ‘이은혜’로 하려다, 그런데 이름이 뭔가 좀 이상해서 혹시나 거꾸로 해보니 ‘혜은이’라는 이름이 특이하고 사람들이 금방 기억할 것 같아, 그렇게 해서 ‘혜은이’라는 예명이 탄생했던 것이었습니다.

아무튼 이후 그녀는 데뷔곡 ‘당신은 모르실 거야’를 시작으로 길옥윤과 함께한 3집까지 연달아 모두 대성공을 거두며, 가수로서는 당시 누구와도 견줄 수 없을 만큼 최고의 자리까지 올라가게 됩니다.

훗날 그녀가 이때를 고백하길 “당시 너무나도 많은 사랑을 받아, 스케줄이 끊이지 않다 보니 집에서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차에서 잠을 자며 스케줄을 했기 때문에, 자다가도 툭 치면 ‘당신은 모르실 거야’ 하고 일어날 정도였다. 그리고 이때는 전국 리사이틀만 했다 하면 돈을 가방에 발로 꾹꾹 눌러서 담고 그랬는데, 4회씩 하고 나면 승용차 한 대씩 보너스로 받고 그리고 지방 공연 한 번 휙 하고 나면 집 1채가 생기고 그랬다”라고 했습니다.

아무튼 당시 혜은이의 인기는 정말 상상 그 이상으로 조용필도 능가할 정도로 혜은이의 독주 시대라고 할 만했고, 또한 길옥윤과 함께 수많은 히트곡을 써 내려가며 그야말로 최고의 콤비를 보여주다가 그런데 3집을 마지막으로 두 사람은 각자의 길을 걷게 되는데, 그 이유로는 바로 매니저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길옥윤의 매니저는 혜은이도 함께 일을 봐주고 있었고, 또한 길옥윤과 매니저는 친형제보다 가까운 사이였다가 그런데 둘 사이에 갈등이 생겨 멀어지자, 누구도 따라갈 수 없는 난처한 상황에 놓인 애꿎은 혜은이만 입장이 곤란해지면서, 결국 1981년 ‘외국에 나가 공부를 하겠다’라는 방송용 멘트를 남긴 채 갑자기 은퇴하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너무나도 어이없게 가수를 은퇴한 그녀는 당시 벌어놓은 돈으로 사업을 하게 되는데, 명동에 ‘혜은이 부띠끄’라는 기성복 매장을 차려 한때는 지방 대리점 확장 등 성공적이라는 평가를 받고는 했으나, 하지만 결국 동업자들의 사기로 무려 7천만 원의 손해를 보고 사업을 접어야만 했습니다.

참고로 1982년 그녀가 날린 7천만 원의 값어치는 강남의 30평대 아파트 두 채 이상의 돈이었고, 지금으로 치면 40억 정도의 가치가 되는 돈이었다고 했습니다.

아무튼 이 여파로 그 잘나가던 가수 혜은이가 가수 인생은 물론 인생의 비극도 시작되게 되는데, 그 이유로는 그녀의 첫 번째 남편 최정수를 이 사업 때문에 만났기 때문입니다.

당시 첫 번째 남편 최정수는 참고로 길옥윤이 소개해 준 사람이었는데, 이미 두 번의 결혼 경력을 가지고 있던 사람으로 나이 차이가 무려 17살이나 났으며, 또한 이때만 하더라도 흔치 않던 속도위반까지 하면서 두 사람은 결혼하게 됩니다.

 

하지만

첫 번째 남편 최정수는 날이 갈수록 차마 입에 담을 수도 없는 나쁜 행동을 하더니 결국 구속까지 되고 말았고, 그래서 그녀가 이혼을 요구했는데 그것마저 완강하게 거절하자, 두 사람이 별거를 하다가 결국 결혼 5년 만인 1988년 이혼을 하고, 딸의 양육권도 함께 넘겨주게 됩니다.

그리고 이때부터 가녀렸던 그녀의 몸이 갑자기 살이 찌기 시작하더니, 가수로서 복귀하긴 했으나 더 이상은 예전의 혜은이가 아니었고, 그래서 그녀의 팬들은 “혜은이가 최정수만 만나지 않았더라면, 아마 조용필을 능가했을지도 모를 정도였는데 이 둘의 만남의 중재자가 된 ‘혜은이 부티크’가 원망스럽지 않을 수가 없다”라고 했습니다.

아무튼 첫 번째 남편과 이혼 후 심리적으로 공허한 마음을 달래러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고, 그리고 거기에서 두 번째 남편 김동현을 만나게 되는데, 당시 두 사람은 교회뿐만 아니라 인천 야간 업소도 함께 출연하다 보니, 이후 급격히 가까워져 그녀가 이혼한 지 1년 만에 1989년 돌연 결혼 발표를 하게 됩니다.

참고로 당시 김동현은 초혼이다 보니 집 안에서는 ‘왜 굳이 이혼녀와 결혼을 하냐’라며 반대가 상당했으나,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두 사람은 다음에 결혼을 했고, 하지만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또다시 그녀는 인생의 큰 위기를 마주하게 됩니다.

당시 남편 김동현은 배우 생활을 하다 말고 갑자기 본인이 영화를 제작하겠다며 제작자로서 경험도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심지어 한 편도 아닌 두 편의 영화를 동시에 제작하게 되었고, 더군다나 그중 한 편은 처음부터 끝까지 일본에서 촬영을 할 정도로 심혈을 기울였으나, 영화가 개봉도 하기 전에 부도가 나고 말았습니다.

그때 김동현이 날린 현금만 30억으로, 지금으로 치면 대략 200억 정도의 가치이며,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이후에도 남편은 아파트를 짓겠다며 일을 벌이다 또 실패하면서, 결국 부부가 전 재산을 다 잃고 그야말로 길바닥에 나앉고 말았습니다.

이때를 그녀가 고백하길 “우리 아이가 두 살이 됐을 때 남편이 영화 제작을 시작했고, 그중 한 편은 일본에서 모든 촬영을 했으니 제작비가 두 배로 들어갔었다. 그런데 영화가 개봉도 하기 전에 부도가 났고, 그때 날린 현금만 30억 정도로, 그뿐만 아니라 가지고 있던 땅이고 집이고 뭐고 돈 되는 건 다 사라졌다”

 

그런데

“더욱 안타까운 것은 이 빚의 올가미가 결국 내 주변 사람들에게까지 뻗어나가고 말았는데, 당시 내가 하도 어렵다 보니까 이제 하다 하다가 남은 것이 작은 아버지 집밖에 없었다”

“그래서 결국 작은아버지에게도 ‘제가 집 대출을 좀 받아서 급한 불을 껐으면 좋겠습니다’라고 부탁을 했는데, 그러자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바로 딱 한마디만 하시더라. ‘어떻게 하면 되니?'”

“그렇게 작은아버지가 직접 가서 대출을 해주셨고, 그런데 이후 이 대출을 갚고 집을 찾아들여야 하는데, 결국은 그 집을 못 찾아드리고 작은아버지가 남의 집에서 세상을 뜨셨다”

“그리고 마지막에도 하셨던 말씀이 ‘집을 찾는 것보다 승주가 잘 되어야 하는데, 아직도 저렇게 고생을 하고 언제 저 고생이 끝날까’ 하면서 너무 가슴 아파하시다가 돌아가셨다”라고 말했습니다.

아무튼 이후 그녀는 무려 15년간 남편의 빚을 갚으며 돈이 될 수 있는 것은 뭐든지 다 해야 했고, 심지어 이때는 방송도 못 했던 게 방송을 하면 시간을 많이 뺏기니까 차라리 돈이 되는 밤무대 일을 주로 해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이 무렵 참 서글펐던 게 한 번은 차를 타고 일을 나가다 기름이 바닥이 나서 기름을 넣어야 하는데 수중에 그 돈도 없다 보니 결국 아들의 돼지 저금통에 돈을 꺼내서 기름을 넣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후부터 생활비가 없을 때마다 아들 저금통에 손을 대고 말았고, 그러다 어느 순간 저금통의 돈마저 다 떨어지자 아들한테 너무 미안하고, 본인의 처지도 너무너무 처량하고 비참해서 결국 해서는 안 될 나쁜 생각까지 하며 깊은 좌절감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아무튼 그렇게 그녀는 끝이 없는 밑바닥까지 떨어졌지만, 삶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빚을 갚아 나갔고, 그러다 남편의 빚이 어느 정도 정리가 될 때쯤, 남편 김동현도 미안했는지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는 보답으로 혜은이가 첫 번째 이혼과 함께 보내야만 했던 딸을 다시 데려오기로 결심하게 됩니다.

이와 관련해 그녀가 고백하길 “내가 첫 번째 결혼을 실패하는 바람에 딸 아이와 헤어졌는데, 당시 이 아이와 헤어지는 것에 대해서 너무 가슴이 아프고, ‘내가 앞으로 과연 살아갈 수 있을까’라고 생각이 들 정도로 정말 힘들었다”

“그리고 이때 우리 딸 아이가 유치원 다닐 때였는데, 참 기특한 게 날 보고 ‘엄마, 내가 몇 살이 되면 엄마한테 버스를 타고 갈 수 있어?’ 그럼 그때 내가 ‘버스 타고 엄마 찾아갈 수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라’라고 하는데, 어찌나 눈물이 나던지”

“이후 세월이 한참 흐르고 어떤 방법이 됐든 우리 딸을 다시 데려오려고 무던히 애를 썼고, 또한 딸을 위해서 기도도 참 많이 했다. 아무튼 지금은 딸과 함께 살고 있고, 서로가 친구처럼 아주 잘 지내고 있다”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비록 남편의 사업 실패로 방송도 하지 못하고, 15년간 오로지 빚만 갚아 나갔던 그녀였지만, 아내의 잃어버린 세월을 되찾아주고 싶었던 남편 김동현의 배려 덕분에 딸과 다시 재회하며 긴 겨울 끝에 마침내 따스한 봄날이 다가오는 듯해 보였습니다.

하지만 남편 김동현은 이후에도 여전히 정신을 못 차리고 수차례의 사기 혐의로 징역을 구형받고 실형이 선고되는 등 끝없는 막장을 달리자, 결국 혜은이 그녀도 사람인지라 인내심이 한계에 도달해 버렸는지, 결국 두 사람은 2019년 7월 결혼 30년 만에 이혼하게 되면서 공식적으로 남남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와 관련해

김동현이 고백하길 “나도 열심히 해보려고 했었는데, 혜은이 씨한테 죄스럽고 미안하다. ‘이러면 안 되는데, 이러면 안 되는데’ 하면서도 결국은 이렇게 됐다. 그런데 이혼을 하고 법원을 나오면서 ‘이게 내가 올바른 행동을 한 거야. 뭐야. 좀 미친 짓 아니야’ 이런 생각도 한편으로는 했다”

“왜냐하면 내가 남자이기 때문에 사실 결혼 생활 동안에 수없이 사업에, 영화 제작에 이렇게 실패를 연속으로 했지만, 나는 남자이기 때문에 재기에 대해서 자신이 있다는 생각을 늘 했었다”

“그래서 혜은이 씨한테도 그렇게 전달을 하고 그랬는데, 하지만 만약 하느님께서 나를 과거로 돌려준다면, 그런 기회가 설사 온다고 그러면, 현재를 알기 때문에 내가 혜은이 씨를 붙잡지 않을 것 같다”

“어쨌든 지금은 이혼에 대한 생각이 점점 잊혀간다. 자꾸만 그걸 이혼 생각에 내가 몰입하면 내 모습이 계속 주저앉는 것 같다. 삶의 어떤 가치가 자꾸만 무너지는 것 같아서 계속 잊어버리려고 애를 쓰는 편이다”라고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혜은이 그녀가 고백하길 “남편의 잇단 사업 실패와 사기 사건 연루로, 나는 10년이 넘는 시간을 밤낮으로 무대를 뛰어다니며 오로지 돈만 벌어야 했다. 지금껏 날린 집만도 자택과 친정 어머니의 집, 시어른들의 집, 작은아버지 집까지 모두 다섯 채다”

“그리고 사채업자들이 수시로 나를 힘들게 몰아세우고, 집이 한 채씩 날아갈 때는 나도 그만 하늘로 가려고 준비를 하곤 했다. 그렇게 평생 종종거리며 살아왔지만, 남편의 빚을 아직도 다 청산하지 못한 상태다”

“그래서 결국 이혼을 하게 되었고, 그리고 법원에서 아무 소리도 않고 도장만 쾅쾅 찍어서 나오는데 정말 신기하게도 눈물도 안 나고, 화도 안 나고, 너무 무덤덤하더라.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지난 30년을 함께 살아왔는데, 어떻게 이렇게 아무 감정이 안 들 수가 있지? 스스로에게 자문하게 되더라”

“그런데 지금도 아직 답이 안 나왔다. 남편은 일을 할 때 먼저 의논하거나, 털어놓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그러다 한참 있다가 사건이 터지면 언론을 통해 알게 되거나 소문을 들은 지인들이 나에게 알려주곤 했다”

“그게 너무 답답해서 제발 무슨 일을 할 때는 얘기를 좀 해달라고도 했었다. 그런데 남편이 판사 앞에서 ‘저는 보증을 잘못 선 죄밖에 없습니다’라고 얘기를 했다는 소식을 듣고 너무 황당해서 ‘보세요. 보증이라는 뜻을 몰라요? ‘그 사람이 잘못을 했을 때는 내가 대신 그 사람의 일을 하겠다’리는 약속을 하는 건데, 그걸 왜 한 번도 아니고 수도 없이 하는 건가요?’ 그러기도 했었다”

 

그래도

“지난 30년 세월 언론에 오르내리지 않은 일들까지 합하면 손에 꼽을 수도 없을 만큼 참 많은 사건 사고가 있었지만, 그런 풍파를 겪으면서도 단 한 번도 큰 소리 내며 싸운 적이 없었다. 처음에는 일이 커지기 전에 어떻게든 막아낼 수 있는 수준이었고, 일이 커졌을 때도 발을 동동 구를지언정 어떻게든 남편을 이해하려 했었다”

“일을 하다 보면 잘못될 수도 있고, 저 사람도 힘들고, 나도 힘든데. 남편을 힘들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처음부터 무언가 잘못되게 하려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게다가 사실 김동현 씨는 정말로 선해서 남을 해코지할 사람은 절대 아니다”

“다만 귀가 얇아도 너무 얇아서, 자꾸만 안 좋은 일들에 휘말렸던 것 같다. 사실 나는 가정 주부로서는 빵점이었다. 어릴 때부터 연예계 생활을 하다 보니 노래만 부를 줄 알았지. 집안일은 그야말로 빵점이었다. 오히려 요리와 청소 등 이런저런 살림은 남편이 훨씬 잘했다”

“그런 점에서도 미안하고, 남편이 법정에까지 섰을 때는 ‘일이 이 지경이 될 때까지 내가 어떻게 아무런 도움도 못 되었나’ 싶어 자책감도 들었었다”

“그리고 이혼도 남편이 먼저 이야기를 꺼낸 게, 당시 나에게 ‘진심으로 미안하다. 지금까지 많이 미안했고 당신을 볼 낯이 없고, 이제는 정말 미안해서 더 이상 당신을 잡지도 못하겠다’라고 하더라, 한편으론 그 사람도 가족 없이 혼자였으면 지금처럼 힘들지 않았겠지 싶더라. 가장에게는 늘 무슨 일이 생길 때마다 가족이 짐처럼 따라다니듯이, 김동현 씨도 이제 무슨 일이 잘못될 때마다, 혹여나 내가 알게 될까, 가족들에게 피해가 갈까 노심초사하지 않아도 되겠구나 생각하니 다행이다 싶기도 하다”

“그리고 사실 한동안은 누구에게도 이혼 사실을 알리지 못했다. 왜냐하면 더 이상은 구설수에 오르지 않고 보란 듯 잘 살아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 딸이 그러더라 ‘엄마 왜 그런 걱정을 하고 그래, 요즘에는 이혼하는 거 흉도 아니야. 아무것도 아니야. 엄마는 이제 가수 혜은이로 살아’라는 딸의 말에 그렇게 안심이 될 수가 없더라. 지금까지 나는 두 인생을 살아온 것 같다”

“하나는 가수 혜은이로서 너무 많은 사랑을 받았지만, 또 다른 인생은 가정사로 인해 말도 못 할 고생을 하며 살아왔던 거다. 하지만 이제 과거에 내가 어떠했는지 필요 없는 이야기다. 현재와 미래에 내가 있을 뿐이다. 앞으로 나의 꿈은 누구보다 행복한 사람이 돼서 노래만 하다가 하늘로 가는 거다”라고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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