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이제서야 알려진 가수 패티김이 길옥윤과 이혼을 결정한 눈물겨운 사연.. 운명이 뭐라고…

패티 김은 1938년에 서울에서 태어났습니다.

패티김

그녀의 아버지는 가족은 금광 채굴로 부자가 되었지만, 해방 후 신문을 창간하고 사회, 학술단체를 운영하면서 생활이 어려워졌다.

패티킴은 어려서부터 노래를 잘하는 가수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이미 중앙여고에 재학하면서 학교 행사를 장악할 정도로 노래에 재능이 있었고, 국립국악원에서 공부하면서 국악 콩쿠르에서 1등을 할 정도로 국악 실력이 뛰어났다.

그러나 아버지는 “국악에 빠지면 기생충이 된다”며 만류해 국악을 포기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그녀는 어느 날 서울 명동 거리에서 패티킴을 만났고, 패티킴이 노래를 잘한다는 것을 아는 오빠의 친구가 베니킴을 소개했다.

 

 

베니 김은 트럼펫 연주자로 기획사 ‘화양’을 이끌며 미 8군 무대에서 활약하는 ‘미 8군 무대의 대부’였습니다.

그렇게 패티 김은 미 8군 무대에 올랐고, 첫 무대부터 미군들이 내지르는 환호성과 휘파람 소리가 여기저기서 요란했는데요.

그렇게 노래를 부르던 패티 김은 1959년에 김혜자라는 본명 대신 ‘린다김’이라는 예명으로 솔로로 데뷔하게 됩니다.

당시 패티 김의 키는 다른 여자 가수보다 머리 하나가 더 큰 168cm였는데요.

게다가 인형처럼 가만히 있어서 노래를 부른 다른 가수와 달리 마이크를 들고 무대를 누비고 다녀 금방 눈에 띄었고, 키가 크고 노래 잘하는 가수가 나왔다는 소문이 미 8군 무대 주위에 퍼지게 됩니다.

 

그러다

그녀는 1960년에 일본에 왔고, 엔카 가수가 가장 많은 일본에서 팝송을 부르면서 자연스럽게 그녀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이때 패티킴은 일본에서 활동하던 길옥윤을 처음 만났다.

길옥윤은 이미 일본에서 유명한 재즈 뮤지션으로 패티킴과 함께 일본 TV에 출연한 바 있다.

이후 패티킴은 “미국 유명 가수 패티 페이지만큼 유명해지라”는 친구의 권유로 ‘린다킴’에서 ‘페티킴’으로 이름을 바꿨다.

어느 날 미국인 한 명이 그녀를 찾아와 미국 입국을 제안했습니다.

패티킴은 미국 라스베이거스의 여러 라운지에서 노래를 불렀지만, 공연 메인 무대에 서는 기회는 거의 없었다.

미국에서 이름을 유명하게 만드는 것은 하늘에서 별을 찾는 것만큼 간단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라스베거스 생활 1년 8개월 만에 뉴욕으로 이주해 2년 동안 블라인드 오디션을 봤으나 기회가 오지 않았고, 돈이 부족하고 지칠 때 패티킴에게 연락이 왔다. 그 사람의 어머니가 위독해서 직장을 그만두고 집에 오실 거예요.

한편 길옥윤 씨도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한 달 전 일본에서 귀국했다.

 

 

길옥윤과 패티 김이 연이어 귀국하자 방송사들은 두 스타를 함께 묶는 특집 프로그램을 기획했고, 인터뷰를 할 때도 두 사람을 같이 불렀습니다.

패티 김이 새롭게 발표하는 노래는 계속 히트를 치고 공연은 매진되기 일쑤였습니다.

색소폰을 부는 길옥윤의 모습도 매력적이어서 두 사람은 함께 공연을 할 때가 많았고, 자연스럽게 가까워지게 되는데요.

길옥윤은 당시 일본의 동거녀가 있었으나, 당찬 모습에 패티 김에게 호감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패티 김은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면 다시 미국으로 떠날 예정이었습니다.

 

출국 날이 다가오자

길옥윤은 애가 탔고 그때의 심정을 담은 노래 ‘4월이 가면’을 작곡해 4월 어느 날, 늦은 밤에 패티 김에게 전화를 걸어 노래를 들려주게 되는데요.

‘눈을 감으면 보이는 얼굴’, ‘4월이 가면 떠나갈 사람’이라는 가사를 썼고, 페티 김은 길옥윤이 내성적이라 표현을 못 하니까 노래로 프러포즈를 한 것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렇게 패티 김은 위문 공연 차 동승한 버스 안에서 길옥윤에게 결혼하자고 먼저 제안을 하게 되었고, 결국 두 사람은 워커힐 호텔에서 수많은 하객이 지켜보는 가운데 결혼식을 성대하게 올리게 되는데요.

주례는 김종필 당시 공화당 의장이, 사회는 ‘후라이 보이’로 유명한 곽규석이 맡았습니다.

김종필은 “날 때부터 우는 아기 대신 노래하는 아기를 낳으라”라고 당부해 장내를 메운 하객들을 웃겨주었는데, 당시 길옥윤은 39살 페티 김은 11살 적은 28살이었습니다.

부부 콤비의 활약은 결혼 후 더욱 왕성했습니다.

무엇보다 패티 김의 가창력, 패티 김이 소화할 수 있는 능력을 길옥윤만큼 더 잘하는 이는 없었습니다.

‘서울의 찬가’, ‘못 잊어’ 등 주옥같은 곡들이 쏟아져 나왔고, 두 사람은 1968년 첫 딸 정아를 낳게 되는데요.

결혼 생활 모든 것이 순탄해 보였던 두 사람.

하지만 길옥윤의 음주벽이 문제였습니다.

결혼 전에도 술에 쩔어 살았지만, 결혼 후에도 술자리가 있으면 그냥 지나치지 못했습니다.

사실상 알코올 중독이었는데 결혼 후 길옥윤은 맑은 정신으로 집에 들어온 날이 거의 없었고, 포커를 치다가 며칠씩 안 들어올 때도 있었는데요.

그는 여기저기 권하면 먹고 마시고 잠자고 하는 바람에 별명이 ‘길삿갓’이었을 정도로 패티 김과는 삶의 방식이 완전히 달랐습니다.

 

 

게다가 두 사람 간의 서로 다른 성격도 갈등을 부채질했습니다.

길옥윤은 낭만적이고 방랑하는 성격에 술을 좋아한 반면 패티 김은 의지가 굳고 침착했으며 계획성이 강했습니다.

길옥윤이 술을 좋아하는 낙천가이자 하루하루 즐기는 스타일이었다면, 패티 김은 1년이든 10년이든 계획한 대로 벗어나지 않고 사는 스타일이었는데요.

 

패티 김은

이런 길옥윤이 너무 화가 났지만 쉽게 헤어질 수는 없었습니다.

아이가 있는 데다 자존심과 체면 때문이었는데요.

이런 와중에 길옥윤이 연이어 사업에 실패하자 두 사람은 결국 별거에 들어가게 됩니다.

길옥윤은 재즈를 배운다며 홀로 미국으로 떠났는데, 별거 중 길옥윤은 미국에서 페티 김에게 전화를 걸어 나지막한 목소리로 노래 한 곡을 들려주게 됩니다.

페티 김은 그 노래 제목을 ‘이별’로 정했고, 노래가 발표되자 부부의 이별을 암시한 것이라며 사람들이 수군댔는데요.

노래는 그의 가요계를 휩쓴 최고 히트곡이 되었지만, 두 사람은 결국 조선호텔에서 이혼 발표 기자회견을 하게 됩니다.

이혼 발표인데도 사회자 곽규석까지 있었고, 그 후 이혼식이라는 신조어도 만들어지게 되는데요.

 

이혼 후

패티 김은 정신적으로 힘들었습니다.

패티 김이 착한 남편을 헌신짝 버리듯이 버린 나쁜 여자이고, 길옥윤은 불쌍한 남자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길옥윤을 발로 차고, 외국 남자하고 연애하다 헤어졌다’라는 소문까지 돌았습니다.

그러나 패티 김은 이혼 사유를 밝히지 않고 그냥 성격 차라고만 말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헛소문이 잦아들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자신의 자존심도 지키고 싶었고, 길옥윤의 자존심도 지켜주고 싶었습니다.

다행히 길옥윤이 ‘모든 원인은 나한테 있다’라고 패티 김을 두둔했는데요.

그렇게 패티 김이 비난과 오해 속에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그녀의 열렬한 팬이라는 외국인이 접근하게 됩니다.

그는 미국에서 무역업을 하는 이탈리아 출신의 동갑내기 아르만도 게디니었습니다.

그가 패티 김을 알게 된 것은 사업차 한국을 드나들면서였는데요.

게디니는 호남형에 유머러스한 남자였고, 패티 김이 학을 뗀 술은 아예 입에 대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서로 호감을 갖고 있던 어느 날, 게디니가 노란 장미 백송이를 보내왔는데요.

이후에도 50일간 매일 장미꽃을 100송이씩 보내왔습니다.

둘 사이에 사랑이 싹트자 게디니가 “당신이 아이를 낳아주면, 아이 몸무게만 한 보석을 선물하겠다”라며 청혼을 하는데요.

페티 김이 청혼을 받아들여 두 사람은 미국 뉴욕에서 결혼하게 됩니다.

페티 김이 그의 딸 카밀라를 낳자 게디니는 청혼할 때 약속했던 대로 사파이어를 선물했는데요.

다시 안정을 찾은 패티 김은 당시 국내 대중가수로는 최초로 세종문화회관 무대에 서는 등 활발하게 활동하게 됩니다.

한편 길옥윤은 일본에 머물며 침체와 우울과 방랑의 세월을 보내다 다시 의욕을 되찾아 신인 발굴에 나섰는데, 그때 발굴한 가수가 무명의 혜은이었습니다.

‘당신은 모르실 거야’와 ‘당신만을 사랑해’로 혜은이를 정상에 올려 제2의 전성기를 구가했고, 이후 스물네 살 연하의 여성과 결혼해 딸을 얻었는데요.

 

그러다가

어느 날 골수암으로 집 앞 계단에서 쓰러져 병상에 눕게 됩니다.

이 소식을 들은 패티 김은 길옥윤이 초라하게 죽게 내버려 둘 수 없다며 여기저기에 도움을 청하게 되는데요.

패티 김은 ‘죽을 날을 기다리고 있는 길옥윤의 명예를 회복시켜주어야 한다’라며 sbs에서 ‘길옥윤 이별 콘서트’ 특별 생방송을 하도록 손을 씁니다.

길옥윤이 휠체어에 몸을 의지한 채 진행된 콘서트 무대에는 파경 이후 공석에서 길옥윤의 노래를 거의 부르지 않았던 패티 김도 ‘4월이 가면’ 등 다섯 곡을 열창했는데요.

그러나 결국 이듬해 길옥윤은 눈을 감게 됩니다.

그가 병상에서 작곡한 신곡 8곡과 ‘4월이 가면’ 등 옛 노래 2곡은 그가 죽고 한 달 뒤에 패티 김이 부른 유작 앨범으로 발매되는데요.

길옥윤이 죽기 전 병상에서 입버릇처럼 ‘나의 곡을 가장 잘 부를 수 있는 사람은 패티 김’이라는 말을 한 것을 전해 듣고 패티 김이 받아들인 것이었습니다.

이후 패티 김은 가수 은퇴 선언을 했다가, 은퇴 후 10년 만에 kbs ‘불후의 명곡’에 출연함으로써 건재를 과시했는데요.

젊은 시절부터 많은 역경과 시련을 거치며 살아온 가수 패티 김.

이런 그녀에게 죽는 순간까지 노래를 선물했던 길옥윤의 명복을 빌며, 이제 어느덧 여든이 훌쩍 넘어 황혼을 보내고 있는 가수 패티 김의 행복한 인생을 응원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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