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은 가수 송대관이 불러 공전의 히트를 쳤던 해뜰날을 아십니까 이 노래의 키워드는 바로 희망으로 지금 당장 힘들더라도 낙심하지 말고 견디다 보면 좋은 날이 찾아온다는 위로와 희망의 노래입니다.
한편
그리스 신화에서는 판도라가 호기심을 참지 못해 절대 열지 말라는 제우스의 명령을 어기고 상자를 여는 순간
증오 분노 가난 고통 질병 등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나쁜 것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순간 당황한 판도라는 상자의 문을 황급히 닫게 되는데 하지만 이때 상자의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것이 송대관의 노래처럼 바로 희망이었습니다.
오늘의 주인공 노지훈 역시 앞서 얘기한 판도라의 상자처럼 중학교 3학년의 나이로 부모님 두 분을 모두 여리고 국가대표 축구선수가 되었지만 야심차게 준비했던 방탄소년단을 나와 14년간 고생만 하다 결국 해서는 안 될 나쁜 생각까지 하며 최근에는 둘째 아이까지 유산해야 했던 노지훈 그의 파란만장한 인생에 대해 말해보고자 합니다.
1990년
1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난 노지훈은 지금의 트로트 가수와는 어울리지 않게 11살 때부터 축구 선수로 활약하다 중3 때는 청소년 국가대표가 될 정도로 굉장한 축구 유망주였습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건 누구보다 그의 국가대표 발탁을 기다리고 바라던 아버지가 국가대표가 되기 1년 전에 암투병 끝에 돌아가시면서 당시 유언이 가슴에 태극마크를 꼭 달았으면 좋겠다고 하셨는데 결국 진짜로 되었으나 아버지께는 보여드리지 못했습니다.
한편 축구대회 기간에 아버지의 부고를 접하면서 당시 감독님이 그에게 지우나 괜찮아 충격이 클 텐데 너 하고 싶은 대로 해라 당분간은 운동은 쉬어도 되니 편하게 하라며 배려를 해주었습니다.
그런데 더욱 안타까운 건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얼마 안 돼 하루는 감독님이 그에게 지훈아 지금 나와 갈 때가 있다며 차를 타고 병원으로 향하는데 도착 10분 전에 말하길 지훈아 놀라지 말아라 어머니가 위독하시다 라고 했습니다.
당시 어머니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게 충격이 너무 큰 나머지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단 12일 만에 쇼크로 어머니마저 돌아가시고 말았고 그렇게 노지훈의 부모님은 아버지가 47살 어머니가 39살이라는 너무나도 젊은 나이에 3남매의 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이때 장례를 치르는 동안 눈물 한 방울도 흘리지 않았던 노지훈은 당시 누나들과 친척들이 독한 애다
부모님 상에서 어떻게 저렇게 눈물 한 방울 안 흘리냐고 했는데 훗날 그의 고백에 따르면 그때는 실감이 안 나기도 했지만 자신까지 무너져 버리면 우리 가족이 다 무너진다 라는 마음이 컸었다고 했습니다.
이와 관련해 노지훈의 누나가 고백하길 엄마가 돌아가시기 직전 기다리고 계셨다가 지훈이가 딱 오니까 보고 나서야 눈을 감으셨다.
그런데 이후 장례식을 하는데 지윤이가 울지를 않더라 그래서 지훈아 울어도 돼 그랬더니 동생이 하는 말이 내가 울면 누나들이 무너지잖아 딱 이 말을 하는데 너무 속상했다. 그 어린 게 뭐 한다고 라고 했습니다.
아무튼 그렇게 부모님의 장례를 치르자마자 국가대표로서 바로 훈련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슬픔도 잊을 만큼 바쁜 일정을 소화해야만 했고 그러고 나서 일주일 정도 뒤에 정말 지금도 생생히 기억이 날 정도로 참았던 눈물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쏟아지고 말았습니다.
당시
하루 일과를 끝낸 뒤 여느 날처럼 합숙소에서 청소하고 이불을 깔고 지침 준비를 하며 다들 예능 프로를 보면서 깔깔깔깔 웃고 떠드는 분위기였는데 그런데 갑자기 그 순간 그동안 참고 참았던 눈물이 터져 이불을 뒤집어쓰고 오열을 하는데 당시 숙소에 있던 친구들이 분위기가 쌓여질 정도로 혼자서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울고야 말았습니다.
이와 관련해 노지훈 그가 고백하길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불과 14일 만에 어머니마저 쇼크로 아버지를 따라가시니까 많은 분들이 그런 얘기를 하시더라 너희 부모님은 천생 연분이었나 보다 아버지가 어머니를 보고 싶어 해서 모셔갔다.
이렇게 말씀해 주신다 하지만 당사자인 우리는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지금 그때를 생각해 봐도 이런 드라마 같은 일이 어떻게 나한테 일어나지 싶고 당시에는 부모님을 많이 원망했었다.
날 왜 이렇게 불행하게 만드냐 남들은 엄마 아빠랑 외식도 잘하고 놀러도 가고 하는데 왜 나만 힘들게 살아야 하냐며 당시 내가 겪었던 불행의 모든 것들이 어린 마음에 전부 부모님의 탓 같았다.
라고 했습니다.
아무튼 이후 세상에 남겨진 3남매는 1년은 막내 작은아버지 집에서 살고 2년은 큰 고모 집에서 살고 또 1년은 둘째 작은아버지 집에서 사는 등 당시 여러 친척집을 전전하며 그렇게 이제 떠돌이 아닌 떠돌이 생활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친척들이 돈이 많이 들어가는 노지훈의 운동 뒷바라지까지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누나들이 그의 뒷바라지를 하게 되는데 당시 두 누나들이 꿈과 학업까지 포기하고 바로 생활전선에 뛰어들어 그냥 오로지 돈만 벌면 어린 동생의 꿈을 위해서 자신들은 희생하게 됩니다.
이와 관련해 노지훈의 누나가 고백하길 지훈이한테는 정말 미안한데 부모님이 동생이라는 짐을 떠넘기고 간 것 같았다.
그래봤자 우리들도 나이가 20살 21살이었는데 그 나이에 감당하기에는 너무 힘들었다.
당시 동생이 축구 선수로 재활도 해야 해서 한 달에 몇 백을 내야 하는데 우리가 무슨 수로 한 달에 몇 백을 벌겠나 그냥 잠 안 자면서 아르바이트 34개에 가면서 어떻게든 돈 메꾸고 그래서 엄마 아빠가 너무 싫었다.
그렇다 보니 그때는 굳이 축구를 계속해야 하는가 이런 생각도 했었고 도망치고 싶고 이해할 수도 없었다 라고 했습니다.
아무튼 이처럼 두 누나들 덕분에 축구를 계속할 수 있었던 거는 당시 본인도 그걸 아니까 내가 축구를 열심히 잘 해야 장학생으로 다닐 수 있겠구나 싶어 죽어라 축구만 열심히 했고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내 축구를 그만두게 되는데 많은 이유들이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부상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그는 십자인대 파열 수술을 두 번이나 하는 큰 부상을 입었고
그리고 중학교 3학년 때 첫 수술을 했는데 1년 정도를 제안을 해서 복귀를 했으나 복귀한 당일날 또 상대편 친구가 그의 무릎 위에 앉아버려 다시 재수술이 되는 바람에 제 알만 3년 정도 하다 보니 이 몸으로 더 이상 축구는 안 되겠구나 싶어 결국 열아홉살 때 축구를 그만두게 됩니다.
한편
오직 축구만 했던 그가 축구를 그만두고 나서 무엇을 할까 고민하다가 갑자기 가수의 꿈을 꾸게 되는데 그 이후로는 당시 힘들거나 위로를 받고 싶을 때마다 노래를 부르고 듣던 게 취미이자 특기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막상 노래를 하려고 하니까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몰라 고민을 하다가 일단 무작정 홍대를 갔고 그리고 눈에 보이는 어느 한 연습실에 들어간 뒤 마침 음악하는 사람들이 있길래 모르면 용감하다고 했던가 대뜸 노래 좀 가르쳐주세요 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안에 있던 사람들이 너무 대단하네 그럼 청소부터 해라고 해서 그날부로 청소를 하면서 어깨 너머로 노래를 배울 수 있었고 그런데 당시 이 연습실은 정말 모르고 갔었는데 알고 보니 그룹 시나이의 연습실이었습니다.
이처럼 홍대에서 노래를 배운 뒤 아이돌이 되고 싶어 여러 오디션을 봤으나 산이 높다는 걸 깨닫고 이 길이 아닌가 싶어 또다시 힘들어 하던 중 그런데 하루는 tv를 보는데 mbc에서 위대한 탄생이라는 오디션 프로그램 모집 공고를 보고 이게 또 운명인가 싶어 바로 지원하게 됩니다.
그렇게 참가한 오디션에서 to a까지 올라가 처음으로 대중들에게 축구 선수 노지훈이 아닌 노래하는 노지훈으로서 이름을 알릴 수 있었고 그리고 이를 계기로 방탄소년단을 만든 방시혁의 소속사의 연습생이 되어 무려 2년간 지금의 방탄소년단의 멤버들과 동거를 하며 가수 데뷔를 준비하게 됩니다.
그래서
한때는 그가 방탄소년단의 멤버가 될 뻔했으나 하지만 꿈이 솔로 가수였던 그는 제2의 비를 꿈꿨었고 그런데 때마침 비를 발굴했던 대표님이 실제로 그에게 제2의 비를 만들어 줄 테니 오라는 러브콜을 받고 방탄소년단의 회사를 나와 존경하는 선배 비가 있는 회사로 이적하고 말았습니다.
참고로 훗날 그때 방탄소년단의 회사에서 나온 게 후회가 되지 않냐는 질문에 그가 대답하길 근데 이게 또 자리가 있다고 내 자리가 아니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때 돌아가서 계속 있었다고 한들 내가 방탄이 되기는 힘들었을 거다 라고 했습니다.
아무튼 이후 솔로 가수를 준비하던 그는 여전히 이때도 가진 것이 없다.
보니 정말 서럽고 힘들게 연습생 시절을 보내야 했는데 그중 가장 힘들었던 건 마음껏 먹을 수 없는 서러움이었습니다.
당시 하루에 새끼는 정말 사치였고 그런데 연습량은 또 너무 많아
한 끼만 먹으면서 하는 건 불가능했기 때문에 어떻게 하면 좋을까 하다가 아이디어를 낸 게 바로 도시락 하나로 두 끼 먹기였습니다.
당시 도시락 하나를 사서 우선 점심 때 한 끼를 먹는데 솔직히 너무 배가 고파 한 번에 다 먹고 싶지만 그러면 저녁에 먹을 게 없으니 딱 밥만 먹고 덮어 놓아야 했고 그리고 저녁에 점심 때 남겨둔 도시락을 다시 꺼내 먹는데 그 생활을 무려 6개월간 지속하게 됩니다.
그렇게 열심히 준비를 해서 마침내 솔로 가수로 가요계에 데뷔를 했지만 그런데 기대와 달리 이렇다 할 성적을 거두지 못해 사실상 망한 거나 마찬가지였고 그래서 이때 그는 깊은 좌절감으로 오랜 기간 슬럼프를 겪고 한때는 해서는 안 될 나쁜 생각까지 하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축구를 그만두고 야심차게 준비했던 가수까지 망해버리자 하루하루를 절망의 늪에 빠져 살다가 하루는 평소에 알고 지내던 그때는 친구였던 지금의 아내에게 전화를 걸어 나 너무 힘들다 이젠 모든 걸 다 포기하고 싶다며 자신의 힘든 심정을 고백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때 친구였던 아내가 너무나도 따뜻하게 그동안 많이 힘들었지 라고 하는데 딱 그 한마디에 그간 힘들었던 마음이 눈 녹듯이 사라져 이후 7년 친구였던 아내가 여자로 보이기 시작해 3개월 연애 후 두 사람은 부부가 되게 됩니다.
한편 그에게는 신내림을 받은 무당 삼촌이 있는데 트로트 붐이 일어나기 훨씬 전부터 반드시 트로트를 해야 된다며 무려 1년간 그를 설득했고 그리고 처음에는 무슨 트로트냐 했지만 그런데 어느 순간 기존에 했던 음악들을 트로트로 소화하면 노지훈만의 트로트를 보여줄 수 있겠다는 생각에 결국 트로트 가수로 전향하게 됩니다.
그런데 마침 삼촌의 말대로 대한민국에는 그야말로 트로트 열풍이 불자 그도 미스터 트롯에 참가하게 되었고 그리고 준결승전 직전까지 올라가 마침내 트로트 가수로서의 노지훈을 각인을 시키는 데 성공하게 됩니다.
그리고 2년 뒤 미스터 트로 2에 또다시 도전하게 된 그는 그런데 아쉽게도 예전보다 더 일찍 탈락하며 실력 발휘를 제대로 하지 못하게 되는데 이와 관련해 그가 고백하길 사실 프로는 무대에서 변명이 필요 없는데 굳이 핑계를 대자면 그때 당시 공교롭게도 나를 키워주신 작은 고모께서 돌아가셨다.
그렇다
보니 경연에 집중할 수가 없었고 그래서 나로서도 너무 아쉽다라고 했습니다.
한편 살림남이라는 프로를 통해 아들 이안을 공개했던 그는 당시 어린이집 선생님으로부터 아들이 또래 친구들과 잘 지내지 못한다는 얘기를 듣고 한때는 아들의 자폐 스펙트럼을 걱정하며 시청자들에게 안타까움을 주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중 기다리던 둘째 아이를 가져 남자 아이일까 여자아이일까 또 어떤 성격일까 생각하며 밤마다 설레했으나 하지만 정말 안타깝게도 둘째 아이는 계류유산으로 떠나보내고 말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