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용 끝내 눈물겨운 소식…” 지난 세월 가족 몰래 비닐하우스 생활 전전하다가 급작스럽게 전해진 그의 소식통은 모두를 오열시키고…

최근 채널 ‘배짱이 엔터테인먼트’에는 ‘뽀빠이 이상용 대 만신들, 생매장 당했었다’라는 제목의 영상이 게재됐습니다.

이날

게스트로 출연한 방송인 이상용은 다리가 불편한 채로 등장하여 출연자의 부축을 받으며 녹화장에 입성해 눈길을 끌었는데요.

이에 이상용은 “최근에 계단에서 내려오다가 굴러 다리가 골절됐어요. 올해가 삼재라고 하더라고요”라고 털어놨습니다.

이어 그는 여러 건강 문제를 겪고 있다고 고백했죠.

이상용은 ‘최근에는 전립선 때문에 병원에 다녀왔어요. 화장실이 자주 가고 싶어 촬영하다가도 미치겠는 거예요. 결국, 아내와 함께 병원에 가 검사를 받았는데 의사 선생님의 결과를 보더니 ‘왜 이렇게 사셨냐’라고 하더라고요”라고 전했습니다.

 

이어

“전립선에 문제가 있으니 수술을 하자고 했는데, 당뇨가 심해서 수술이 안 될 것 같다고 하더라고요. 당 조절이 먼저인 것 같다고 해서 약도 먹고, 식습관을 조절했는데, 입맛이 없어 밥을 안 먹다 보니 5kg이 빠지기도 했죠”

“그래서 요즘에 하루 한 끼는 최고급 식사를 해요. 하루는 소고기 하루는 오리고기 이런 식이죠. 그러다 보니 근력이 났어요”라고 회복된 근황을 전했습니다.

또한 그는 “많은 국민들이 ‘뽀빠이’는 제일 아프면 안 되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병원에 위문을 가면 ‘뽀빠이도 병원에 오네’라고 놀라죠. 요즘엔 절룩거리니까 자녀들한테 제 안부를 묻는 사람들이 많다고 하더라고요”라고 덧붙였습니다.

 

 

한편, 올해 나이 80세인 이상용은 지난 1975년 KBS 어린이 노래 프로그램 ‘모이자 노래하자’에서 MC를 맡으면서 ‘뽀빠이’라는 별명을 얻었죠.

이후 1989년부터는 MBC 군대 위문쇼 프로그램 ‘우정의 무대’의 MC로 큰 인기를 누렸습니다.

이상용은 미숙아로 태어나 너무나 병약해서 가족들은 그가 살 가망이 없다고 판단해 그를 생매장했죠.

다행히 당시 12살에 불과했던 이상용의 막내 이모가 몰래 이상용을 구해 내어 산으로 도망쳐서 혼자 키우게 됩니다.

이상용은 미숙아로 태어난 탓에 유아기 내내 병마에 시달렸고 6살이 되어서야 걸음마를 간신히 시작하였죠.

심지어 열두 살까지, 8가지 성인병을 다 앓았습니다.

그는 너무나 병약해서 책가방을 들 힘조차 없을 정도로 연약했죠.

이상용은 어릴 때를 회상하며 “일제 말기 1944년, 일자리를 얻는다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였어요. 제가 세상의 빛을 보기 전 일이죠. 돈 벌러 간 남편이 감감무소식이자 어머니는 이리저리 수소문을 했어요. 북한 회령 땅이라는 소식을 듣자, 어머니는 아버지를 찾기 위해 충남 서천에서 백두산까지 무작정 걸었죠. 산을 넘고 강을 건너고 배가 고프면 나무뿌리를 질겅질컹 씹으며 허기를 채웠어요. 뱃속의 아이가 영양 공급을 제대로 받지 못한 것은 당연했죠. 허약아를 낳을 수밖에 없었던 거예요”라고 전했습니다.

이어 “약 한 달 보름을 걸어서 회령 땅에 도착한 어머니는 임신 8개월에 접어든 상태였고, 아버지는 젊은 여자와 딴 살림을 차린 상태였어요. 결국 어머니는 홀로 친정집 부여로 향했죠. 하지만 ;뱃속에 있는 아이는 낳는 대로 시댁에 갖다주고 재가를 해라’라는 집안 어르신들의 호통만이 어머니를 반겼을 뿐이었어요. 누구도 축복해 주지 않는 가운데 제가 태어났죠. 숨소리조차 고르지 못한 병약한 절을 돌봐줄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어요. 외가에서는 맑은 영혼을 하늘로 돌려보내는 것이 차라리 나을 것이라고 결론지었죠”라고 말해 안타까움을 전했습니다.

 

그러면서

“구덩이 속에 던져진 채 모래 흙에 반쯤 잠길 무렵, 여중생이던 이모가 저를 구출했어요. ‘갓난아기가 무슨 죄가 있다고 이러는 거여’라며 이모는 울부짖으며 저를 구덩이 속에서 꺼내안고 천보산으로 도망갔죠. 그리고 ‘저를 살려주지 않으면 함께 목숨을 끊겠다’라며 산속에서 일종의 농성을 했어요. 그렇게 해서 제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났죠”라고 덧붙였습니다.

이후 이상용은 10대 초반부터 이를 극복하기 위해 불굴의 노력으로 보디빌딩을 시작했고, 고등학교에 입학할 때쯤 되어 다른 평범한 아이들 수준으로 체력을 끌어올리는 데 성공했죠.

 

 

그리하여 고등학교 때 ‘미스터 대전고’를 수상했고, 고려 대학교에 진학해서는 대학 보디빌딩 대회에서 우승하여 ‘미스터 고대’로 등극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이외에도 이상용은 고려대 응원단장으로 활약하기도 했죠.

이상용은 ROTC5기 장교로 군에 복무했고, 병과는 기갑으로 전차 소대장을 역임했는데요.

1967년 육군 소위 임관 후, 베트 전쟁에 1년간 참전하기도 했죠.

 

그리고

이후 1970년 전역하고 나서는 외판원이나 보험설계사 등으로 간신히 먹고살다가 CBS 기독교 방송의 진행자로 방송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친분이 있는 변웅전 아나운서의 소개로 MBC ‘유쾌한 청백전’에 출연하게 되면서 1973년 처음으로 티비에 모습을 드러냈고, 패기있는 신선한 젊은 코미디언으로 언론의 주목을 받기 시작하였죠.

특히 1989년부터 그가 장기로 군 복무한 점이 인정되어, MBC ‘우정의 무대’의 MC로서 발탁되었고, 이로 인하여 군인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죠.

이후 KBS 어린이 노래 프로그램 ‘모이자 노래하자’에서 진행 보조를 하다가 MC로 승격하면서 ‘뽀빠이’라는 별명을 얻으며 큰 인기를 누렸습니다.

이후 방송인으로 성공한 이상용은 심장병 어린이 수술 후원금 횡령 사건에 휘말리게 되는데요.

이에 대해 이상용은 “그때 상상도 할 수 없이 고통을 많이 받았어요”라고 언급했습니다.

 

 

이어 아내 윤혜영은 “나중에 다 아니라고 밝혀졌어요. 그런데 아무 방송국에서도 무혐의라고 말해 주지 않았죠”라며 억울함을 호소하기도 했죠.

이상용은 심장병 어린이를 돕기 위해 헌신했으며, ‘한국 어린이 보회’라는 재단을 설립했고, 560명이 넘는 아동들의 수술을 도와주기도 했습니다.

이상용 또한 600만 원 전셋집에 살 정도로 형편이 좋지 않았는데, 야간 행사를 세 달 뛰어 선불을 받아 수술비를 마련하였죠.

 

그러던

중 1996년 심장병 어린이 수술비 횡령 의혹을 받게 되면서 대중들은 그에게 큰 실망을 하게 되죠.

이 사건으로 인해 맡고 있던 프로그램에서 하차를 하게 되면서 방송계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당시 김영삼 대통령의 아들인 김현철이 이상용에게 신한국당 국회의원으로 정계에 진출하라고 권유했던 적이 있는데, 이상용은 이를 거절했죠.

그리고 이 억울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이상용은 3개월간의 의혹 끝에 무혐의로 불기소 처리되며 누명을 벗게 되었는데요.

무혐의로 밝혀졌지만, 방송 재개는 쉽지 않아 결국 홀로 미국으로 떠나게 되죠.

미국에 간 이상용은 관광버스 가이드를 하며 가족들을 위해 돈을 모았습니다.

 

이후

한국에 다시 돌아와 가족들 모르게 비닐하우스를 전전하며 가장으로서 생계를 책임졌죠.

이상용은 1967년 경 지금의 아내 윤혜영과 결혼했는데요.

두 사람은 1944년생으로 동갑이죠.

물론 방송에서 이상용은 ‘아내 윤혜영이 한 살 더 많다’라고 말해왔는데, 실제로는 둘이 출생연도는 같지만 아내 윤혜영이 이상용보다 생일만 4개월이 빠르고 또 대학교 1년 선배이다 보니 그렇게 말하게 된 것이라고 하네요.

이에 대해 이상용은 “아내가 고려대학교 1년 선배였어요. 정말 아름다워서 첫눈에 반했었죠. 당시 애인이 있었는데, 헤어지고 아내에게 정식으로 대시했었어요. 물론 처음에는 말을 안 듣더라고요”라고 당시를 회상했습니다.

 

이어

“누나를 부르기 위해 도봉산의 집 한 칸을 하루 만에 지었어요. 그게 4월 30일이었는데, 청혼 예정일이었죠. 물론 누나는 몰랐었고요. 저녁 9시부터 결혼하자고 빌어서 새벽 네 시에 응답받았죠. 그래서 바로 결혼했어요”라고 밝혔습니다.

그러면서 이상용은 “아내가 키가 더 크죠. 그래서 우리는 둘이 앉아서 이야기합니다. 아내가 키도 크고 나이도 저보다 많아요. 절 선택해 준 것에 늘 감사하며 사랑해요. 처음에는 ‘누나’라고 부르다 호칭도 바꿨죠”라고 덧붙였습니다.

이상용은 아내와 결혼 이후 도봉동 방 한 칸에서 어렵게 결혼 생활을 시작해 한동안 고생도 많이 했는데요.

그는 방송을 통해 “방 한 칸에서 우리 딸까지 세 명이서 살았어요. 그래서 외판원을 시작했죠. 아내도 고생했어요”라며 오징어, 미역 등을 팔았던 과거를 회상하기도 했습니다.

모쪼록 건강 잘 챙기시길 바라며, 좋은 일 가득하셨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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