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작스런 이휘향 남편 김두조의 눈물겨운 소식… “이렇게 허망하게 갈 줄이야…” 충격 그녀의 “실토 내용” 을 알아보세요..

이휘향 남편 김두조 씨, X폭 출신 사업가의 죽음.

옛날 여자 연예인들 중에서는 조직폭X배와 연관이 깊은 이들도 있었습니다.

90년대

이전에만 해도 조X들이 돈 되는 연예계에 진출했고, X폭 출신 매니저들도 많았습니다.

그래서 강압적인 방법으로 결혼을 하는 커플들도 종종 있었죠.

탤런트 이휘향 남편 김두조 역시 조X 출신이지만, 이들의 결혼생활은 조금 달랐습니다.

 

 

올해 64살 탤런트 겸 영화배우 이휘향은 1960년 10월 1일에 태어났습니다.

이휘향은 숭의여자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서울예술대학 연극과에 진학했는데요.

 

1981년

이휘향은 미스 MBC 선발대회 준 미스로 데뷔하면서 자동으로 1982년 MBC 공채 14기 탤런트로 얼굴을 알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녀의 연기 데뷔작은 1982년 ‘수사반장’이며, 드라마 ‘사랑과 야망’, ‘내일 잊으리’ 등으로 인지도를 쌓다가, 1990년 ‘야망의 세월’에서 크게 주목을 받았습니다.

당시 이휘향 나이가 30살이었는데. 최민식의 젊은 엄마로 좋은 연기력을 보여줍니다.

 

 

이휘향이 그런 특이한 배역을 소화해 낼 수 있었던 이유로는 일찌감치 결혼해서 아이 엄마였던 것이 연기에 큰 도움이 되었을 것 같은데요.

이휘향은 1982년에 데뷔를 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기에 포항 지역의 사업가 김두조를 소개받게 됩니다.

 

당시

이휘향은 23살의 신인 연기자였고, 김두조는 42살로 전직 조X 출신 사업가였죠.

이휘향과 김두조의 나이 차이는 19살이나 났습니다.

영화배우 문오장의 소개로 두 사람이 만났다고 하는데, 항간에는 이휘향이 김두조에게 납치되었다는 루머가 떠돌기도 했습니다.

나중에 이휘향이 이런 루머 때문에 마음고생이 심했다는 고백도 하죠.

 

 

아무튼 김두조의 적극적인 구애에 이휘향은 그와의 결혼을 결심합니다.

하지만, 집안의 반대에 부딪힌 두 사람은 어렵게 결혼식을 치르고 바닷가 옆에 텐트를 치고 살면서 아들을 낳습니다.

바로 이휘향의 외동아들 김도현이죠.

나중에 이휘향이 아들과의 루머에 대해서 고백한 적도 있었습니다.

이휘향은 “외국에서 아들이랑 같이 다니며 오해받은 적이 많다. 휴양지에서도 아들과 다정하게 다니니까 ‘이휘향이 젊은 남자랑 바닷가에 왔다’라며 한국 교민들 사이에서 소문이 이상하게 났다. 바닷가에 가면 더 편하게 아들한테 보조를 맞춰 입으니까 당연히 그렇게 보일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당시

아들 김도현은 영국에서 유학 중이어서, 영국 교민 사이에서 ‘이휘향의 젊은 남자 불륜, 외도’ 등의 루머가 돌았죠.

이휘향의 남편 김두조의 경력은 매우 다채롭습니다.

원래 포항에서는 알아주는 주먹으로 유명했다고 합니다.

‘경북매일신문’을 비롯한 지역 언론에서 그를 소개할 때마다 사용하는 문구가 바로 ‘밤의 황태자’였습니다.

하지만, 이휘향과의 결혼을 전후로 김두조는 예전 일에서 손을 씻습니다.

그리고 사업가, 권투인으로 변신하죠.

포항에서 포항권투체육관을 운영하면서 세계 챔피언 백종권 선수를 배출했고, 정통 킥복싱, 경호체육, 종합무술에 대한 조예도 남달라 세계무술경호 경북본부 회장을 지내기도 합니다.

 

또한

포항 성모자애원, 사랑의 아가페 등지에서 수십여 년간 봉사활동을 펼쳤고, 청순감호소 등 교정시설에서 위로 공연을 주최하기도 하는 등,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자선 사업가로 변신합니다.

이에 법무부 장관 표창을 3차례나 받기도 하죠.

그리고 2001년에는 자신의 재산을 한동대학교에 기증하기도 합니다.

시가 40억 원 상당의 부동산 임곡휴게소와 30여 년 동안 모아온 문화유물 5천여 점을 모두 기증한 것이죠.

참고로 임곡 휴게소는 주유소, 모텔, 민속 전시관, 역사 사진관과 레스토랑을 갖춘 종합문화휴양시설로 토지 감정 가격만 40억 원에 이릅니다.

또한 김두조가 기증한 문화유물 중에는 고려청자와 신라 토기, 1800년대 궁중에서 사용하던 촛대 등의 문화재급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휘향 역시 남편의 기증에 적극 찬성했는데요.

그녀는 “남편이 평생 모은 재산을 남을 위해 기증하게 돼 기쁘다. 인재를 양성하는 데 작은 도움이라도 됐으면 한다”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사실

평생을 모은 재산을 이렇게 선뜻 기증한다는 것은 쉽지 않을 일이죠.

아마 김두조는 자신이 입버릇처럼 말하던 인생을 알았던 모양입니다.

김두조는 “인생은 담배 연기같이 금방 사라지는 것이다. 어느 순간부터 남과 더불어 살 수 있다면 항상 그러고 싶었다. 모든 게 하나님의 뜻이겠지”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다고 합니다.

또한 의외로 김두조는 예술가적인 감성도 갖고 있었습니다.

김두조는 포항에서 사업을 했고 아내 이휘향은 서울 지역에서 연기를 했기 때문에, 이들은 오랜 기간 주말부부로 살아왔죠.

김두조는 그런 자신의 마음을 담아서 노래 ‘주말부부’를 발표하기도 하고, 바닷가 감성을 담은 ‘아주까리 부두’, ‘영일만 디스코’ 등과 ‘산다는 게 꿈이라네’ 앨범을 5장이나 발표하기도 합니다.

어릴 적에 거칠게 살아왔던 것과는 달리 음악적인 감성도 풍부했던 것 같습니다.

 

아마

어릴 적에 교육을 제대로 받았다면 또 다른 삶을 살았을지도 모르겠네요.

김두조는 잠깐이나마 가수로 활동하면서 작곡가 박성훈, 가수 설운도, 조영남 등과 친하게 지냈고, 부인 이휘향의 소개로 유퉁, 유동근, 전인화 부부 등과도 가깝게 지냅니다.

또한 김두조와 유퉁과의 인연은 유명하죠.

유퉁은 “내가 방황하던 20대에 ‘시를 쓰고 노래를 부르고 아코디언을 연주하는 주먹왕’이라는 소문을 듣고 호기심에 끌려 무작정 김두조 형님을 찾아갔었다. 부산에서 포항까지 몇 번이나 버스를 갈아타고, 형님이 운영하던 체육관에 도착해 ‘얼굴이라도 뵙고 싶어 찾아왔다’라고 했더니, 형님이 따끈하게 밥부터 먹여주었다”라고 전했습니다.

이어 유퉁은 “원래 형님도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는데, 당시에 체육관을 운영하면서 오갈 데 없는 아이들을 거두고 있었다. ‘인간이 되자. 서로 사랑하자. 참자 그리고 효도하자’라는 관훈을 내걸고, 아이들의 새 삶을 이끄는 형님의 모습을 보며 진정한 사나이는 바로 이런 모습이구나라고 생각하게 됐죠”라며 덧붙였습니다.

 

그러면서

“결국 나도 새 삶을 살아야겠다고 다짐하고 건달 생활을 청산하게 됐다”라고 밝혔습니다.

김두조가 자신의 과거를 뉘우치고 오갈 데 없는 아이들을 구원한 것은 높이 평가받아야 할 것 같습니다.

김두조는 그렇게 자선 사업을 하다가 2008년에 사망하게 됩니다.

이휘향은 “평소에 기침 증세가 있어 포항 병원에서 진단을 받아봤지만, 별 이상이 없었는데 계속 기침을 해 지난 5월 다시 서울에서 진단받아 보니 간까지 암세포가 전이돼 손쓸 수가 없었던 상황이었다”라고 전했습니다.

김두조의 측근은 “사실 자상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형님이 돌아가시기 석 달 전에 스스로 가슴을 찔러 병원에 입원했었다”라며 상황을 밝혔습니다.

그러면서 “직접 병문안을 가서 상처를 본 뒤 놀라 이유를 묻자 형님이 ‘홧김에 송곳으로 직접 가슴을 찔렀다’라고 말씀하셨다. 원래 몸이 안 좋은 상황에서 당시 입은 자상 후유증까지 겹쳐 결국 세상을 떠나신 게 아닌가 싶다”라고 전했습니다.

아마 젊었을 때의 기질이 여전히 남아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합니다.

 

결국

김두조는 2008년 9월 사망하는데 좀 기이한 유언을 남깁니다.

“내가 죽었다는 사실을 외부에 알리지 말고 가능한 조용히 장례를 치러달라”

인생을 담배 연기에 비유했던 인물답게 조용히 세상을 떠나고자 한 것 같네요.

이휘향은 “남편은 알면 알수록 좋은 사람이었다. 그 사람도 나도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운 짓을 한 적이 없다”라고 전했습니다.

사실 이휘향은 데뷔 이래 자신의 가정사에 대해 인터뷰를 한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남편이 전직 조X 출신이었기에 위에서 언급한 납치부터 시작해서 이혼, 재혼, 전 남편 등의 갖가지 루머에 시달렸기 때문이죠.

하지만, 남편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한 번쯤은 자신과 남편이 만나게 된 경위와 지나온 삶을 토로하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물론

이휘향은 김두조와 30년 넘게 결혼 생활을 했기에 그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생을 담배 연기에 비유하고 재산을 사회에 환원했으며, 자신의 죽음마저도 조용히 묻히길 바란 사람에게 ‘세간의 평가’ 따위는 일고의 가치도 없는 건지도 모르겠네요.

다만, 홀로 남겨진 이휘향이 안타깝습니다.

그간 마음고생 다한 이휘향 님에게 좋은 일만 가득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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