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안개” 처럼 떠나간 현미의 눈물 소식.. “그러나 갑자기 등장한 조문객의 정체에 모두가 충격에..” 지금 그녀의 소식을 알아보세요..

대한민국 대표 가수 현미가 향년 85세로 안타깝게 세상을 떠났습니다.

최근

현미의 팬클럽 회장 김 모 씨는 자택에서 쓰러져 있는 현미를 발견했고, 이내 경찰에 빠르게 신고한 후 인근 병원으로 옮겼었지만 야속하게도 사망 판정을 받으며 찬란한 인생을 허무하게 마쳤습니다.

경찰은 범죄 혐의점이나 극단적 선택의 정황은 없었다고 말하며 현미의 지병으로 인한 별세를 주요 사인으로 지목하는 중이지만 유족 조사 및 병원 치료 내역 검토 등 정확한 사인을 규명하는 중입니다.

 

 

이런 너무나 갑작스러운 소식에 대중들 또한 충격에 휩싸이고 있습니다.

 

사실

현미의 인생은 오래된 그녀의 유명세와는 달리 슬픔 그 자체였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엄청난 비운의 연속이었습니다.

현미는 8남매 중 셋째로, 1.4 후퇴 때 가족들과 함께 남한으로 내려왔습니다.

평양의 집이 망가져 조부모 댁에 두 여동생이 맡겨졌는데, 두 여동생은 결국 피난하지 못하고 북한에 남겨질 수밖에 없었죠.

그렇게 가족과 헤어진 한을 지닌 현미와 그녀의 가족들은 2002년 상봉이 진행될 때 외국에서 한 번 만나게 되었는데, 현미의 가슴을 찢어지게 할 만큼 두 여동생들의 모습은 매우 불쌍했습니다.

1957년 미 8군 위문 공연 무대의 칼춤 무용수였던 현미는 방송을 펑크 낸 여가수 대신 갑작스럽게 무대를 올라간 걸 기점으로 오늘날 대가수 현미라는 역사의 첫 시작을 알리게 되었습니다.

 

당시

드물게 있었던 여대생 가수라는 메리트를 살려 ‘시스터즈’ 그룹으로 활동했고, 그중에서도 센터를 담당하며 자신의 주가를 올리고 있던 와중에 현미를 눈여겨봤던 작곡가 이봉조는 팝송 번안곡으로 음반을 만들어 주었죠.

사실상의 데뷔곡이었던 ‘아 목동아’엔 흥미로운 비하인드 스토리가 담겨 있는데, 당시 현미의 성향이 너무 큰 나머지 ‘시스터즈’라는 그룹임에도 불구하고, 그룹 내 동료 가수들과는 멀찍이 떨어져 홀로 녹음을 했다고 전해집니다.

그렇게 이봉조와 1집을 작업하며 미국의 대가수 냇킹콜의 곡을 바탕으로 현미 본인이 직접 작사한 가사를 입혀 ‘밤안개’라는 곡을 발표했는데, 이 곡은 오늘날의 현미를 있게 만든 엄청난 히트곡이자 대표곡이 되었죠.

 

 

사실 ‘밤안개’는 타이틀곡이 아니었고 ‘당신의 행복을 빌겠어요’가 타이틀이었으나 ‘밤안개’의 인기가 입소문으로 퍼지자 뒤늦게 교체하여 앨범 재발매를 했을 만큼 ‘밤안개’는 대중들에 의해 발굴된 엄청난 명곡 중의 명곡이었습니다.

이후 현미는 60년 대표 여가수로 자리매김하며 당대 최고의 가수였던 한명숙과 라이벌 구도를 형성하기도 하였죠

1965년 신성일, 엄앵란 주연의 영화인 ‘떠날 때는 말없이’ 주제곡도 연달아 히트 시켰는데 이는 이미자가 선정한 60년대 대표곡이라 불릴 만큼 엄청난 화제몰이를 이어갔습니다.

‘밤안개’에 이어 두 번째 히트곡도 모자라 ‘몽땅 내 사랑’과 ‘두 사람’도 히트했으며 한국적인 앤카풍의 ‘무작정 좋았어요’로 이어지는 히트곡 제조기 같은 인기를 통해 그녀는 60년대 초중반에 이어 후반까지도 최고의 스타 자리를 지켜냈고요.

 

그리고

단순한 히트곡을 넘어 현미를 아티스트로 인정받게 해준 건 그녀의 다양한 음악 세계와 타의 추종을 부러워하는 노래 실력이었죠.

1968년에는 ‘보고 싶은 얼굴’이라 곡을 통해 이산가족의 아픔을 표현해 찬사를 얻었습니다.

 

 

사실 현미는 혼자만의 노래 실력으로는 절대 지금 이 자리에 올 수 없었을 겁니다.

‘영혼의 파트너’라고 불렸던 작곡가이자, 그녀에게 엄청난 한을 주었던 전남편 이봉조의 곡에 의해 가수 현미의 인기가 가능했던 것이죠.

언급했듯이 이봉조는 ‘밤안개’나 기타 다른 히트곡을 전부 작곡했을 만큼 현미의 허스키하고 강한 성량의 장점을 그 누구보다 잘 활용했던 인물입니다.

 

심지어

이봉조는 현미의 히트곡 외에도 국제 가요제를 수상하게 만든 사람인데,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재미있는 일화가 숨어 있습니다.

이봉조는 국제가요제에 출전할 때마다 사실 현미와의 출전을 꺼려왔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국제 가요제의 특성상 음정의 피치가 높은 가수에게 유리한데 현미는 허스키하고 저음에 강해 상대적으로 취약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죠.

 

그래서

국제 가요제만큼은 현미가 아닌 다른 가수들과 협업하며 출전했지만, 어느 날 현미가 보기에 딱해 국제가요제 출전을 권유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권유와 함께 건넨 노래가 현미를 대표하는 ‘별’이라는 노래였는데, 수상이 어려울 거란 예상을 깨고 현미는 기적처럼 국제가요제에 수상을 하였죠.

이러한 대중적 인기와 인지도에 힘입어 미국 레이건 대통령의 초청까지 받은 현미는 한국의 대표 가수로서 무대에 오르며 현장에 있던 미국 정치인들을 사로잡았는데, 당시의 워낙 반응이 뜨거운 나머지 기립 박수와 앵콜이 끊이지 않았다고 전해집니다.

이만큼

이봉조는 현미의 인생에 있어 최고의 작곡가이자 조력자였지만, 이 둘이 사랑에 빠지면서 남보다도 못하는 악연이 시작되었습니다.

현미는 이봉조의 첫인상을 기억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1987년도 쯤에 이봉조에게 갑작스레 연락이 왔다. 그 잘생긴 사람이 말라버린 채 나한테 틀니를 보여주더라. 내가 이렇게 불쌍하게 살고 있는데, 나를 진짜 안 받아줄 거냐는 식으로 얘기하더라. 이때 마음이 약해져서 건강하게 다시 살자라고 하며 내 마음을 전달하려 했지만, 이봉조는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고, 우리의 운명은 거기까지였던 것 같다’

이런 한스러운 심경을 밝힌 현미와 그녀의 전 남편 이봉조는 사실 혼인신고를 한 적이 없었으며, 본처가 있음을 속이고 결혼했던 것이기에 이 둘이 관계가 사실혼이라 하기엔 뭔가 애매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두 아들을 낳은 엄마이자 한 여인으로서는 상상도 못 할 일이었기에 보통의 사람 같으면 완전히 좌절하며 인생 자체가 무너질 수 있었지만, 현미의 인생은 투쟁의 역사라고 할 만큼 가혹한 운명에 항상 맞서던 인생이었습니다.

현미는 이봉조와의 사건 이후 70년대 후반부터는 가수 생활이 뜸해졌지만, 국내 최초의 현미 노래 교실을 만들며 다시 성공 가도를 이룩했죠.

 

이후에는

가수 활동 외에도 예능을 통해서 재치 있는 입담까지 선보였고, 2000년대가 되어서는 ‘아내’라는 곡을 히트시키며 이봉조가 없어도 독자적으로 성공할 수 있는 가수의 역량을 입증했습니다.

다만 여기서 현미에 대해 배신감을 느꼈다고 말하는 이들은 현미가 재즈와 팝의 스타일 및 개성 넘치는 보컬을 버리고 90년대 이후부터 상업적인 성인 트로트로 전향했다고 비판하지만, 두 자녀의 엄마로서 생계를 위한 선택은 어떤 누구도 비난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더욱이 한국 최초의 50주년 기념 콘서트를 열었던 현미는 국내 가요계에 살아있는 전설이자 노래를 정말 사랑하던 인물이었고요.

1938년생이라 나이를 감안하면 실로 대단한 가수의 길을 걸어온 것입니다.

 

하지만

오랜 가수 생활과 달리 그녀는 항상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현미는 그동안 여러 차례 사기와 강도를 당하며 전 재산을 잃어왔는데, 현미 스스로가 말하길 ‘나는 돈을 모을 줄 몰랐던 사람이다. 그저 보석을 엄청 좋아했었는데, 오죽했으면 남편이 보석하고 살라고 할 정도였다. 그런데 하늘이 무심하게도 최악의 나쁜 일은 동시에 찾아왔다. 집문서 사기로 빈털터리가 됐던 시점에 나의 유일한 재산은 보석이었다. 그때 당시로는 7억의 가치였던 보석이니 현 시세로는 10억 정도의 가치일 텐데, 집문서 사기로 절망했던 순간에 금고 속의 보석은 유일한 희망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집에 도둑이 들었고 금고 채로 강도를 당했다. 나의 모든 노력은 한순간이 사기와 강도로 마치 신기루처럼 사라졌었다’

이런 고백처럼 현미는 유명세와 달리 월세살이를 전전했던 궁핍한 삶을 살아왔었죠.

심지어 이 집문서 사기 사건은 엄청나게 경악스러운 비하인드가 존재하는데, 전 재산을 앗아간 사기범은 다른 사람도 아닌 현미와 핏줄 섞인 사촌 동생이었습니다.

당시 현미는 자신의 명의로 된 집의 모친 및 이모의 가족과 함께 살았는데, 어느 날 모친은 치매에 걸려 이모에게 칼부림 소동을 일으켰었죠.

이런 위험한 상황까지 벌어지자 현미는 집을 팔기로 결심했지만, 좀처럼 집이 팔리지 않아 큰 어려움을 겪던 상황이었고요.

이때 현미에게 도움을 주겠다며 미국에 살던 사촌 동생이 등장했고, 현미는 고마운 마음에 집문서를 맡기며 매매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사촌 동생은 현미 몰래 집을 팔고 돈을 가진 채 결국 연락을 두절하며 잠적해 버렸죠.

 

이렇게

핏줄을 배신한 사촌 동생은 현미를 사기 친 돈을 모두 탕진했었고, 최근에서야 용서를 구한다며 연락했지만, 현미는 죽을 때까지 용서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현미의 별세 소식을 듣자 빈소에 조문하겠다고 뜻을 밝혔는데, 현재 유가족들의 완강한 반대로 인해 장례식장에 모습을 드러낼지 의문인 상태입니다.

이렇듯 85세 현미는 엄청나게 슬픈 개인사를 겪으며 살아왔습니다.

하지만, 좌절하지 않고 끝까지 운명에 맞서 누구보다 열심히 투쟁했던 인물이죠.

때문에 많은 젊은이들에게 귀감이 되는 인생이라고 생각합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Leave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