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걸 여기서 말하시면 어떻게 합니까…” 최민수가 갑자기 털어놓은 “이상민 부친의 충격 정체..” 그토록 그가 조심하며 숨겨온 이유..

‘미운 우리 새끼’에서 이상민은 미모의 소개팅녀 김유리와 데이트를 하며 현재 대중들에게 빚 청산과 더불어 수많은 관심을 받고 있는 중입니다.

최근

소개팅녀 김유리는 미스코리아 출신이라는 게 밝혀지면서 더더욱 화제를 몰고 왔는데, 김유리를 잘 아는 사람들이 말하길 ‘그녀는 화목한 가정에서 곱게 자란 여인이자, 부유한 환경에서 별다른 어려움 없이 컸던 축복받은 인생 중 하나’라고 언급했죠.

그러나 이상민은 김유리와 달리 상당히 어두운 가족사를 겪고 자랐습니다.

 

 

그와 친하게 지내는 최민수 또한 복잡한 가정에서 자란 인물로 손꼽히는데, 이런 최민수마저 이상민의 가정사를 두고 자신 못지 않은 딱한 사람이라 묘사했죠.

이상민의 별명은 ‘이애기’입니다.

 

태어나

2년 동안 이름이 없어 생긴 별명이죠.

이상민의 가정 형편은 매우 가난하여 생계조차 힘들다 보니 출생신고를 2년 늦게 했고, 이로 인해 주민등록상 2년을 손해 본 이상민은 친구들과 족보 정리를 하는데 애를 먹었다고 합니다.

태어나 2년 동안 이름조차 없던 이상민은 자신의 가정 형편에 대해 묘사하길 “아버지는 내가 6살 때 돌아가셨고 이로 인해 여러 서러움을 겪었었다. 중학교 3학년 때 한 친구가 명절에 놀러와 왜 산소에서 차례를 안 지내냐고 묻길래 갑자기 깨달았던 건 우리 가족이 아버지 산소에 가본 적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동안 어머니는 집안의 종교가 기독교니 아버지 산소를 가지 않았다고 둘러댔지만, 궁금한 마음에 아버지 산소의 위치를 수소문했고 일산 외곽에 있다는 걸 확인하였다. 학생이다 보니 돈도 없어 서울부터 일산까지 직접 걸어간 뒤에야 도착했는데, 내가 정말 충격을 받았던 건 아버지 비석에 내 이름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모르는 형제들의 이름은 새겨져 있었는데, 왜 내 이름은 새기지 않았을까라는 충격 때문에 그 자리에서 못으로 내 이름을 아버지 비석에 새겨 넣었다. 그때부터 나는 평범한 학생의 길을 거부하고 사회에서 말하는 비행청소년이 되었다”라고 했습니다.

 

일찍

돌아가신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인해 방황이 시작된 이상민은 자신도 모르는 형제가 아버지의 비석에 새겨져 있었다는 점, 그리고 2년 동안 이름 하나 없이 출생신고가 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자 더더욱 일탈의 길을 걸었었지만 항상 어머니를 향한 죄책감을 가지기도 했습니다.

이상민의 어머니는 자그만 식당을 운영하시며 가장 역할을 오래 해오셨는데, 이상민이 16살이 될 무렵 도저히 식당 일로는 희망이 보이지 않아 지인의 권유로 보험회사에 취직하게 됐고, 그때부터 놀라운 실적을 쌓게 됩니다.

 

 

이상민

어머니는 입사한 지 12년 만에 전국 최고의 ‘보험왕’이 된 것은 물론, 한 지역의 소장까지 맡을 정도로 회사에 능력을 인정받았기에 이상민은 모친의 이런 능력을 종종 자랑스럽게 얘기하기도 했었죠.

모친은 공부를 열심히 하길 바라며 이상민에게 학업을 계속 권유했지만, 이상민은 가수의 길을 꿈꿨었고 이로 인해 모친과의 갈등이 심해졌다고도 하죠.

일찍이 동네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이상민의 춤실력은 매우 유명했었고, 해외 음악에도 관심이 많아 집안엔 LP판이 가득했다고 토로합니다.

학창 시절부터 이상민과 친하게 지냈던 전 ‘룰라’ 멤버 신정환과 고영욱이 말하길 “은평구 사람들이 서울 쪽에서는 가정사가 좋지 않기로 유명한 지역인데, 이상민은 특히나 더 딱한 상황이었지만 음악만큼은 정말 시대를 앞서나간 사람이었다. 매일같이 음반을 사고 춤을 추며 노는 것 이상으로 탐구했던 사람이다”라며 어릴 때부터 이어진 이상민의 집요한 열정을 증언하였습니다.

탁재훈 또한 학창 시절부터 이상민과 ‘죽마고우’로 불리며 어울렸는데, 이상민이 딴짓을 안 하고 음악만 한다면 분명히 성공할 것 같았다고 추억하였죠.

영리한 이상민은 모친에 대한 미안함 때문에 뒤늦게 정신을 차려 공부를 하기보다는 자신은 남들보다 잘 노는 게 장점이니 춤과 노래에 대한 실력을 키우기로 결심했죠.

그 길로 대학을 포기하고 녹음한 테이프로 기획사 오디션을 열심히 보러 다닌 그는 연예인이라는 직업에 대해 한 가지 확고한 철학을 세우게 되는데, 그가 말하길 “연예인은 본인의 수준을 가장 정확히 알아야 성공한다”라며 요행에 기대어 스타가 되는 건 완전히 불가능하다는 소신을 갖게 되죠.

 

그러면서도

“가장 중요한 건 본인에 대한 자신감”이라고 덧붙인 그는 당시의 수많은 가수들을 지켜보며 ‘내가 더 뛰어나다’라는 확신을 가졌다고 합니다.

즉, 본인에 대한 엄격한 평가는 필요하지만 항상 자신감을 가져야 한다는 말이었죠.

혹자에게 이상민의 삶은 그저 놀기 좋아하고 방탕해 보이는 날라리의 삶처럼 보이겠지만, 그가 훗날 ‘룰라’로 대박을 터뜨리고 여러 그룹들을 성공시킨 것도 모자라 현재 활발한 예능을 통해 100억 원이 넘는 빚을 청산한 걸 보면 이상민은 스타가 되기 위한 철학과 확실한 노하우를 이해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본격적인 스타의 꿈을 안고 어린 시절부터 알던 신정환과 함께 반지하 연습실에서 1년간 라면을 먹으며 하루 종일 연습했다고 고백하는데, 지금이야 연예인이자 기획자로서 엄청난 노하우를 가진 사람이지만, 당시만 해도 가수가 되는 법조차 몰라 서울 클럽을 전부 돌아다녔다고 말합니다.

직접 녹음한 테이프를 기획사 관계자들에게 사정하며 뿌려댔고, 신정환과 함께 무대에 공짜로 올라 열심히 춤과 노래를 했지만 철저히 무시당했죠.

 

그런

우연히도 친구의 소개로 어느 밴드의 멤버로 들어가게 되었는데, 때마침 밴드의 연습실에 기획사 관계자들이 많이 찾아오게 되면서 얼굴을 알렸다고 합니다.

이상민이 말하길 “열심히 노력하는 건 적극적으로 어필을 해야 좋은 것”이라며 자비를 털어 거울이 없던 밴드의 연습실에 대형 거울을 부착한 후 춤 연습을 했다고 합니다.

 

 

당시만 해도 거울이 없던 연습실이 흔했는데 이상민이 최초로 도입했던 이 대형 거울은 기획사 관계자들의 눈길을 끌며 업계 바닥에서 소문이 났다고 하죠.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상민은 그토록 바라던 가수 제의를 받았으며, 이것이 이상민이 속한 ‘룰라’라는 국내 레전드 그룹이 탄생하게 된 계기입니다.

‘룰라’는 ‘100일째 만남’과 ‘날개 잃은 천사’ 등 각종 히트곡으로 큰 인기를 끌게 되었고, 이상민은 이때의 성공을 발판으로 연예 기획사까지 성공했음은 물론, 8개에 달하는 회사 등을 통해 엄청난 부와 명예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상민이 30대인 1999년 당시 48억의 통장과 13억의 부동산을 가졌다고 하는데, 너무 돈이 넘쳐흐르는 시기다 보니 정확한 자산이 얼마인지도 몰랐다고 하죠.

가난의 한을 가진 그는 천성적인 똑똑한 두뇌를 이용해 그 어렵다는 연예계 바닥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부자가 됐던 것입니다.

하지만

팔자가 지독히도 복잡한 건지, 동업자의 배신과 사업 실패로 인해 이상민은 졸지에 118억이란 상상을 초월하는 빚더미를 떠안게 되었죠.

어린 시절 고생이 참 무색하게도 하늘은 또 한 번의 시련을 준 것입니다.

더욱이 사업 실패도 모자라 이혼까지 겪게 되는 최악의 시간을 맞이했죠.

이혜영에 대한 이상민의 사랑은 사업만큼이나 정말 집요했던 걸로 유명한데, 이상민은 이혜영에게 첫눈에 반해 8년을 따라다니며 연애를 했고 이혜영의 부모가 고졸이라고 반대하자 서울예대를 차석으로 입학했을 정도로 이혜영과의 결혼을 위해 정말 모든 걸 다 바쳤던 남자였습니다.

하지만, 사업 실패로 결혼 1년 2개월 만에 이혜영에게 이혼 통보를 받았음은 물론, 법적인 고소까지 당하게 되며 둘의 관계는 최악으로 빠지게 되고요.

 

하지만

이상민은 오뚝이 같은 의지력으로 바닥부터 다시 일어난 인생이었습니다.

파산 신청으로 회피하지 않고 성실하게 118억이란 빚을 갚는 모습에 대중들은 ‘의리있는 남자’라며 그를 환영했고, 이로 인해 다시 한번 재기에 성공하게 되었습니다.

성동일 또한 이상민의 근성에 대해 다음과 같은 고백을 털어놓았죠.

“나는 사생아로 태어나서 그 누구보다 복잡한 가정사의 슬픔을 안다. 이상민 역시도 부친의 두 번째 처의 아들로서 비석에도 이름이 새겨지지 않은 슬픔을 전해 들었다. 보통 사람 같으면 운명을 원망하고 자신의 팔자를 탓하며 낙담하겠지만, 이런 가정사를 이겨내고 성공을 했다가 다시 실패를 하고 또 성공을 하는 모습을 보면 같은 환경에서 성장했던 나보다 훨씬 더 독한 사람인 게 바로 느껴진다”

하지만, 이상민도 사람이다 보니 다시 재기하는 과정에서 많은 것을 포기했습니다.

이상민이 소개팅을 했던 김유리는 2010년 ‘러브 스위치’라는 프로그램에 출연했으며, 미스코리아 대구 출신으로서 외항사의 스튜어디스를 할 만큼 미인이었죠.

 

일반적인

남자라면 설렐만한 외모와 착한 성격을 가지고 있는 여성이기에 이상민은 적극적으로 대시할 법도 한데, 오히려 소극적인 태도를 취해 의문을 자아냈습니다.

이상민은 김종민과 김종국을 만나 본인의 소개팅 이후 상황을 토로했는데, 김유리가 장문의 메시지를 먼저 보냈음에도 보름이 넘게 답장을 안 했다고 고백했죠.

김종민과 김종국은 ‘어떻게 그럴 수 있냐’라고 화를 냈는데, 이상민은 ‘교제를 한 지 8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라며 ‘다시 연애를 하는 게 겁난다’라고 변명했고요.

사업 실패 후 빚을 갚는 동안 당연히 연애는 사치였으니 이해는 가지만, 어느 심리학자의 말처럼 이상민은 겉으로는 괜찮아 보이는 상태지만, 속으로는 곪을 대로 곪았기에 완전히 인생에 지친 상태였던 것이죠.

이런 모습이 안쓰러웠는지 김종국과 김종민은 답장을 하라고 조언했고, 그렇게 이상민은 보름 만에 답장을 하며 김유리와 에프터 데이트를 하고야 맙니다.

데이트 장소와 시간도 범상치 않았던 게, 이 둘은 새벽 4시에 노량진 수산시장에서 만났었죠.

이상민은 의아해하는 김유리에게 ‘회가 가장 맛있는 시간’이라고 소개하며, 인생에서 가장 맛있는 회를 대접하고 싶어 새벽 노량진 수산시장을 선택했다고 설명했는데, 한 네티즌은 머리 좋은 이상민의 결정적인 노림수가 있었다고 반박했습니다.

이상민과 김유리는 경매시장을 구경하며 직접 횟감을 고르는 모습을 보여줬는데, 경매시장이 워낙 시끄럽기에 가까이 붙어서 대화를 나눠야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거리도 가까워지고 스킨십도 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던 거죠.

 

이렇게

이상민이 엄청난 빚을 갚은 후 하나 둘씩 평범한 일상과 사랑을 찾아가자, 평소 가깝다고 알려진 최민수는 이상민의 아버지에 대해 다음같이 얘기합니다.

최민수의 말처럼 역경을 이겨낸 자의 인생은 가장 위대한 스토리처럼 느껴집니다.

만약 빚을 갚기를 포기하고 책임을 회피했다면, 대중들은 지금처럼 그 환영하지 않았겠죠.

오랜 힘든 시간을 이겨냈던 이상민이니 앞으로 좋은 소식만 가득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Leave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