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 얼굴은 다 어디로… “댄스가수 유랑단 엄정화의 최근 몰라보게 변해버린 모습..” 모두가 안타까워하는 한 가지 이유..

엄정화 씨는 다소 과소평가된 사람인지도 모릅니다.

가수로서

크게 성공했는데 배우로서도 그녀의 존재는 무시할 수가 없습니다.

이번에도 ‘닥터 차정숙’으로 인기 드라마 시리즈 ‘낭만닥터 김사부’를 시청률 면에서 누를 정도입니다.

처음에 엄정화 씨는 가수인 듯한 배우, 배우인 듯한 가수로 애매모호한 위치였으나, 그녀의 이런 전략으로 가수는 ‘이 세상 완전 센 언니의 캐릭터’로 그리고 배우는 ‘현실적인 사람’으로서의 포지셔닝에 성공했습니다.

그런데 그녀의 성공은 그냥 얻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한때 정신병에 걸릴 것 같고, 인생이 끝이라는 생각도 했다는데요.

 

도대체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엄정화 씨는 1969년 8월 17일 충청북도 제천시에서 태어났으며, 4남매 중 둘째입니다.

언니와 여동생이 있으며 남동생은 그 유명한 배우, 엄태웅 씨입니다.

 

 

아버지는 트럼펫 연주가이자, 서라벌 예대에서 음악을 전공한 중학교 음악 선생님이었습니다.

안타깝게도 그녀의 어린 시절은 순탄치 않았습니다.

엄정화 씨가 겨우 6살 때 아버지가 오토바이 사고로 사망하고 말았고, 가족은 살 곳이 없어 아버지가 다니시던 남자 중학교의 매점에서 살았습니다.

어머니는 28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일을 하며 홀로 네 아이를 키우게 되었습니다.

단칸방에 온 식구가 살기도 했는데, 당시 집에 오면 하루아침에 세간살이가 없어지고 동생 엄태웅 씨는 울고 있었다고 합니다.

또한, 고등학교 시절에도 노래 잘 부르는 것으로 유명한 학생이었으며, 소풍이나 장기자랑 시간에는 친구들의 신청곡이 밀릴 정도였고, 노래와 춤 친구들과 노는 것을 너무 좋아했다고 합니다.

 

엄정화

씨는 자신의 과거에 대해 부끄러워하지 않고 당당하게 고백해 많은 사람들의 응원을 받기도 했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에 어머니와 함께 상경해서 자신은 카페 아르바이트를 하고 어머니는 떡볶이, 어묵을 파는 포장마차를 했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면서 어느 날 알바 일을 끝내고 엄마의 포장마차를 찾았을 때, 때마침 단속에 걸려 엄마는 포장마차를 끌고 자신은 포장마차를 밀어야 했다고 말하며 울먹이기도 했습니다.

합창단 시절 초창기에는 가장 막내라 캐스팅이 잘 안되어 울기도 많이 울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합창단원’이라는 직업은 그녀에게 많은 기회를 제공해 주었습니다.

엄정화 씨가 MBC 합창단으로 활동하고 있을 때, 엄정화 씨는 한 쇼 프로그램에서 배우 최진실 씨의 노래를 도와주게 되었는데, 이것이 계기가 되어 엄정화 씨는 최진실 씨의 소속사에 들어가게 됩니다.

이후 엄정화 씨와 최진실 씨는 매우 친한 친구 사이가 되었죠.

또한 합창단 시절 양수경 씨의 코러스로 참여한 후 가수 제의를 받아 데뷔하게 되었습니다.

1989년부터 2년간 합창단원으로 활동하면서 카메라에 대한 실전을 터득한 그녀는 나중에 가수로 데뷔한 후 합창단원으로 받은 훈련이 크게 도움이 되었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꿈을 이루려면 꿈 근처에 가서 일해야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죠.

 

당시

그녀는 합창단원으로도 너무 행복하고 감지덕지했는데, 이후 그녀의 인생은 술술 풀리기 시작했습니다.

1992년에 배우 심혜진 씨 주연의 영화 ‘결혼 이야기’에 단역으로 출연하면서 영화계에 데뷔했고, 다음 해인 1993년 시인 유하 감독의 첫 데뷔작 ‘바람 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의 주연을 최민수 홍학표 씨 등과 맡으면서 본격적인 연애 활동을 시작하게 됩니다.

유하 감독은 엄정화 씨에게 “너는 오렌지 족처럼 생겼는데 눈은 되게 착하다”라고 하며 캐스팅을 했고, 이 영화에서 팜므파탈 역을 맡았던 엄정화 씨는 영화의 삽입곡이었던 신해철 작사 작곡의 ‘눈동자’로 가수 활동을 시작합니다.

이 영화 개봉 시 엄정화 씨는 “MBC의 합창단원이었다는 전력 때문에 연기력을 의심받고 있지만, 이번 기회에 노래보다 연기가 더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도록 혼신의 힘을 다하겠다”라고 코멘트를 하기도 했습니다.

 

 

이때 부른 ‘눈동자’에서 엄정화 씨는 당시 청순함이 대세이던 여자 가수들 중에서 섹시한 분위기를 풍기며 데뷔부터 남다른 이미지를 구축하는 데 성공합니다.

이러한 이미지 덕분에 엄정화 씨는 가수 데뷔 첫해부터 군인이 가장 좋아하는 여가수로 선정되었습니다.

그러다 1996년에 낸 2집 음반에서 최준영 씨가 작곡한 ‘슬픈 기대’와 김형석 씨가 작곡한 ‘하늘만 허락한 사랑’이 히트했습니다.

‘슬픈 기대’는 가발을 쓴 뮤직비디오로 화제를 모았고, ‘하늘만 허락한 사랑’은 엄정화 씨를 대표하는 발라드 곡으로 자리 잡게 됩니다.

장미의 가시를 상징하는 뾰족하게 세운 헤어스타일, 짙은 화장, 검은색 무대 의상 등 아방가르드한 무대 스타일로 섹시함을 포인트로 잡은 이 노래로 가요 차트를 휩쓸었고 뛰어난 퍼포먼서로서의 역량을 과시했습니다.

주영훈 씨와의 성공적인 결과물을 얻어낸 엄정화 씨는 다음에 발표한 4집 ‘인비테이션’에서 또 한 번 그와 손을 잡는데, ‘포이즌’은 ‘배반의 장미’를 뛰어넘는 엄청난 히트를 했습니다.

이 단계에서부터 엄정화 씨는 단순한 가수를 넘어서 하나의 패션 아이콘이자 시대의 아이콘으로 등장하게 됩니다.

‘포이즌’과 함께 무대에서 선보였던 엄정화 씨의 단발머리 스타일과 사이버틱 메이크업을 비롯해 하늘을 찌르는 댄스 동작 역시 센세이션을 일으키며 큰 반향을 얻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 후

그녀가 선택한 후속곡은 박진영 씨와의 합작품이었던 ‘초대’였습니다.

엄정화 씨는 솔직한 가사의 이 곡을 ‘포이즌’에서 선보였던 단발머리 대신 긴머리에 검은 드레스, 부채를 들고 에로틱한 분위기를 풍기는 무대와 함께 에로틱한 분위기가 전체적으로 감도는 뮤직비디오를 시장에 내놓으며 사회적 주목을 받게 됩니다.

이 뮤직비디오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침실 및 에로틱한 분위기로 선정적이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는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대’ 역시 ‘포이즌’에 버금가는 히트를 기록하며, 시장 내에서의 엄정화 씨의 위치를 더욱 공고하게 해주었습니다.

4집 앨범의 큰 성공 이후에는 1999년 김창환 씨와의 합작품인 ‘몰라’를 선보였습니다.

엄정화 씨는 김창환 씨로부터 곡을 받기 위해서 가수 김태영 씨에게 보컬 레슨을 받는 등 노력을 기울였고, 김창환 씨는 담당 가수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엄정화 씨에게 곡을 주어 공전의 히트를 이루어내었습니다.

‘몰라’에 이어 주영훈 씨와의 작품으로 후속곡 ‘페스티벌’을 내놓는데 이 곡 역시 시장에서 큰 성공을 거둡니다.

 

사실

이 곡은 주영훈 씨가 그룹 ‘컨츄리 꼬꼬’를 위해 준비한 곡이었으나, 거절당한 후 엄정화 씨에게 주었는데, 엄정화 씨 역시 부르기 싫어 펑펑 울었다고 말할 정도로 처음에는 탐탁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곡은 예상외로 큰 성공을 거두었고, 쉬운 노래 가사와 밝은 노래 분위기로 좀 더 대중적인 사랑을 받습니다.

이렇게 연이어 히트를 했는데요.

이 당시에 그녀의 인기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있습니다.

1999년 세기말을 맞아 MBC 라디오 ’20세기 한국인의 노래 100곡’ 프로그램이 한국 갤럽을 통해 20세 이상 1000명과 전문가 3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20세기 가장 좋아하는 가수 순위에서 엄정화 씨는 8위에 랭크되는데, 이는 여성으로는 이미자 씨의 이은 2번째였으며, 동시대에 활발하게 활동한 가수 중에서 그녀를 앞선 가수는 조성모 씨가 유일했습니다.

그 후 2008년 양현석 대표와 의기투합해 YG엔터테인먼트와 합작으로 ‘디스코’를 발매합니다.

‘빅뱅’의 탑이 피처링하기도 했는데요.

이 곡 역시 차트 순위권에 오르는 등 흥행에 성공합니다.

‘디스코’를 불렀을 때 엄정화 씨가 우리나라 나이로 40살이었습니다.

과거에는 30살 넘은 여성 댄스 가수가 없었기 때문에 엄정화 씨는 30살 넘어서도 계속 댄스 가수로 활동하며 옷차림 등 나잇값 못한다고 욕도 많이 먹었는데, 여성 가수가 나이 들어서도 나이에 구애받지 않고 마음껏 활동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거의 처음의 사례였습니다.

 

그런

점에서 엄정화 씨의 노력을 적극 지지합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이렇게 엄정화 씨는 90년대부터 30년 가까이 가수로 크게 성공했는데, 그동안 배우 활동도 성공적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냥 얻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부족한 연기력을 보완하기 위해서 연극에도 진출한 바 있는데, 이를 잘 모르시는 분들도 많죠.

남자 주인공 감우성 씨의 출연은 진작 결정되어 있었지만, 이 영화의 과감한 노출과 급진적인 대사로 여자 배우들이 시나리오를 고사하면서 1년여를 기다리다가 엄정화 씨에게 돌아갔습니다.

주위에 엄청난 만류를 뿌리치고 시나리오의 힘을 믿고 출연을 결정했으며, 도발적인 연기를 선보인 엄정화 씨는 이 영화로 백상예술 대상에서 최우수여자연기상을 수상하며 성공적인 영화 복귀를 알렸죠.

‘결혼은 미친 짓이다’가 호평을 받자 엄정화 씨의 배우로서의 행보는 탄력을 받게 됩니다.

영화 칼럼니스트 송용덕 씨는 매경 이코노미에 기고한 글에서 엄정화 씨에 대해 “엄정화 씨는 오버와 균형의 평형선을 절묘하게 잘 유지하며 푼수끼 있는 치과의사 역을 잘 소화해냈다. 사실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는 엄정화 씨는 어쩌면 과소평가됐는지도 모른다”라고 말했습니다.

2009년 개봉한 영화 ‘해운대’는 엄정화 씨를 처음으로 ‘천만 배우’로 등극시키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가수와 배우로 너무나 쉴 틈 없이 일하다가 큰 고비를 맞게 됩니다.

암에 걸리고 말았는데요.

이 암이라는 악몽은 그녀에게서 아주 소중한 것을 빼앗았습니다.

2010년 초, 갑상선암 수술을 받고 불행 중 다행으로 완치 판정을 받았죠.

그 후 복귀해 옴니버스 영화의 ‘마마’에 야쿠르트 아줌마로 출연했고, 영화 ‘댄싱퀸’의 황정민 씨와 함께 주연을 맡았습니다.

특히 ‘댄싱퀸’은 400만 관객을 넘기는 흥행을 기록했습니다.

지금은 그나마 목소리가 어느 정도 돌아와 연기 활동은 활발히 하고 있지만, 이 일이 이후의 정규 앨범은 10집 한 장뿐입니다.

 

안타깝게

엄정화 씨 본인이 가장 좋아하는 ‘파’ 와 ‘솔’ 그리고 ‘라’ 음역대를 낼 수 없게 되었다고 합니다.

가수와 연기 양쪽 모두에서 기존의 보수적 관습을 타파하는 주체적인 여성상을 노래하고 연기했으며 미디어에서 표현되는 여성의 이미지와 아이덴티티를 새롭게 정립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이효리, 백지영 씨와 수많은 걸그룹 여성 연예인들의 대표적인 롤 모델이기도 합니다.

최근 그녀는 드라마 ‘닥터 차정숙’에서 중년 여성의 한계를 뛰어넘는 인물을 연기하며 많은 사람들에게 용기를 건넸습니다.

나이 들어서도 엄정화 씨는 시대를 이끌어가는 능력자라는 생각이 들며 그녀가 그동안 과소평가되었다는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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