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대를 풍미한 가수 바니걸스 고재숙 끝내 눈물겨운 소식이.. ” 쌍둥이 언니를 보내고서 최근 알려진 그녀의 안타까운 근황사..

여러분은 일란성 쌍둥이 자매로 70년대를 풍미했던 ‘바니걸스’를 다들 기억하고 계실 겁니다.

이들은

예쁜 외모와 시원한 가창력, 화려한 무대매너로 데뷔하자마자 큰 사랑을 받았고, 군부대 위문 공연도 많이 다녀 요즘 걸그룹들보다 훨씬 앞선 원조 군통령이기도 했는데요.

하지만, 화려했던 과거를 뒤로하고 언니 고정숙이 끝내 끔찍한 죽음을 맞는 바람에 이승에 남은 동생 고재숙이 극도의 슬픔으로 매일을 보내던 중 안타까운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언니 고정숙은 결혼과 함께 은퇴를 했다가 이혼 후 활동을 재개했지만, 전성기 때처럼 주목을 받지 못하는 바람에 지독한 생활고를 겪었고 급기야 정신병동에까지 입원을 한 뒤 그만 위암에 걸리는 바람에 60대의 이른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 바람에 홀로 남게 된 동생 고재숙은 자신의 반쪽과도 같았던 언니의 죽음으로 극도의 괴로움을 이기지 못하면서 그만 안타까운 소식이 전해지고 말았는데요.

 

그리고

고재숙은 ‘불후의 명곡’ 바니걸 특집으로 오랜만에 TV에 출연해 ‘버니걸스’ 수업 비화를 공개했다.

MC 신동엽은 “1970년대 바니걸은 원조 군부대통령 지원이었다”며 “활동할 때 또래들한테 욕을 많이 받지 않았느냐”고 묻자 “우리는? 그 당시 1000번이 넘는 공연을 했고, 국방부 장관으로부터 칭찬을 받기도 했어요.” 그는 “어머니 때문에 나에게 관심이 없었다. 어머니는 너무 방해가 되셔서 제가 남자들에게 말을 하려고 하면 어머니의 발소리만 듣고 모두 도망갔습니다.

 

 

고재숙도 “당시 어머니 별명이 ‘독일군인’이었는데 ‘결혼할 나이가 되자 어머니가 나중에 후회하셨다’고 했다.

그녀는 “그때는 너무 제약이 많아서 자주 어울리지 못했다”며 안타까움을 표했다.

어머니는 딸들의 타고난 목소리와 재능을 한눈에 알아보고, 16세였던 1970년 록의 대부 신중현을 찾아가 노래를 부탁했다. 소녀시대는 1971년 ‘신성현’이라는 곡을 발표했다. 드디어 ‘그 사람’으로 데뷔해 많은 사랑을 받았다.

 

그리고

당시 바니걸스는 70년대 펄시스터즈와 더불어 자매 가수로 유명세를 얻었고 누가 언니고 동생인지 구분 못할 정도의 쌍둥이였는데, 이들은 귀엽고 동그란 눈이 토끼 같다고 해서 바니걸스라는 팀명을 얻게 된 것이었고, 두 사람은 외모뿐 아니라 목소리도 닮아서 ‘목소리만 들으면 한 사람인데 실제로 보면 둘이다’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찰떡 호흡을 자랑하게 됩니다.

바니걸스는 예쁘고 귀여운 외모뿐 아니라 뛰어난 가창력과 밝고 경쾌한 분위기로 문남성들의 사랑을 독차지했고, 또한 70년대 대한민국에서 핫팬츠를 무대 이상으로 처음 입은 가수 역시 바니걸스였는데, 이들은 핫팬츠와 원색 미니스커트 등 당시로써는 파격적인 패션을 선보이며 유행을 이끌었습니다.

 

 

훗날 고재숙이 밝히길, “파격적인 모든 패션은 동대문시장에서 원단 구매부터 디자인 가공까지 모두 직접 제해 입었다”라고 하여 놀라움을 자아내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파격적인 이상과 멋진 무대매너, 밝고 유쾌한 이미지와 매력적인 외모로 남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으며 활발한 활동을 펼쳤던 바니걸스는 1986년 언니 고씨의 결혼으로 돌연 방송을 중단했다. 정숙.

이후 고정숙은 2004년 솔로 앨범을 발표하고 오랜만에 무대에 섰다. 예전과 똑같았지만, 매력적인 목소리와 아름다운 외모로 조금 의심스러운 모습을 보였고, 당시 실제로 이혼했다는 사실을 밝혀 두렵고 당황스러웠다. 딸을 어떻게 키울지, 어떻게 독립적으로 살아갈지 고민이 컸습니다. 나는 누구도 만나지 않고 시간을 보냈다. 나는 이혼했다는 사실을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그러다 보니 5년 넘게 무의식적으로 숨겨왔다”고 털어놨다.

고정숙은 1986년 어머니의 소개로 가요계에 종사하던 남편을 만나 첫 만남 불과 며칠 만에 결혼했다.

이후 고정숙은 결혼 생활이 별로 순탄치 못했다고 하지만 남편을 천국처럼 모시는 순종적인 아내의 삶을 살았다.

고정숙 씨는 1970년대 가요계를 이끌던 시절 호화로운 생활에 익숙해져 결혼 후 경제적으로 여유롭게 살고 싶었지만, 어느 날 남편이 돈이 너무 많이 든다고 불평하는 것을 들어야 했다. 딸에게 줄 옷을 사는데 열성적이었고 때로는 해외 동포들을 위로하기 위해 연주회에도 가야 했고, 집에 늦게 돌아가는 것에 대해 남편과 자주 다투기도 했다고 한다.

 

그리고

고정숙은 순종적인 아내로 남편에게 모두 참고 이해를 하려 했지만, 날이 갈수록 마음의 상처가 깊어져갖고 그렇게 결혼 생활 13년 만에 결국 가슴 아픈 이혼을 하게 되는데요.

고정숙은 사람들의 색안경 낀 시선들이 참으로 두려웠는데, 지금도 이혼을 하게 되면 이러저러한 말이 많은데 당시 사회 분위기상 이혼은 흔치 않았기 때문에 톱 스타로 얼굴이 세상에 알려진 고정숙은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받을까 봐 크게 속앓이를 하며 이혼 후 3개월 동안 사람들에 대한 두려움으로 병원에 입원까지 하게 됩니다.

정신과 병동에 들어가게 된 고정숙인데요.

하지만, 그녀는 병동에서 진짜 병을 앓는 사람들을 보게 되는데 정신병으로 입원까지 한 사람들을 보니 상태들이 생각보다 너무나 심각했고 당시 너무 큰 충격을 받는 바람에 자신마저 이러면 안 되겠다 싶어 편하게 좀 더 쉬면서 마음을 정리하고 몸을 추슬러 보자는 생각에 퇴원을 결심하게 되는데요.

그렇게 퇴원을 하게 된 고정숙은 6개월간 친정에 얹혀살며 마음을 다독이게 되는데,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사춘기에 접어든 딸의 방황으로 그녀는 또 한 번의 속앓이를 시작하게 됩니다.

딸은 엄마에게 툭하면 말대꾸를 했고 귀가시간까지 늦어지며 고정숙의 눈에서 많은 눈물을 흘리게 만들었는데요.

결국 담배라도 피우면 고통을 잊을 수 있을까 싶어 그녀는 생전 피우지 않던 담배까지 배우게 되는데, 그러던 어느 날 콜록콜록 기침을 해대면서도 담배를 피우는 그녀를 딸이 발견하게 되었고 엄마가 담배를 피우는 모습을 처음 본 딸은 큰 충격을 받게 되자 고정숙은 얼른 담배와 재떨이 라이터를 쓰레기통에 버리고 ‘다시는 이런 모습을 보이지 않을 테니 그만 방황을 끝내고 엄마 말을 들어달라’라고 딸에게 애원을 하게 됩니다.

그렇게 두 모녀는 부둥켜안고 속마음을 털어놓은 끝에 엄마는 금연을, 딸은 방황을 끝내기로 약속하며 한참을 펑펑 울었고 그 뒤로 딸의 방황은 정말 깨끗이 정리가 되게 됩니다.

그렇게 딸의 방황이 끝나자 고정숙도 딸의 모습에 힘을 얻어 연예계로 복귀를 할 수 있었고, 그 이후로도 두 사람은 애틋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자녀 사이를 과시해 사람들로부터 많은 응원도 얻었으며 게다가 나이가 좀 들었어도 여전히 아름다웠기에 주변에서 재혼에 대한 권유도 많이 받게 됩니다.

 

하지만

고정숙 씨는 결혼 생활이 너무 힘들었고, 자유롭고 싶어서 재혼하지 않았고, 이혼 과정에서 딸 양육권을 위해 모든 것을 포기했기 때문에 다시는 이런 고통을 겪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

사람들은 그녀가 ‘버니걸스’ 활동으로 많은 돈을 벌었다고 생각하지만, 그녀의 어머니는 사업에 열심히 일하여 번 돈을 모두 잃고 한 푼도 남지 않은 지 오래되었습니다. 고정숙은 늘 딸을 그리워했지만 미래에 대한 희망은 없었다. 그래서 딸아이는 캐나다에서 열심히 일하고 한국에서도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게다가 제 딸은 키도 크고 얼굴도 예쁘고 노래도 잘해서 애니메이터로서의 자질과 자질을 갖추고 있으니 장래희망을 애니메이터로 바꾸면 제가 매니저가 되어 적극적으로 지원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또한 당신이 도와주겠다고 말해요.

그러나 고정숙의 꿈은 이루지 못한 비참한 죽음으로 끝났다. 어렵게 살아오던 고정숙은 어느 날, 뜻하지 않게 위암 진단을 받고 투병을 시작하게 된다. 그는 불과 9개월 만에 병을 이기지 못하고 6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녀는 어린 나이에 쌍둥이 여동생과 함께 가요계에 데뷔했다. 이 어린 나이에 그녀는 일찍 학교를 그만두고 노래를 시작했습니다. 그 나이쯤에 그녀는 어린 시절 내내 대학 캠퍼스에서 공부하거나 집회에 참석할 수 없었습니다. 20. 정말 미안하다고 말했지만 그 아름다웠던 젊은 시절을 뒤로하고 이혼으로 비참한 삶을 살다 결국 암이라는 지독한 질병으로 짧은 인생을 마감했습니다.

더욱이 장례식에는 딸과 남동생 고재석 외에는 조문객이 거의 없어 혼자 나가야 했다. 그녀는 남편 없이 혼자 살았기 때문에 친척도 거의 없고 오랫동안 연예계에 종사하지 않았기 때문에 동료들과 연락도 두절되어 동행할 사람도 없었습니다. 먼 곳으로 가기 위해.

 

하지만

그나마 옛 동료 서수남이 빈소를 방문했는데 그는 꽃 속에 묻혀있는 고정숙의 영정 사진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그만 눈물을 흘리기까지 했죠.

이후 홀로 남은 동생 고재숙은 “언니에게 미안하다. 우리 남편의 강한 반대로 나 때문에 그룹 활동을 못 했다. 언니는 이제 아이가 많이 컸으니 활동하자고 했는데, 내가 조금만 있다가 하다가 그렇게 됐다”라며 미안한 마음을 드러냈습니다.

고재숙은 “우리는 자매가 아닌 쌍둥이 아니냐. 언니가 아프면 나도 아팠고 언니가 냉면을 먹고 싶다 말하면 나도 마침 먹고 싶었으며 그렇게 60년을 같이 붙어 있었다. 그런데 언니가 가니까 너무 충격을 받아 매일 울고 싶고 매일 보고 싶다”라며 눈물을 글썽였는데요.

우리들의 젊었던 시절 그리고 화려했던 이들이 어느덧 세월이 흘러 이렇게 떠나고 있으니, 흘러가는 세월이 어찌나 야속한지 참으로 안타까운 일들이 아닐 수 없는 것 같습니다.

모쪼록 위암으로 9개월 동안 고통스러웠던 만큼 하늘에서는 고통 없이 편안하게 지내기를 바라며 삶과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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