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나 갑작스러운 이별, “평생을 연기에 몰두하면 뭐하나..” 최근에서야 공개된 충격적인 변희봉 사인 내용..

갑작스런 변희봉 씨의 부고 소식이 알려지자 영화계와 연예계는 큰 슬픔에 빠졌습니다.

동료

드라마, 영화 등 다수의 작품에 출연하며 유명 배우로 활동한 변희봉에게 배우와 관계자들이 추모하고 있다. 변희봉은 지난 몇 년간 건강이 좋지 않았으나 최근 회복됐다.

역학적 상황으로 인한 영화계의 어려운 상황이 개선되는 만큼, 앞으로도 계속 활동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아울러 변희봉은 올해 초까지 활발한 활동으로 팬들을 만나온 바에 많은 이들이 안타까움을 표하고 있다.

네티즌들은 평생 긍정적인 자세로 건강을 관리했던 변희봉 씨에 주목하며, 언제나 활발하고 건강했던 그가 어떻게 갑자기 세상을 떠났는지 궁금해하고 있습니다. 더 자세히 알아봅시다.

 

변희봉

그의 삶과 죽음의 원인, 그리고 그의 마지막 상황에 대해서는 흥미로운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의 삶을 보면 어찌 보면 지루할 수도 있지만, 오늘날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큰 울림을 준다.

영화배우 변희봉은 1942년 6월 8일 전라남도 장성에서 태어났다.

 

 

올해 나는 81세가 되었다.

변희봉 씨는 원래 로스쿨을 다녔지만 변호사 시험에 응시할 생각은 없었다.

변희봉의 아버지는 변희봉이 변호사가 되기를 원했지만 변희봉은 처음부터 그럴 기회가 없었다.

그래서 서울에 있는 친척이 운영하는 제약회사에 취직했는데 그 회사에서 축농증약, 여성미용약, 감기약 등을 생산하고 약상자 가져오는 일만 그 사람이 담당했어요.

그리고 그는 매일 침실에 누워 라디오 드라마를 들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그래서 ‘시험에 응시하자’는 마음으로 성우 시험을 봤는데 합격했어요.

변희봉은 성우로 출발했지만 사실 성우라는 직업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시작했고, 전라도 사투리 때문에 고민도 많았다.

방송사 입사 후 성우 양성을 할 때 담당 선생님들이 “절에 가세요. “네 사투리 때문에 이러면 안 되니 거기 있어라”고 계속 혼났어요.

이로써 변희봉의 두 번째 성우 경력은 실패했다. 같은 반 친구인 송재호와 전운은 경상도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사투리를 전혀 사용하지 않았으나 변희봉의 사투리는 나아지지 않았다.

 

한편

변희봉에게 수모는 이루 말할 수가 없었고, 사람을 아주 비참하게 만들었지만 ‘그냥 박차고 나가면 안 되니까. 한번 버텨보자’라는 심정으로 참았다고 합니다.

게다가 당시 경제적으로도 많이 힘들었던 성우를 하면서 월급을 3000원을 받았는데, 당시 하숙비가 2700원이었죠.

 

 

그래서 하숙집에서 쉴 수도 없이 쫓겨나기도 했는데요.

변희봉의 아버지 역시 그가 성우 생활을 하는 것에 반대하셨는데, “왜 멀쩡하게 잘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연예계 일을 하느냐”라고 성하셨죠.

그가 이쪽 일을 하지 못하도록 달래도 보고 참 여러 가지 방법을 쓰셨지만, 이미 방송 쪽에 미친 그는 그런 아버지의 뜻을 따르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변희봉은 연극배우로 데뷔하게 될 기회를 얻게 되는데요.

변희봉은 한 2~3년 정도 그렇게 성우 생활이 순탄치가 않다가 차범석 선생님의 극단 산하에서 연극을 하는데, 어떤 사람이 펑크를 내는 바람에 연극에 오르게 됩니다.

변희봉은 당시를 회상하며 “전 별로 희망도 없는 인생이었어요. 무언가를 하기는 해야겠는데 매일 술이나 마시고 다니던 시절이었어요. 그때는 참으로 인생에 질서가 없었어요”라고 말했는데요.

이후 변희봉은 연극배우로 연기의 기초를 배우게 되었고 티비가 활성화되면서 탤런트로 진출하게 됩니다.

하지만, 변희봉은 TV에 출연하더라도 악역만 도맡아 했는데, 3.1절 때는 왜놈 앞잡이, 6.25 때는 인민군 조물애기, 그리고 8.15 때는 이완용의 인력거꾼으로 출연했죠.

연속극 ‘수사반장’에서 조차 사기꾼이나, 사이비 교주, 잡범 등으로 주로 나왔지만, 지금 이런 역할을 잘 소화하면 앞으로 언젠가는 자신에게도 좋은 역할이 오겠지라는 희망을 품고 진짜 열심히 합니다.

이후 변희봉은 정말 티비 탤런트로 빛을 보게 되는데요.

1979년 ‘안국동 아씨’에서 점쟁이 연기로 인지도를 올렸고, 1983년 ‘조선왕조’, 500년 ‘설중매’에서는 유자광 역할을 맡으면서, ‘세상이 다 이 손 안에 있소이다’라는 유행어를 만들 정도로 큰 인기를 누리기도 했죠.

하지만, 당시에는 젊고 잘생긴 미남 배우를 선호하던 시절이었는데. 변희봉은 이미 나이가 들고 부인까지 있었던 상황이었습니다.

참고로 1990년대에는 트렌디 드라마가 유행했고, 변희봉처럼 나이가 많은 연기자들은 출연할 기회가 많이 줄어드는 상황이었죠.

경제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최악의 상태에서 아내와 함께 고향으로 내려가려고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봉준호 감독이 전화를 걸어와서 “영화 ‘플란다스의 개’에서 개를 먹는 아파트 경비원 역할을 맡아달라”라고 부탁을 합니다.

변희봉은 그걸 거절하는데 과거 영화에 대한 안 좋은 기억도 있었고, 나이도 많은 자신이 주인공도 아닌 그저 추한 들러리 역할이 개를 먹는 괴짜 경비원역을 맡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죠.

하지만, 봉준호 감독이 자꾸 부탁을 해서 어쩔 수 없이 한 번 만났는데, 그 자리에서 봉 감독은 자신이 출연한 드라마를 줄줄 읊어대자 결국 거기에 말려서 출연하게 됩니다.

변희봉은 사실 영화 촬영이 끝난 다음에도 지하실에서 개를 잡아먹는 역할을 한 것이 계속 마음에 걸려서 영화 시사회장에도 가지 않으려고 했는데, 봉 감독이 자꾸 같이 가자고 하는 바람에 소주를 병째 마신 다음에 취한 채로 시사회장에 갑니다.

 

그런데

영화를 실제로 보니까 아주 근사했는데, 생각지도 않은 장면들이 인상적이기도 했고 비록 ‘플란다스의 개’가 흥행에는 실패했지만, 이후 수많은 영화에 출연하게 되는 변희봉의 연기 인생에서 어떤 전환점이 되죠.

이후에도 봉준호 감독의 ‘살인의 추억’, ‘괴물’ 등에 연이어 출연하기도 하는 등 봉준호와의 깊은 인연을 이어나갑니다.

변희봉은 “봉 감독과 새 작품을 했는데 한 번도 배우에게 기분 나쁘게 말하거나 지시하지 않았어요. 그러면서도 자기 생각대로 배우의 연기를 유도하는 탁월한 능력을 가졌죠”라고 말했는데요.

영화 ‘괴물’ 촬영 당시 봉 0감독이 지나가는 말처럼 “손녀를 잃었을 때 아버지와 할아버지 중 누가 더 슬플까요”라고 한 마디 툭 던졌다고 합니다.

변희봉은 그걸 듣고 알아들었는데, ‘현서에게 가는 마음은 아버지 송강호에게 넘겨주라’라는 뜻이었죠.

그래서 자신의 마음은 아들인 송강호에게 맞추게 되었고,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괴물에게 처절하게 응징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이어지게 되었죠.

영화 ‘괴물’에서 자신의 연기의 카리스마가 느껴졌다면, 그건 자신의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봉 감독의 것이라고 말하는데요.

확실히 봉준호 감독의 연출력이나 또 그것을 이해하고 제대로 표현하는 변희봉의 궁합이 무척 좋네요.

변희봉 씨 부인과 결혼 이야기를 하자면, 아내는 전남 해남 윤선도 집안 사람인데 형님께서 혼사를 주선해 주셨죠.

그런데 당시만 해도 변희봉은 워낙에 돈이 없어서 누가 자신에게 돈 좀 갖고 오는 사람에게 결혼하고 싶은 마음이 많았는데, 아내에게는 그런 것이 하나도 없었는데요.

변희봉은 처가집이 경제적인 지원을 해주기를 바랬는데 결혼식 전날이 되도록 아무런 말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날 술을 엄청 마셔버렸는데 인사불성이 되도록 술을 마시고는 ‘나 장가 안 간다. 결혼 안 한다’라고 선언했죠.

하지만, 변희봉은 당시 광주에서 식을 올렸는데, 멀리 서울에서 온 손님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결국은 결혼식을 올릴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이후 변희봉은 딸 3명을 낳게 되는데요.

 

이어

변희봉이 악역을 하도 많이 맡는 바람에 아이들 역시 많이 힘들었는데, 어느 날에는 당시 초등학교 6학년이었던 큰딸아이가 울면서 집으로 와서는 ‘아빠 간첩, 범인, 사이비, 교주, 그런 거 안 하면 안 돼? 우리가 못 먹고 살아?’라고 물었죠.

그래서 방송국 부장에게 너무 악역만 받는다고 항의를 했더니, ‘미친놈’이라는 말만 듣고 말았는데요.

변희봉은 80년대 주로 티비 드라마 연기자로 활동하다가 영화배우로 외도를 하기도 하지만 곧 그만둡니다.

변희봉은 ‘나도 영화배우를 한번 해봐야지’ 하는 바램을 가지고 있었던 터라, 실제로 80년대 영화에 출연하기도 했지만, 당신은 주로 성에 대한 영화들이 대세였고, 그래서 얼른 다시 티비로 되돌아가는데요.

아무튼 변희봉은 이렇게 훗날 봉준호 감독에 의하여 상처가 씻기기 전까지 영화계에 대한 안 좋은 감정 혹은 불신을 가지고 살게 되었죠.

변희봉은 젊은 시절 경제적 가난으로 인해 고충이 매우 컸는데 그래서 부인에 대한 고마움이 크다고 합니다.

마이너스 통장이란 것이 처음 나왔을 당시 돈이 없어서 마이너스 통장을 만들었는데 금세 상한선을 넘어버렸죠.

외환 위기 당시에는 마이너스 통장이 8000만 원이 넘어버렸고, 마누라에게 고통스러운 고민과 큰 걱정 허리를 준 것을 지금 생각해도 참 미안하다고 하는데요.

1997년 외환위기 당시에 변희봉 역시 큰 위기를 맞게 됩니다.

당시 변희봉은 취미로 분재에 빠져 있을 때인데 이게 취미를 넘어서 사업으로 확대되었죠.

서울 근처의 땅을 1200 평 사서 나무를 엄청나게 심었는데, 소나무, 매화 등등을 9년 정도를 키워서 이제는 수출을 하려는 찰나, 외환위기가 빵하고 터져버리자 완전히 망했는데요.

변희봉은 당시 드라마 출연도 잘되지 않았을 때였고 결국 나무는 어떤 사람에게 다 넘겨버리고 고향으로 내려갈 생각을 합니다.

변희봉의 인생을 살펴보면 어떻게 보면 찌질한 인생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처음 성우로 입사했지만, 사투리 때문에 제대로 일할 수도 없어 갖은 모욕을 듣습니다.

그리고 젊은 시절에는 돈이 너무나 없어서 부인이 재산 한 몫을 가져오기를 은근히 바라기도 했고요.

 

이후

그토록 바라는 연기를 하게 되었지만, 오랜 세월 동안 악역만 하면서 가족들에게 괴로움을 주기도 했죠.

또한 IMF로 모든 것을 잃고 고향으로 되돌아갈 준비를 하다가 다시 빛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변희봉은 췌장암 투병 생활 끝에 완치 판정까지 받았으나 암이 재발하면서 다시 투병 생활을 이어오다가 끝내 세상을 떠났습니다.

하지만, 변희봉은 살아보니 젊은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하는데요.

“좌절하지 말았으면 좋겠어요. 내 지난 인생을 돌아보니 이렇게 해서 내가 어떻게 살겠느냐라는 생각을 하게 되면 한도 끝도 없이 어려워질 뿐이에요. 꿈을 가지고 때를 기다려야 비로소 기회가 오는 겁니다. 역시 지난 인생 동안 괴롭고 어두웠던 시절이 있었지만 그런 시련 없이 크게 오는 것은 없는 것 같더군요. 시련을 겪어 봐야 그다음에 조그마한 행복도 크게 다가오지 않을까요”라고 젊은 사람들에게 당부의 말을 전했습니다.

하늘에서는 몸과 마음이 모두 아플 일 없기를 바라며 삼각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