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서야 행복한 노년 즐기나 하더니…” 62세 원미경의 갑작스런 소식으로 모두가 같이 슬퍼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잘 살고 지낼 줄 알았는데..” 62세 원미경의 눈물나는 소식으로 모두가 같이 슬퍼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원미경은

60년에 강원도 춘천시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녀의 아버지는 함흥 출신으로 6.25 때 혈혈단신으로 월남하여 결혼한 후, 춘천에서 대지 280여 평의 큰 집에서 단란한 가정을 꾸리고 원미경을 낳았는데요.

어렸을 때만 해도 부족함이 없었던 원미경의 가정은 원미경이 5학년 때 아버지가 친구의 빚보증을 잘못 선 게 화근이 돼 집과 땅, 산까지 다 넘어가게 되면서 어려운 상황을 맞이하게 됩니다.

이후 학창 시절을 보내던 원미경은 고3 중반에 미스 롯데 선발대회가 있다길래, 장난삼아 친구들과 함께 응모하게 되는데 당시 수많은 쟁쟁한 경쟁자들을 뚫고 1위에 입상하면서 tbc 공채 20기 탤런트로 브라운관에 데뷔하게 됩니다.

당시 대회에 함께 참가했던 이미숙은 나중에 당시를 회상하며, 자신이 미스 롯데 1등을 할 것이라 자부하고 있었으나, 세련된 외모의 원미경을 보고 기가 눌렸고, 자신은 인기상에 그쳤다고 털어놓기도 했는데요.

그렇게 원미경은 예쁜 외모로 주목받으며 데뷔하자마자 화려한 연기 경력을 쌓게 됩니다.

당시 출연했던 영화들에서 대종상 신인여우상과 백상예술대상 영화 부문 신인상을 휩쓸었고, 80년대 여배우 트로이카 중에서도 단연 독보적으로 잘나가게 되는데요.

 

 

전성기 시절에는

80년대 트로이카인 이미숙, 정애리와 비교되기보다는 당시 절정의 인기를 누렸던 2세대 트로이카 여배우들과 자주 비교되곤 했습니다.

즉 최전성기 때의 원미경의 경쟁 대상은 동시대의 여배우인 이미숙, 정애리가 아니라 정윤희 등이 포진한 1970년대 트로이카 여배우였던 셈인데요.

데뷔한 지 얼마 안 된 신인이었지만, 단숨에 큰 인기를 끌면서 이미 굳건하게 자리 잡은 한 세대 위의 배우들과도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인기를 누리며 꽃길만 걷던 원미경.

하지만 1982년 그녀에게 갑자기 큰 시련이 닥치게 됩니다.

원미경은 어느 날 당시 인기 잡지 ‘선데이 서울’의 사진 화보를 찍으러 지방에 가게 되는데, 사진 기자와 함께 지방에 경치 좋은 곳으로 가서 장시간 동안 사진 촬영을 하게 되는 과정에서 단둘이 장시간 동안 함께 작업을 하다 보니 서로 많은 대화를 나누게 되었고, 그렇게 서로의 고충을 토로하고 위로해 주다 보니 어느덧 둘은 자연스럽게 연인 관계로 발전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 기자는 14살 연상이자 아이도 있는 이혼남이었고, 한창 연기 활동에 매진해야 할 상황에서 이혼남 아저씨를 만난다는 원미경을 부모님이 완강히 반대하면서 그녀는 잠시 사귀었던 그 사진 기자에게 이별을 선언하게 되는데요.

하지만 그 기자는 그 일로 인해 원미경에게 앙심을 품고 보복하기 위해서, 사실을 크게 부풀려 과장된 루머를 퍼뜨리게 되는데, 그 기자는 ‘원미경이 14살 연상의 아이까지 있는 기자와 동거한다’, ‘원미경과 나는 연인 관계다’라는 이야기를 대중들에게 퍼뜨렸고, 이 소문은 삽시간에 널리 퍼져서 많은 이들에게 큰 충격을 안겨주게 됩니다.

한창 잘나가는 최고의 여배우가 아이까지 있는 남자와 동거를 한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원미경의 이미지는 급격히 실추되었고, 세상이 발칵 뒤집어지게 되는데요.

그 사건으로 인해 원미경은 kbs 주말극 ‘순애’에서 도중하차하는 수모를 당하게 되었고, kbs의 출연이 어려워진 그녀는 이후 mbc 드라마 ‘황진이’에 출연하며 재기의 불씨를 살리려 했지만, 당시 kbs 전속 배우였던 원미경은 자사에만 출연하기를 바랐던 kbs의 입장 때문에 mbc와 마찰이 생기면서 다시 1개월 만에 도중하차하는 상황까지 벌어지게 됩니다.

그런데 이 시기에 원미경은 백지 수표설 루머까지 퍼지며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는데요.

당시 모 방송사의 간부가 원미경에게 우리나라 굴지의 중공업 회사 회장과 만날 것을 권유했고, 그 대가로 백지 수표를 주겠다고 제안을 했지만 원미경은 거절을 했는데, 그러면서 그 방송사의 간부에게 미운 털이 박힌 원미경이 드라마에서 퇴출당했다는 소문이 퍼지게 된 것입니다.

이 원미경 백지 수표설에 대한 정확한 진위는 가릴 수는 없지만, 이러저러한 루머들이 자꾸 터져 나오면서 원미경의 이미지는 커다란 손상을 입게 되었고, 피어리스 전속 광고 모델 계약이 파기되었고, tv 출연 금지 연예인 목록에까지 오르게 됩니다.

그래서 이 기간 동안에는 원미경의 영화 출연이 상당히 많아지게 되는데요.

 

 

그녀는 이런 침체기 속에서도 꾸준히 영화에서는 흥행을 하였는데, 특히 작품성으로도 인정받아 그녀가 출연한 영화가 국내 영화로는 최초로 해외 칸 영화제에 초청까지 받게 됩니다.

그러던 1984년에 tv 출연 금지가 해지되면서, 이후로는 완전히 mbc로 옮겨 본격적으로 드라마 중심으로 활동했는데요.

복귀하자마자 ‘간난이’로 드라마 재기에 가볍게 성공했고, 정애리와 공동 출연한 ‘사랑과 진실’로 인기 회복은 물론, 연기 대상에서 최우수상을 받는 등 제2의 전성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그러나 드라마에 복귀한 이후에 영화에서는 상대적으로 흥행에 지지부진했는데, 그러다 ‘변강쇠 시리즈’가 성공하면서 영화에서의 성적 부진마저도 만회하게 됩니다.

그녀가 전성기 시절에 출연했던 영화는 무려 44편에 이를 정도로 인기가 대단했는데요.

또한 그녀는 22편이나 되는 cf 광고 모델로도 활약했는데, 80년대 중반 당시 원미경의 cf 광고 출연료는 무려 1억 원이었고, 이것은 80년대 당시 가장 높은 광고 출연료로 원미경은 광고 출연료가 1억 원을 돌파한 최초의 연예인으로 기록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원미경은 1985년 드라마 ‘조선왕조 500년’에 출연하게 되는데 당시 조연출이었던 이창순 피디가 배우들에게 출연료를 지급해 주었는데, 이상하게도 이창순 피디가 다른 배우들에게는 전부 출연료를 지불했지만, 원미경의 출연료만 누락이 되면서 원미경은 출연료를 받기 위해서 이창순 피디를 개인적으로 찾아가게 되었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서 두 사람은 개인적으로 만남이 이뤄지게 되었는데, 이렇게 원미경과 이창순 피디는 자주 만나게 되면서 두 사람 간에는 애정이 스물스물 싹트게 됩니다.

이창순 피디가 얼굴도 미남이고 성격도 좋은 데다, 드라마에 출연하는 원미경을 끔찍이 아껴주는 등 알뜰살뜰이 잘 챙겨주면서 원미경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었던 것인데요.

 

당시

‘조선왕조 500년’의 마지막 촬영 날에 원미경은 감사의 인사를 건넬 겸 음료수를 사서 이창순 조연출을 찾아가게 됩니다.

그러나 그 자리에는 이창순 조연출 외에도 다른 피디들이 함께 있었고, 자신이 사 갖고 간 음료수는 다른 피디에게 빼앗겨 버렸다고 하죠.

이에 원미경은 이창순 조연출에게 대신 ‘커피를 사주겠다’라며 데리고 나와 커피점에서 커피를 사주게 됩니다.

그 자리에서 원미경은 이창순에게 ‘자신이 먼저 커피를 샀으니, 내일은 당신이 밥을 사주어야 되는 거 아니냐’라고 요구하게 되는데요.

평소에 이창순 피디에게 호감을 갖고 있었던 원미경은 커피를 사주면서 은근슬쩍 그에게 데이트 신청을 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다음 날 이창순 피디와 원미경은 홍대 입구에서 만나서 조촐하게 우동을 먹으면서 첫 데이트를 즐기게 되는데요.

이렇게 원미경과 이창순 피디는 1년 6개월 동안 열애를 한끝에 결혼에 골인하게 되었고, 슬하의 1남 2녀를 낳게 됩니다.

 

이후 그녀는

2002년도를 마지막으로 연예계에서 은퇴를 하며 가족들과 미국으로 떠나게 되는데요.

원미경 부부는 자녀들의 미국 유학을 뒷바라지하기 위해서 함께 미국으로 갔던 곳인데, 미국 워싱턴 dc 인근으로 이사한 원미경은 새벽 4시에 일어나서 아이들 밥을 짓고,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난 후 자신은 랭귀지 스쿨에 가서 영어회화 공부를 하는 주부로서의 생활이 계속 반복되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원미경은 미국에서 자녀들 유학 뒷바라지하면서 14년의 세월이 훌쩍 흘러가게 되는데요.

그녀는 미국에서 자녀들과 남편을 뒷바라지하면서 철저히 주부로서의 삶에만 몰두하고 지냈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다 어느덧 6살 때, 미국에 온 막내딸까지 대학에 들어갔을 정도로 다 크게 되었는데, 자녀들이 어느 날 원미경에게 엄마가 그동안 우리를 키우느라 고생했지만, 이제는 엄마의 일을 해도 되지 않겠냐며 이야기하자 그 말에 용기를 얻은 원미경은 처음에는 망설였지만 아이들에게서 이제 떠나야 할 때라고 느끼게 되면서 드디어 14년 만에 국내의 드라마로 다시 복귀하게 됩니다.

어느덧 환갑을 넘긴 원미경은 미국에서는 전혀 관리도 못 받고 살림만 하고 살았다 보니 전혀 배우답지 않게 주름살도 많고, 손도 쭈글쭈글하고 거친대요.

 

하지만

그녀는 얼굴의 주름살이 부끄럽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다고 합니다.

‘자신의 주름 안에 엄마로서 자신의 가정이 있고, 아이들이 있는 게 아닌가 싶다고 말하며 그게 젊어서는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을 자신의 나이에 자신의 주름이 표현하는 게 아닌가’라며 자랑스럽게 생각한다고 하는데요.

젊은 시절 어려운 집안 사정으로 데뷔하여 소녀 가장처럼 일하다가 악의적인 스캔들 사건으로 큰 시련을 맡기도 했었던 원미경 씨.

그러다 다시 재기에 성공하며 왕성히 활동하던 도중에 연예계를 은퇴하며 14년이나 주부로서의 삶에 최선을 다하다가, 이제는 어느덧 늙어서 자신의 관리 안 한 얼굴의 주름살마저도 그간의 인생이 담겨 있다고 말하며 자랑스러워하는 배우 원미경.

이제 환갑이 지나며 노년의 인생으로 접어든 배우 원미경에게 시청자 여러분의 따뜻한 응원을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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