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미는 한국 연예계에서 주목할 만한 인물로, 눈에 띄는 아름다움과 뚜렷하게 대담한 여성미로 ‘한국의 엘리자베스 테일러’라는 별명을 얻었습니다. 이는 한국 여배우들 사이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타이틀입니다. 1957년 김기영 감독의 ‘황혼열차’로 데뷔한 그녀는 이후 홍성기 감독과 함께 한국 여배우 엘리트 내에서 그녀를 스타덤의 상위 계층으로 끌어올린 영화 ‘춘향전’에서 공동작업을 했습니다.
본명은 김지미였다. 그녀는 1958년 영화감독 홍성기와 결혼해 스타덤에 올랐으나 최무룡과 스캔들로 이혼했다. 그는 당시 기혼자였습니다. 그녀가 살았던 봉건 사회로 인해 이 사건이 그녀의 사회적 지위에 미친 영향은 상당했습니다.
이 사건 이후 최무룡은 김지미를 주연으로 한 영화 ‘슬픔’을 제작하며 김지미에 대한 사랑을 드러냈다. 불행하게도 이 결합은 단명하여 별거로 끝났습니다.
그녀의 동화 같은 로맨스는 스크린 같은 여정에서 끝나지 않았다. 이번에는 그 시대를 빛낸 스타였던 가수 나훈아가 주연을 맡았다. 그러나 이 결혼도 시간의 시험을 견디지 못하고 파탄에 이르렀다. 조명과 음악이 가득한 웅장한 무대에서 펼쳐졌던 그들의 사랑 이야기도 시작되자마자 종영을 맞이했다.
지미 김은 어머니의 주치의였던 심장 전문의였던 네 번째 부인과 53세에 결혼했다. 하지만 이 노조도 수명이 짧았다.
김지미는 결혼과 이혼에 대해 “그때도 다를 수 없었다. 그때도 지금처럼 충실하게 살았다”고 말했다.
이날 그녀는 평범한 여성으로써 행복한 사랑을 표현했다. 가족간의 사랑이다.
김지미는 “딸 둘에 손자, 손녀까지 여섯 명의 식구가 있다. 대가족이다”라며 “사실 영화를 할 때에는 가족이라는 개념이 없었다”라고 말문을 열었다.
그녀는 “가정이 무엇인지도 느끼지 못했고,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을 가져 보지도 못했다”라며 “그런데 최근 몰랐던 가족의 개념이 생겼다”라고 덧붙였다.
또 그는 “내가 스캔들에 깨졌을 때 다른 사람들이 자식들에게 수군거리며 이야기를 했을 텐데, 가족들은 그런 내색을 먼지만큼도 한 적이 없다”라고 말을 이었다.
마지막으로 그는 “이제 와서 가족에게 빚을 다 갚고 나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라며 “지금도 열심히 가족에게 봉사하고 있다”라고 너스레를 떨어 훈훈함을 더했다.
김지미는 한국영화사 최고의 여배우였다. 데뷔초기였던 1960년대 중반까지는 선배 최은희와 경쟁했으며, 후기인 1960년대 후반부터는 후배 윤정희와 치열하게 경쟁했다.
957년 김기영 감독에게 픽업되어 <황혼열차>로 데뷔한 김지미는 1990년대까지 활동하면서 450여편의 작품을 남겼으며, 1985년에는 영화사 ‘지미필름’을 창립하여 제작자로도 활동했고 한국영화인협회 이사장,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이사장 등을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