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그우먼 이경애 결국…” 30년 전 한 달에 1억 벌면 뭐하나… 최근 알려진 그녀의 충격적인 근황과 공개된 안타까운 가정사…

여러분은 혹시 인간에게 가장 훌륭한 약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개그우먼 이경애의 소식에 앞서

그것은 바로 웃음으로 오죽하면 신이 내린 최고의 명약을 웃음이라고 하는데요.

심지어 슈바이처는 우리 몸에는 완벽한 약국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웃음이라고 했으며 그래서 잘 웃는 사람이 가장 건강한 사람이라고 했답니다.

그런데 그런 귀한 웃음을 사람들에게 선사하는 직업이 있으니, 다들 아시다시피 바로 개그맨, 개그우먼들로 오늘의 주인공 역시 귀한 웃음을 전하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개그우먼입니다.

그녀는 “KBS 코미디 공모전에서 최우수상을 받으며 하루아침에 스타가 됐다”고 말했다. 다음날 집에서 방송국까지 버스를 타고 가는데 버스가 너무 시끄러워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방송국 여기저기를 다녔어요. 모두가 나에게 전화했고 나는 구석구석, 모든 라디오 쇼, 모든 일을 하고 있었고 그 당시에는 돈이 정말 좋았습니다.

 

 

이처럼 단순히

재미있을 뿐만 아니라 생활 속에 녹아든 이경애의 코미디는 관객들의 큰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었고, 데뷔 후에도 한동안 쉬지 않고 뛰어다녔던 그녀는 마치 자신의 소명이 예술가가 되는 것 같았다. 누구보다 성공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한때 정신을 잃었던 생모가 다섯 번의 극단적인 시도를 하자 “엄마, 낫게 해줄게요”라고 말했다. 제발 살려달라”고 애원해야 했고, 고인이 된 남편은 간이식을 받고 겨우 목숨을 건진 것에 감사하던 중에 결국 이경애 신용카드로 술을 마시고 다른 여자와 동침하게 됐다. 결국 우울증으로 인해 이제는 쓰레기도 줍고 남을 돕는 일까지 하게 됐다. 모든 고난을 스스로 겪어야 했던 이경애.

그녀의 가슴 아픈 삶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1964년 서울에서 태어난 이경애는 어머니를 부양하고 싶었고 어려서부터 가난이라는 가혹한 현실에 직면해 훗날 스타가 됐다.

 

뱃사람이었던 아버지는

재산 대부분을 술값으로 써버렸고, 그래서 가족의 생계를 책임진 건 어머니였는데 당시 어머니는 자신의 키보다 더 큰 행상을 머리에 이고 다니며 힘겹게 오 남매를 키워주셨습니다.

결국 어머니는 아버지 몰래 행상을 내야 했고, 또한 당시 계절마다 다른 장사를 하는데 ‘겨울이면 추우니까, 고기가 잘 팔린다’라고 마장동까지 가서 고기를 떼다가, 거기서부터 걸어오면서 온종일 고기를 팔았고, 겨울이 지나면 봄에는 자두가 나오니까 자도 밭에서 자두를 따다 팔곤 했습니다.

 

 

이처럼 당시 어머니가 어떻게든 식구들을 먹여 살리려고 하는 모습을 보이자 형제들이 전부 어머니의 그런 모습을 보고 잘못되지 않을 수 있었고, 그럼에도 하늘도 무심하지 그녀의 나이 고작 14살 때 어린 소녀가 감당할 수 없는 인생의 모진 시련들이 드리우고 말았습니다.

그녀가 중학교 때 어머니가 정말 고생해서 한 푼 한 푼 모아 몇 년에 걸쳐 힘겹게 모은 돈으로 당시 70만 원짜리 집을 겨우 장만했는데, 하지만 그거를 단 1년 만에 아버지가 노름하면서 한 방에 말아먹자, 결국 이때 어머니의 인생에서 큰 절망이 왔는지 이후 모든 걸 놔버리고 정신마저 이상해지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어머니가 정신이 나간 뒤로는 미친 사람처럼 허구한 날 집을 나가버렸고, 그럴 때마다 어린 이경애가 괜히 느낌이 이상해서 뒷산에 가보면 아니나 다를까, 어머니는 해서는 안 될 극단적인 선택을 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면 어린 이경애는

어머니를 붙잡고 ‘엄마, 이러지 마. 내가 정말 성공해서 호강시켜줄 테니까. 제발 이러지 마’라며 엄마 앞에서 울며 빌어야 했고, 하지만 그녀의 어머니는 ‘너 때문에 내가 생을 마감하지도 못한다’라며 울면서 막 비는 어린 딸을 마구 혼냈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그녀가 두들겨 맞으면서도 엄마를 간신히 집으로 데려다 놓았지만, 다음 날 자고 일어나면 엄마가 또 사라져 있다보니, 당시 어린 이경애는 날마다 미칠 지경이었고, 그리고 또 누군가가 저쪽 개천가에서 꽃을 꽂고 앉아서 노래를 부르고 있다고 하면 그게 엄마라 또 거기에 가서 엄마를 붙들고 집으로 데려다 놓아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이 일로 어머니의 간, 위, 신장이 다 나빠져 이후부터는 어머니가 아무것도 못 한 채 그냥 병원에 가만히 누워만 있으면서 병은 갈수록 깊어졌고, 그러자 그때 이경애가 깨달은 게 ‘성공해야 하는구나. 돈이 없으면 이런 일이 벌어지는구나. 내가 뭘 하든 성공해야 하는구나’였습니다.

 

 

그런데 생각을 해보니 공부는 안되고, 그때 인생을 설계한 게 ‘그래 연예인이 되자, 연예인은 나이도 공부도 상관없으니까. 이건 마음만 먹으면 될 수 있겠다’ 싶어 그때부터 연예인을 꿈꾸게 되었고, 어쩌면 연예인을 선택했다기보다 당시로써는 연예인 밖에 선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어린 시절부터 연예인의 꿈을 꿨으나, 훗날 그녀가 스무 살의 나이로 개그 콘테스트에 나가 대상을 타기 전까지는 정말 사춘기도 없이 혹독한 시간을 보내야 했는데요.

 

특히 그녀

중고등학교 때는 안 해본 아르바이트가 없을 정도로 돈을 벌어서 학비를 대고 집안의 가장이 되어야만 했습니다.

그러다 한 번은 그녀가 고등학교 때 여느 때처럼 돈 되는 아르바이트를 찾던 중 수세미 파는 아르바이트가 짭짤하다는 얘기를 듣고, 큰 가방에 수세미를 가득 넣어 당시 초등학생 동생의 손을 맞잡고 ‘가자’ 하면서, 아파트에 들어서는 순간 경비 아저씨가 두 사람을 향해 ‘야 이리 와’ 하고 부르자, 결국 경비실로 잡혀 들어가고 말았습니다.

사실 그때 수세미 하나를 1천 원에 팔면 300원이나 남는 장사라 이경애와 동생은 부푼 꿈을 안고 있었는데, 하지만 아파트에 들어서자마자 경비 아저씨가 하는 말이 ‘너희 이런 데 잡상인 출입 금지인 거 모르느냐. 그리고 만약 잡상인이 오면 그 물건들 다 뺏는 거 알아. 몰라’라며 수세미가 가득 든 가방을 뺏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순간 이경애의 머릿속에서는 수세미 값이 떠올랐고, 아픈 엄마 도와주려고 했던 일인데 ‘여기서 이걸 빼앗기면 장사고 뭐고 그야말로 큰일이다’ 싶어, 훗날 그녀의 고백으로는 동생하고 같이 경비 아저씨에게 잘못했다며 무릎을 꿇고 정말 거짓말 하나도 안 보태고 4시간을 빌었다고 했습니다.

 

당시 토요일

학교 마치고 오후 4시에 붙잡혀서, 저녁 8시가 될 때까지 종일 울면서 비는데, 그때 어린 이경애가 머릿속으로 ‘세상에 정말 저렇게 지독해도 지독해도 저렇게 지독한 어른도 있구나’ 하고 처음 알았는데, 자기 자식 같은 애들이 빌면 대충 혼내다가 줄 법도 한데 무려 4시간을 울면서 빌자 겨우 돌려받을 수 있었다고 했습니다.

당시 얼마나 울었는지 동생과 이경애의 눈이 퉁퉁 부었고, 아무튼 결국 그걸 돌려받고 집으로 가려는데 그런데 그 순간 오기가 생겨, 그녀가 동생에게 ‘야 우리 지금 네 시간이나 손해 봤어. 여기서부터 집까지 걸어가면서 다 팔고 가자’라며 초등학생인 동생과 남은 수세미를 팔면서 집으로 돌아갔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당시만 하더라도 여자 연예인에게 있어 이혼이란 흔치 않은 일이다보니 대중들의 비난과 심지어 같은 동료까지도 그녀의 이혼을 두고 손가락질을 했었는데, 하지만 이때 유일하게 그녀의 곁을 지켜준 동료가 바로 임하룡이었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첫 번째 결혼이 허무하게 끝나고, 1997년 카페에서 우연히 두 번째 남편을 만나게 되는데, 당시 두 사람은 각자 한 차례씩 이혼의 아픔을 겪은 상태로 ‘서로 더욱더 이해하고 아껴주자’라는 생각으로 두 사람은 2002년 결혼까지 골인하게 됩니다.

하지만 결혼과 동시에 남편의 간이 급속도로 안 좋아지기 시작하더니, 결국 간 경화까지 오게 돼 간이식을 받게 되는데, 그래도 이때 첫 번째 남편의 간이식을 전 부인과 사이에서 낳은 큰아들이 해주면서, 남편은 다행히도 무사히 수술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남편이 살아나자 당시 그녀는 아주 고마운 마음에 내 옆에서 다른 여자를 사랑해도 이해할 정도로 그저 고맙고 다행스러웠고, 그런데 이런 일이 실제로 일어나 버리니 한때 그녀는 남편과 이혼을 심각하게 고민하게 됩니다.

 

이와 관련해

그녀는 다음과 같이 직접적으로 인정했습니다. “남편이 수술을 받고 살아남았을 때는 운이 좋았습니다. 하지만 그 이후로 여자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한번은 여행 중에 신용카드를 두고 왔는데, 돌아와보니 없어져서 남편에게 물어보니 남편이 “잘 대해줘야지. 그래서 그는 “선배님과 함께 술집에 갔다”고 말했다.

그러나 당시 남편의 뜻과는 달리 이경애가 임신을 하지 못해 아이를 가질 수 없었다.

그러나 이경애는 포기하지 않았고, 40세가 넘은 나이에 인공수정을 결심하고 마침내 꿈꿔오던 딸 희서를 낳았다. , 그리고 이렇게 소중한 딸을 늦게 낳았기 때문에 두 사람의 미래가 펼쳐질 것이다. 인생의 길은 행복한 순간들로 가득 차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러나 이경애는 병원에서 갑자기 암 진단을 받고, 다행히 맹장의 특이한 위치로 인한 오진으로 맹장염 수술에 성공하면서 이러한 행복도 잠시였다.

그래서 당시 교통사고로 재활치료를 마치지 못하고 남편의 치료에 의존해 있던 결과, 당시 이경애는 몸의 오른쪽이 마비됐다.

이런 상황에도 병원비와 남편의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방송 일을 멈출 수 없었던 그녀는 2005년 친구 이경래의 부탁으로 한 행사에 갔다가 결국 전기충격을 사서 공중으로 뛰어오르는 것.

 

이처럼 본인의

몸도 성하지 않은데 오로지 남편의 건강과 병원비를 위해 일을 해야 했고, 하지만 이런 그녀의 노력에도 딸 희서가 유치원을 졸업할 무렵 남편은 끝내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남편과 사별한 뒤 딸 희서와 살아가던 중, 방송일만으로는 부족했는지 그녀는 떡볶이 가게를 차리게 되는데, 하지만 이마저도 결국 망해버리자 당시 그녀는 복잡한 마음과 우울한 마음에 다음과 같은 고백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건 안 버렸으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파란만장 했던 인생을 견디며, 급기야 우울증 까지 시달려야 했던 이경애 씨.

다시 한번 건강한 모습으로 TV에서 모습을 보였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Leave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