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누구나 차곡차곡 나이를 먹어가고 있습니다.
피할 수 없고
누구에게나 오는 세월에 대해서는 사실 불호를 논할 일이 아니며, 피할 수 없으면 최대한 즐기든가 그게 안 되면 오는 대로 겪으며 견딜 일이죠.
어차피 미래란 불확실한 것, 온갖 변수들을 끄집어 불안해하며 발을 동동 굴려봤자 인생만 어수선해질 뿐, 물론 몇 가지의 대비들이 쓸데없다고 할 수 없지만, 사실 가장 중요한 대비는 마음가짐을 확고히 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의 주인공 강석우 역시 한때는 당대 최고의 청춘스타로서 많은 사랑을 받았으나. 지난 2022년 3차 접종 이후 눈앞에 먼지나 벌레처럼 생긴 뭔가가 떠다녀 결국 혼자 걷는 연습까지 하더니 ‘자신도 이제 늙었다’라며 모든 방송에서 하차해야만 했던 강석우.
그의 파란만장한 인생에 대해 말해보고자 합니다.
1957년 6.25 때 월남해 부산에서 고아원을 운영하신 부모님 밑에서 1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난 강석우는 어린 시절 부모님에게 단 한 번도 손찌검을 당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부모님 두 분 모두 사람에 대한 배려가 특출났기 때문인데, 일례로 하루는 그의 어머니가 버스를 타고 가시다 급정거하는 바람에 계단에 거꾸로 처박힌 적이 있었는데, 그런데 이때 그렇게 다치시고도 병원에 도착한 아들 강석우에게 하셨던 말이 “제발, 버스회사에다 운전기사 고발하지 말라”라고 당부부터 하셨으며, 그 사람의 생계가 걸린 문제라 그러면 안 된다는 얘기였죠.
그리고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그의 어머니는 아들 강석우가 목사님이 되길 바랐으나, 하지만 초등학교 6학년 때 정말 독특한 경험을 하면서 그날부로 음악가의 꿈을 가지게 되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하루는 수업 시간에 학교 밖에 지나가던 차가 ‘빵’ 하는 경적 소리를 낸 적이 있는데, 그런데 그때 선생님이 “저 음이 뭔지 아는 사람이 있냐”라고 묻자 그가 ‘솔’이라고 대답을 하게 됩니다.
그러자 선생님이 풍금 뚜껑을 열어 솔 음계를 찾더니 어린 강석우에게 잘 맞췄다며 칭찬을 해주었고, 그래서 결국 이날의 기억이 음악을 좋아하게 된 계기가 되어 이후부터 음악가의 꿈을 가지게 됩니다.
이처럼 학창 시절만 해도 훗날 본인이 배우가 될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하고, 대학 역시 영화 음악을 만들기 위해서 입학을 했는데, 하지만 대학교 2학년 때 장난삼아 나간 배우 오디션에서 덜컥 1등을 하자 그때부터 배우의 길을 걸어가게 됩니다.
이때를 그가 고백하기 “사실 나는 당시만 하더라도 연기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대학교 2학년 때 지금은 상상하기 힘들겠지만, 정부 기관에서 남녀 신인 배우 모집을 하는데 상금이 무려 100만 원이었다. 그러자 친구들이 내가 제일 외모가 준수하니 사진 촬영비까지 보태주면서 나가보라고 했고, 그리고 만약 1등을 하면 상금을 나누기로 했었다. 이처럼 나는 배우가 되고 싶어서 오디션에 나갔던 것도 아니고, 심지어 연기 연습도 제대로 하지 않았는데 무려 80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최종 합격하고 말았다. 이후 촬영장 드라마 세트장에 가긴 가는데 솔직히 끌려다니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연기하는 동안 늘 맞지 않는 옷을 입은 느낌이였고, 또한 연기가 두렵고 ‘어떻게 하면 이 불편한 옷을 벗어던질 수 있을까’ 고민했다”라고 했습니다.

아무튼 이처럼
그는 방송사 공채 탤런트가 아닌 우리나라에서 딱 한 번 실시하고 사라진 정부 기관에서 뽑은 남자 배우가 되어, 당시 방송사 3사 특채는 물론이고 단역도 거치지 않고, 바로 영화에서 주연을 맡게 되는 엄청난 특혜를 받게 됩니다.
하지만 이런 특혜가 이때까지만 해도 배우가 되는 길이 방송사 공채 탤런트가 유일한 길이었던 다른 배우들에게는 큰 불만이 되어, 당시 누구와도 어울리지 못하는 따돌림을 당해야만 했습니다.
이와 관련해 그가 고백하길 “우리 때는 tv 연기자가 되는 길은 공채였다. 그리고 공채에 들어가면 기수가 있기 때문에 서로가 굉장히 끈끈하다. 하지만 나는 한국영화진흥공사에서 선발된 배우라서 kbs, mbc, sbs 모두 특제로 가서 일했기 때문에 동기 개념이 없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은 자기들끼리 모이는데 굉장히 잘 모인다. 그런데 나는 아무도 모을 사람이 없고, 후에 개인적으로 일을 하면서 친해진 선후배는 몇 명 있긴 하지만 또래 친구는 딱 한 명으로 송승환 밖에 없다”
“그래서 ‘만약 내가 하늘로 가면 내 장례식장에는 연기자들이 과연 몇 명이나 올까?’ 이런 생각까지 해봤다. 그 사람들은 자기들끼리 가족보다 더 가까이 지내는데 그런데 나는 그런 그룹이 없다. 물론 다른 사회에 그런 그룹이 있지만 연기자 쪽에는 내가 완전히 독립군이다.”
“나 빼고 자기들끼리 서로 연락하고 어울려 다니고, 그러는 거 내가 다 안다. 심지어 일부러 나 들으라고 큰소리로 그러는 사람도 있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처럼 이때는 영화배우 출신과 tv 연기자 출신들이 서로를 배척하는 문화가 강했던 때였는데, 그는 어디에도 어울리지 못했고 또한 술도 잘 마시지 못해서 더욱 한 패에 끼지 못하는 시절이었습니다.

그리고 당시 그에게 ‘고개도 숙이지 않고 뻣뻣하게 군다. 혼자 고고한 척하지 말라’라며 손을 봐줘야겠다고 벼르던 선배들도 있었고, 심지어 면전에다 놓고 ‘건방진 놈, 재수 없는 놈’이라는 말까지 듣기도 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속으로 ‘나는 너희들과 가는 길이 다르다’라며 자존심, 교만, 오기 같은 곳으로 겨우 버텨야 했고, 그래서 결국 1985년 실제로 연기 활동을 쉬면서 다른 길을 고민하게 되는데, 하지만 막상 연기를 그만두려니까 할 게 없고, 나이도 많고 다른 재능이 있는 것도 아니라 고민을 하던 중 평생의 은인 최인호 작가를 만나게 됩니다.
당시 그는 최인호 원작의 영화 ‘겨울 나그네’에 출연해 비록 본인이 원했던 길은 배우가 아니었지만, 이제는 연기가 아니면 길이 없겠다 싶어 정말 열심히 촬영을 했고, 그리고 이 영화에서 그의 트레이드마크였던 헝클어진 머리를 만들려고 일주일간 일부러 머리를 안 감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참고로 훗날 그의 고백에 따르면 당시 본인의 성격이 워낙에 뻣뻣하고 자존심이 세서 ‘겨울 나그네’ 제작 당시 출연 배우 이름이 나오는 순서를 두고 다음과 같은 실랑이를 벌였다고 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주인공이니 이름이 제일 먼저 나와야 한다고 주장했고, 하지만 영화사 제작진들은 이미 스타 반열에 올랐던 안성기의 이름을 먼저 내세워야 했기 때문에, 당시 본인을 설득하는 데 많은 애를 먹어야 했다고 했습니다.
아무튼 결국 이 영화가 인기를 끌면서 마침내 최고의 하이틴 스타로 급부상했고, 그리고 이 무렵 그에게 있어 가장 소중한 인연을 만나게 되는데 바로 지금의 아내입니다.
당시 두 사람은 친구 생일 파티 때문에 카페에 모였다가 첫눈에 반한 강석우가 먼저 호감을 표시했고, 그런데 솔직히 그의 아내는 처음부터 좋았다기보다 유명한 사람은 어떻게 사는지 호기심이 생겨 만났다가 1년간의 연애 끝에 결혼까지 하게 됩니다.
아무튼 이후 그는 수많은 드라마에 출연하며 중년에 접어들어서부터 ‘착한 아버지’, ‘힘없는 아버지’ 등 흔히 볼 수 있는 우리네 아버지들의 역할을 많이 맡았고, 그리고 연기뿐만 아니라 다양한 방면에서 활동하게 되는데, 대표적인 예가 바로 라디오였습니다.
그런데 젊은 시절 꼿꼿한 성격이 여전히 남아 할 말은 해야 하는 성격이다 보니 한때는 구설수에 휘말려 8년간 진행했던 라디오 프로를 하루아침에 하차하기도 했습니다.
이와 관련해 그가 고백하길 “2015년 세월호 1주기를 맞아 당시 박근혜 대통령이 해외 방문에 나서는 것을 두고 내가 라디오에서 쓴소리를 했다. 당시 방송 중에 뭐라고 했냐면 ‘오늘이 세월호 1주기인데 희생자 가족들 위로하고 그래야지 아무리 국제 행사가 중요하다고 해도 지금 출국하면 되겠느냐, 정 나가야 된다면 하루 정도 일정 미룰 수 있는 거 아니냐’라고 하며 어딜 가냐고 했다. 그런데 이 말을 정치적으로 본 건데, 하지만 나는 그 아이들 부모 입장에서 한 말이었다”라고 했습니다.
아무튼 그는 정치적인 의도는 없었지만, 라디오를 하차하며 한때 집권자들에게 듣기 싫은 소리를 해서 타인에 의해 하차했다는 소문이 돌아야 했고, 그러다 2022년 1월에는 ‘3차 접종 후 글씨를 못 읽는다’라며 또 다른 라디오 프로와 더불어 당시 모든 방송을 하차하는 안타까운 일이 벌어지게 됩니다.
이와 관련해
그가 고백하길 “3차 접종 이후 눈앞에 먼지나 벌레처럼 생긴 뭔가가 떠다니는 것처럼 느끼는 비문증이 한쪽 눈에서 발생했었다. 사실 너무 두려워서 잠을 잘 이루지 못할 정도였다. 심지어 이때 나는 실명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혼자 눈을 감고 걸어보는 연습을 할 정도였는데, 뭔가 폭삭 늙은 느낌이었다. 그런데 한 달 반 정도 그러다가 천만다행으로 원래대로 돌아왔다. 이처럼 내 시력이 회복된 걸 보면 일시적인 후유증이 아니었나 싶다”라고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강석우 그가 고백하길 “우리가 살아가다 보면 조직 생활을 하게 되는데, 그런데 이 조직에서는 생각이 좀 다른 사람이 있을 수 있다. 그리고 조직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추구하는 바가 있겠지만, 그런데 다른 것을 추구하는 사람도 얼마든지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방법이 있다”
“예를 들어 젊었을 때는 술 마시는 모임이라든가 자기들의 어떤 집단에 들어가지 않으면 도태되는 것처럼 다 이야기하지만, 사실 그렇게 하지 않고 얼마든지 독립적으로 정말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방향으로 살아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다”
“그리고 살아가다 보면 지금보다 훨씬 큰 집에서 더 호사스럽게 살고 싶고 지금보다 더 좋은 차를 타고 싶은 마음이 들 때가 있다. 그리고 그렇게 살자고 들면 진짜 그렇게 살 수도 있을 것 같지만, 하지만 그러면 안 된다”
“물론 지금의 나의 모습도 누구는 호사스럽게 산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내 기준에서는 나름 검소하게 살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리고 나는 앞으로 재단을 만들려고 한다”
“막연한 구상이 아니라 구체적인 계획을 가지고 추진 중이고 그리고 이 재단을 통해 나눔과 섬김의 삶을 살려고 한다”
“그리고 딸과 아들에게도 약속을 받았다. ‘너희들 마음껏 쓸 만큼 돈을 벌어서 쓰고, 그다음에 남는 돈 아빠에게 주면 재단을 만들어서 그걸 세상에 돌리자. 그건 세상에 돌리는 게 맞는 거다’ 그렇게 이야기를 했다”라고 전했습니다.
고독한 배우 인생을 걸었던 그가 앞으로는 행복만을 꿈꾸며, 건강하게 하고 싶은 일 다 하며 지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