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만송이 장미 부른 가수.. “심수봉의 갑작스런 소식..” 강제로 병원에 입원 생활을 이어오던 것도 모자라서…

트로트와 발라드 그 중간의 감각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개척한 트롯 발라드의 선구자 가수 심수봉 씨.

심수봉 그녀의 노래는

아티스트 경지라는 찬사를 받고 있기도 한데요.

이런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지만, 그녀의 인생은 너무나 외롭고 긴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그중에서도 자신을 강제로 병원에 입원시켰던 어머니와 어떻게 되었을까요.

지금부터 심수봉 씨의 파란만장한 인생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심수봉 씨는 1955년 충청남도 서산시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가 거의 환갑이 되던 나이에 20대 처녀인 어머니를 임신하게 만들어 낳은 늦둥이였어요.

 

 

그러나 그의 아버지는 심수봉이 세 살 때 아주 일찍 돌아가셨다.

우리 아버지의 가족은 엄청납니다.

4대에 걸쳐 대대로 이어져 온 국악의 명가라고 하며, 여러 구성원이 생활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그들은 또한 140개가 넘는 앨범을 발표한 바흐 포크 음악 가문이라고도 불립니다.

이런 가문의 혈통을 물려받은 탓인지 심수봉은 어려서부터 뛰어난 음악적 재능을 보였다고 한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어머니는 다섯 살 난 수봉이를 데리고 동네 의사와 재혼했다.

우리 어머니는 그곳에서 두 명의 자녀를 더 낳았습니다.

그러나 의사는 그 소녀와 결혼한다.

심지어 시댁 식구들이 홀어머니에 대해 매우 적대적이었기 때문이라고도 했다.

 

어머니는 이혼 후 첫 남편의 아이인 수봉 하나만 데리고 서울로 이사했습니다.

딸 하나 잘 키우기 위해 곱고 예뻤던 어머니는 험한 행상일에 나섰어요.

어느 날 행상하는 어머니를 따라갔다가 어머니가 다방에서 문전 박대 당하는 모습을 보고, 어린 딸의 가슴에는 한이 맺혔습니다.

 

게다가

어렸을 때부터 몸이 안 좋아 10대 때 희귀병 진단을 받았어요.

병명도 생소한데요.

‘뇌신경 인플레’라는 병인데 신경이 너무너무 약해 큰 소리, 비속어에 치명적이라고 합니다.

지금도 그 병을 앓고 있다고 해요.

그렇게 아파서 학창 시절에는 공부를 제대로 못했습니다.

공부를 못하게 되니까 대신 음악에 더욱 빠져들었어요.

이때 여러 가지 악기를 연마하고, 혼자서 화성학을 독학합니다.

그 후 18살 때부터 돈을 벌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실질적인 가장이 되었는데 무슨 일로 돈을 벌었을까요?

 

 

미 8군에서 활동하는 단체에 가입해 드럼을 연주했다고 한다.

내가 드럼을 배운 이유는 그가 어려서부터 타고난 음악적 재능을 보여 어머니가 그를 아주 멀리 떨어진 지역에서 유일하게 피아노를 배울 수 있는 곳으로 데리고 갔기 때문이다.

그런 다음 그는 드럼뿐만 아니라 색소폰까지 거의 모든 악기를 배웠습니다.

음악을 하면서 돈을 벌다보니 공부가 더 힘들어져서 다시 시험을 보고 대학에 가야 했어요.

나는 결국 명지대학교에서 경영학을 전공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그녀에게 어울리지 않았다.

당시 그녀는 가수가 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가수들의 인지도가 좋지 않던 시절, 그는 해외로 가서 피아노를 배울 계획을 세웠다.

그런데 어떻게 가수가 됐나요?

1975년 어느 날, 나는 학비를 벌기 위해 호텔 라운지에서 노래와 피아노 연주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그곳에는 빅스타가 손님으로 찾아왔다.

 

바로 나훈아

씨인데요.

그녀는 센스 있게 귀한 스타에 대한 예우 차원으로 나훈아 씨의 노래를 부릅니다.

‘물레방아 도는데’ 피아노를 치는 여자가 신기하게도 트로트를 부르는데 그것도 기가 막히게 잘 부르는 거죠.

사람을 홀리는 음성으로 나훈아 씨가 깜짝 놀라 듣더니 잠시 뒤에 나갑니다.

그러다가 나중에 다시 돌아왔는데, 음반 기획사 사장 둘을 데리고 왔어요.

그리고 그녀를 강력 추천합니다.

“이런 사람이 가수를 안 하면 누가 가수하냐”라고 하면서 그렇게 계약까지 다 하게 됩니다.

 

그리고

나훈아는 심수봉을 위해 노래도 썼다.

이번 곡은 ‘여자라서’ 입니다.

그런데 조금 이상한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나훈아 스캔들이 터지자 그와 연락이 두절됐다.

나훈아가 떠나자 음반 기획사 CEO들의 태도가 바뀌면서 모든 것이 무너졌다.

당시 앨범 한 장을 내는 데는 집 한 채를 다 쓸 만큼 비용이 많이 들었기 때문에 앨범을 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심수봉 씨는 조금 긴장한 것 같습니다.

처음에는 가수를 꿈꿨던 게 아니었는데, 계기가 됐는데, 결국 좌절감을 느꼈어요.

그녀는 자신의 앨범을 녹음하고 싶었습니다.

전국 각지에서 대학음악제가 열리던 시절이었다.

회사에 들어오면 앨범을 내준다고 해서 1978년 제2회 학생가요제에 참가하게 됐어요.

당시 참여했던 사람들은 정말 재능이 많았어요.

노사연, 배철수, 임백천 등이 출연했다. 그곳에서 심수봉이 트로트를 불렀다.

대학가요제 최초의 트로트라고 하네요.

10대 학생이 피아노를 치면 멋있는 팝음악을 하리라 기대했는데, 트로트 음악이 나오자 모두가 놀랐다.

 

이때 불렀던

노래가 ‘그때 그 사람’입니다.

그러나 본선 진출은 했지만 수상을 못하고 떨어졌죠.

당시는 록과 포크가 유행했던 때이고, 대학 가요제라 대학생들의 ‘순수함과 패기’ 이런 것들을 원했는데, 심수봉 씨가 부른 트로트와는 좀 안 맞았던 거죠.

노래 너무 자신 있던 심수봉 씨는 오히려 대상을 받을 거라고 생각했었다고 해요.

수상을 못해 자존심을 구기며 상심한 심수봉 씨에게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수상자를 제치고 가장 먼저 음판 녹음을 한 거죠.

당시 지구레코드 사장이 심수봉 씨의 노래를 듣고 “내가 음반을 낸다면 바로 쟤다”라고 말했다고 해요.

노래는 나오자마자 미친 듯이 빵 뜹니다.

 

그러나 그 노래는

신지 말았어야 할 분홍신처럼 그녀를 너무너무 무서운 운명으로 끌고 갑니다.

대학 가요제에 참가한 다음 해인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전 대통령도 그 노래를 좋아해서 궁정동 안가에서 열린 술자리에 그녀를 불렀어요.

그리고 거기서 어마어마한 사건이 터진 거죠.

무려 4년간 방송 금지였는데요.

그녀는 역사의 피해자였지만, 당시 신군부의 정치 때문에 방송에 나올 수가 없었어요.

방송은 금지되었지만 일은 할 수 있게 해주어서 밤무대를 하며 생계를 유지했고, 영화 ‘아낌없이 바쳤는데’의 주연으로 출연해 흥행까지 되었습니다.

 

이 기간에 나온 노래

1980년 ‘당신은 누구시길래’, 1983년 ‘올가을엔 사랑할 거야’도 큰 사랑을 받았는데요.

1984년이 돼서야 방송 활동 금지가 풀리면서 다시 재개할 수가 있었습니다.

이 당시 나온 노래가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 ‘무궁화’, ‘사랑밖엔 난 몰라’입니다.

그녀는 트롯계에서 보기 드문 여성 싱어송 라이터로 그녀의 히트곡 대부분을 직접 작사, 작곡, 노래까지 하고 있어요.

뿐만 아니라 목소리가 국보급으로 깊은 한을 담고 있으면서도 너무나 애절하면서 아름답습니다.

이런 천부적인 재능을 사랑한 대중의 힘으로 그녀는 다시 일어날 수 있었던 거죠.

그러나 개인사의 비극은 10월 26일 사건이 일어났던 그날 밤부터 시작되어, 그칠 줄 모르게 됩니다.

이후의 심수봉의 이야기는 다음에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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