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세 가수 남진 결국… 끝내 방송에 더 이상 나올 수 없는 그의 현재 상황.. 수많은 위기에 전재산마저 잃은 그의 사연을 알아보세요..

오빠 부대의 원조, 가수 남진 씨.

남진은 자타공인

1970년대 한국 가요계의 아이콘으로 라이벌 나훈아와 한 시대를 공유한 슈퍼스타였다.

데뷔한 지 57년이 흘렀고, 벌써 70세가 넘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활발하게 활동 중이다.

저는 아주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별 어려움 없이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하겠지만 반드시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그동안 보여주지 않았던 우여곡절과 어린 나이에도 활발하게 활동할 수 있었던 비결에 대해 알아보자.

남진은 1945년 항구 도시 목포에서 해방의 자녀로 태어났다.

그는 목포에서 가장 부유한 집안의 아들이었습니다.

1950년대, 전쟁 직후에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자동차를 소유했습니다.

 

경찰관들이

자전거를 타고 순찰을 돌던 시절이었는데, 학창 시절 남진은 일본산 오토바이를 타고 학교에 다녔다고 해요.

아버지가 ‘목포일보’를 만든 사장이었고, 국회의원을 지낸 김문옥 씨였는데, 정미소 사업을 크게 했다고 합니다.

어머니는 교육자 출신으로 두 분 모두 남진이 공부를 열심히 하기 바라며 가정교사까지 붙여주었지만, 정작 본인은 공부에 영 흥미를 느끼지 못했습니다.

대신 예체능에 소질을 보였는데, 특히 음악은 하루 종일 들어도 질리지 않았다고 해요.

학생 때부터 팝송을 즐겨 불렀던 남진은 그 무렵 레스토랑에서 팝송을 불러 밴드 마스터에게 가수 제의를 받게 됩니다.

밴드 마스터는 당시 최고 인기 가수 남일해의 곡을 만들었던 작곡가 한동훈 씨를 소개해 주었어요.

 

 

 

한동훈 씨는

자신의 음악 학원에 등록하고 연습생 생활을 하라고 합니다.

영화배우의 길을 꿈꿨던 그였지만, 순전히 학원에 있던 여학생이 이뻐서 등록을 하고 연습생 겸 연애를 시작했다고 해요.

1965년 드디어 첫 음반을 레코딩하게 되었죠.

팝송만 듣던 남진 씨는 가요를 몰랐는데, 당시 미 8군에서 이름을 날리던 가수 최희준 씨를 보고 그의 음악에 큰 감명을 받고 그를 따라 합니다.

한동훈 씨가 작곡해준 데뷔곡은 부잣집 도련님 같은 그의 인상에 어울리게 ‘서울 플레이보이’라는 팝 계열의 노래였습니다.

그 후 다시 작곡가 한동훈 씨의 제안으로 두 번째 음반을 발표했는데 히트하려는 순간, 노래의 제목이 퇴폐적이라는 이유로 금지곡 처분을 받게 됩니다.

금지곡이 된 타이틀 곡명은 ‘연애 0번지’인데, 0번지라는 말이 이상하다고 금지곡이 되었다고 합니다.

 

두 번째 음반도

실패하자 그는 다시 고향으로 내려가서 술로 세월을 보냈습니다.

당시 4년간 병상 생활을 하느라 아들이 가수 데뷔한 것을 모르던 아버지는 어느 날 티비에 나오는 남진 씨를 보고 “당장 내려와서 공장 문지기를 하라”라고 불호령을 했습니다.

그러다 몇 달 후 돌아가신 터라 죄책감에 더욱 괴로웠습니다.

술로 나날을 보내는 그를 보다 못해 그의 어머니가 두 번째 앨범에 담긴 다른 곡인 ‘울려고 내가 왔나’라는 트로트 곡을 밀면서, 이 곡으로 다시 도전할 것을 권유했습니다.

원래 이 곡은 남진 씨가 트로트 부르기가 창피하다는 이유로 거절했던 곡이었어요.

 

 

이 노래는 큰 인기를 끌며 남진의 이름을 대중에게 널리 알렸다.

이듬해인 1966년에는 박춘석이 작곡한 ‘가슴 아프게’가 가장 인기를 끌었고, 같은 해 MBC 신인상을 수상했다.

이후 남진은 영화배우로 활동하며 음악계와 영화계를 넘나들며 큰 스타가 됐다.

이어진 불멸의 로커빌리 히트곡인 ‘내 마음은 부서져야 해’는 그를 트로트 가수로 격하시키는 동시에 그를 가요계의 독보적인 인물로 자리매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당시 팬들은 ‘에비스 프레슬리’를 흉내내는 그의 잘생긴 얼굴과 노래 스타일, 무대 매너에 열광하기 시작했다.

1968년 인기가 최고조에 달했던 그는 해병대에 입대했고 이후 베트남으로 파병됐다.

무릎팩도사 남진씨에 따르면 원래 1년 복무 예정이었으나 베트남에서 전우들이 죽는 것을 집에 가서 지켜보는 것이 한국 소년으로서 부적절하다고 여단장이 2년을 요구했다고 한다.

수많은 동료들의 죽음을 경험하면서 그는 ‘사람은 죽으면 다 똑같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그는 베트남에서 여러 차례 죽음의 위험에 처했다고 한다.

 

이 3년간의

생활이 부잣집 아들로 큰 어려움 없이 살다가 근성을 가지게 된 계기가 되었다고 합니다.

1971년 군 제대 후 국내에 돌아오니 자신의 음악 파트너 박춘석 씨가 라이벌 나훈아 씨와 손을 잡고 ‘물레방아 도는데’ 등의 히트곡을 쏟아내는 중이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작곡가 남국인 씨를 찾아 곡을 받고 다시 정상에 반열에 서게 되는데, 그 노래가 바로 남진 씨의 최고 히트곡 중 하나인 ‘님과 함께’입니다.

1972년 나훈아 씨가 공격당한 너무나 큰 사건이 터졌습니다.

이때 남진 씨가 사건의 배후 인물로 낙인이 찍혔는데, 그런 루머가 당시엔 급속도로 퍼졌어요.

그러나 나중에 나훈아 씨마저 사실이 아니라는 식으로 발언을 하면서 억울한 누명을 벗긴 했지만 꽤 오랫동안 그를 괴롭혔죠.

1976년에는 윤복희 씨와 결혼해서 큰 화제가 되었는데 얼마 가지 않아 이혼합니다.

윤복희 씨가 무릎팍도사에 나와 고백한 게 사실이라면 남진 씨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대인배죠.

당시 윤복희 씨는 유모 씨와 이미 결혼한 상태였는데, 전 남편이 두 사람의 사이를 의심하자 그녀를 짝사랑하던 남진 씨의 청혼을 받아들여 버린 것입니다.

심지어는 당시 전 남편과 이혼도 하지 않은 상태였는데 결혼을 감행합니다.

 

나중에 윤복희 씨는

사실대로 털어놓고, 남진 씨와 6개월 만에 끝냅니다.

이런 사실을 제대로 모르고 있던 대중들은 남진 씨가 윤복희 씨를 구타하고 집에서 쫓아냈다는 등 그에게 비난을 퍼부었습니다.

남진 씨는 윤복희 씨에게 쏟아질 화살을 자기가 맞으면서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 해요.

그동안 그의 데뷔곡처럼 남진 씨는 ‘플레이 보이’였는데 윤복희 씨에게 호되게 당한 거죠.

그 후 미국 공연 가서 만난 재미교포 강정현 씨와 1980년 사실상 첫 번째 결혼을 하며 슬하의 1남 3녀를 낳게 됩니다.

그러나 결혼 후 1980년대에 등장한 신군부의 조직적인 탄압을 받으며 노래를 그만두려고도 했습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과

친분이 있는 집안 자손이라는 이유로 아예 방송 출연을 금지시킨 것인데요.

그렇게 10여 년간의 공백기가 생깁니다.

전남의 정치인 집안 출신이지만, 본인은 정치색이 그리 강하지 않습니다.

단지 친분만 있다면 여야 정치인 홍보에 다 참석하는 편이라고 해요.

대신 대한 가수협회 초대 협회장을 맡은 적이 있는데 여기에서 정치를 했죠.

가수들의 저작권 등 권익을 위해서 앞장섰다고 해요.

1990년대에 다시 복귀해 지금까지 왕성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공백기 전 최전성기에는 트로트와 로커빌리 로큰롤을 오고 가면서 다양한 장르를 소화했는데, 공백기 후에는 트로트 위주로 음악 작업을 하고 있어요.

1982년 ‘빈 잔’을 끝으로 10여 년간 공백기를 가진 후 1993년 ‘내 영혼의 히로인’, 1999년 ‘둥지’, 2008년 ‘나야 나’, 2009년 장윤정 씨와 함께한 ‘당신이 좋아’, 2014년 ‘상사화’, 2014년 ‘파트너’, 2018년 ‘남자다잉’ 등을 히트시킵니다.

 

그는 나이 들어서도

그들은 결코 도전을 게을리하지 않고 끊임없이 신곡을 발표했다.

그동안 어려움도 많았습니다.

남진 역시 구식 가수 취급을 받았다.

처음에는 나훈아보다 나았지만, 음악성 면에서는 나훈아보다 한 단계 위라는 의견이 퍼지던 때가 왔다.

그와 나훈아는 음악도, 스타일도 전혀 달랐다.

나훈아가 전통 트로트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면, 남진은 팝과 로큰롤을 가미한 모던한 트로트다.

게다가 나훈아는 신비주의자이고, 남진은 대중예술가이기 때문에 항상 관객들과 가까이 있어야 한다. 여기에는 선도 악도 없습니다.

그는 어떻게 다시 일어날 수 있었습니까?

2008년에는 ‘나야, 나야’라는 곡이 나왔지만, 2020년에는 ‘미스터 션샤인’에서 김수찬이 부른 곡이다. 트로트”라고 말하며 상황이 역전됐다.

새로운 대표곡 중 하나로 선정되었습니다.

 

이렇게 후배 가수들이

남진 씨의 곡을 불러서 역주행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습니다.

남진 씨가 부르는 트로트는 뽕기가 적고, 중후하면서도 세련된 느낌이 들어 후배 가수들이 선호하는 측면도 있죠.

또 하나의 이유는 그의 인성이었습니다.

그의 매력은 다름 아닌 유쾌함.

후배 가수들을 만나면 상대가 인기가 있든 없든 ‘어이 동상 잘 지내는가’라며 먼저 손을 내민다고 해요.

여든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주변에 따르는 사람들이 많고, 무한 칭송을 받는 이유죠.

많은 트로 프로그램에서 심사위원으로 자주 등장하는데 참가자들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으며, 점수도 상당히 후하게 주는 등 심사위원들 중 독보적으로 관대한 모습을 종종 보여줍니다.

최고참인 만큼 가장 깐깐할 거라는 편견을 깨는 인물, 마지막으로 그의 믿기 어려운 젊음이었습니다.

 

그는 흰머리가 하나도

안 보이는데 젊음의 비결이 무엇일까요.

놀랍게도 그는 아직도 염색을 하지 않는다고 해요.

일단 유전자가 좋은 것 같아요.

건강 관리는 어떻게 하는지 궁금하시죠.

아침에 일어나서 1시간 반에서 2시간 정도 걷기를 한다고 해요.

그리고 저녁에 또 운동을 하고, 나이 들어서는 수영이 해본 운동 중에서 제일 좋은 것 같다고 합니다.

때때로 골프도 즐긴다고 해요.

그리고 노래를 많이 부르는 것이 젊음의 비결인 것 같다고도 말했습니다.

호흡 운동이 저절로 된다고 해요.

 

노래를 많이

부르면 얼굴 근육을 많이 쓰기 때문에 저절로 리프팅이 된다는 것 아시죠.

가수 데뷔 55주년을 기념해서 수익금을 전액 기부하기도 하는 등 보이지 않게 좋은 일을 많이 하고 있다고 합니다.

멋지게 사는 어르신으로서 앞으로도 건강하고 행복하게 활동해 주시기를 응원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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