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를 타고난 가수 조용필…” 결국 이제서야 모든게 들통난 상황.. 개그우먼 이성미의 갑작스러운 폭로까지..

연예인들이 웃음을 목적으로 과장되게 성대모사를 해서 은근히 피해를 많이 본 사람이 가요계의 제왕 조용필 씨라고 해요.

전문가에 따르면

그의 가창력은 최정상이라고 합니다.

이런 가창력은 순전히 피를 토하는 듯한 노력으로 완성되었어요.

그는 가수로서 어마어마하게 성공했는데요.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성미 씨가 실수로 폭로한 말에서 그의 진짜 모습을 알 수 있었습니다.

 

조용필 씨는

1950년 경기도 화성에서 태어났습니다.

염전업을 하며 화성 최고의 부자였던 집안의 7남매 중 여섯 번째였어요.

그는 형들의 영향으로 일찍이 음악을 좋아했고, 기타를 즐겨 쳤다고 해요.

 

 

사춘기 때는 ‘비틀즈’ 등에 심취하며 더욱 기타에 빠져들었어요.

그런데 과거에는 음악 하는 것을 ‘딴따라’라고 하며 천시하던 때라 아버지가 극심하게 반대를 했어요.

급기야 아버지가 조용필 씨가 치는 기타를 때려 부숴버리자, 아버지에게 겁을 주기 위해 어린 마음에 먹어서는 안 되는 것을 먹어버립니다.

그런데 실제로 죽을 뻔했다고 해요.

무려 일주일간 혼수 상태에 빠졌다가 깨어났습니다.

그래도 아버지는 음악 하는 것을 허락해 주지 않았어요.

그러자 그는 고등학생 때 음악을 하기 위해 가출해 버리고 맙니다.

유복한 가정 환경을 버리고, 거지 저리 가라 하는 생활을 하면서도 음악을 포기하지 않았어요.

이리저리 밤무대를 떠돌면서도 열심히 기타를 연마했습니다.

입소문이 나자 1968년 미 8군 무대에서 록 밴드의 기타리스트로 음악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됩니다.

 

그러던 중

보컬을 맡았던 멤버가 군 입대를 하는 바람에 노래를 부르게 되었어요.

건반을 치고 싶었으나, 돈이 없어 도화지를 붙인 다음 건반을 그려가지고 코드를 짚어가며 소리가 없는 음악 공부를 했습니다.

그는 정규 음악 교육을 받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어요.

또한 악보조차 구하기 어려운 시대라 라디오에서 나오는 음악을 들으며 악보를 손으로 일일이 따면서 음악 공부를 했습니다.

이런 공부가 나중에 히트곡 대부분을 직접 만들게 해주죠.

 

 

1971년에는 3인조 록 그룹 ‘김트리오’의 멤버로 활동하기 시작했어요.

이미 이때부터 가창력이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았는데요.

그러나 가수의 길은 쉽지 않았습니다.

1972년 처음으로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불렀으나 별 반응이 없었어요.

그러다가 1975년 새 음반을 취입하는데, 그 음반에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다시 넣자는 제안이 들어왔으나, 그는 거절했습니다.

그러자 그 당시 돈으로 50만 원을 주면서 할 수 없이 넣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1976년 조총련계 재일교포의 모국 방문이 허용되면서, 시대적인 분위기와 맞아떨어진 그 노래는 조용필 씨를 삽시간에 인기 정상으로 올려놓았어요.

록 밴드로 출발했는데 트로트로 이름을 알린 셈입니다.

그런데 마른하늘에 날벼락, 인기 가수가 되자마자 1977년에 금지된 행동을 하게 되면서 1979년까지 활동이 금지되고 말았어요.

당시 금지가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아 절망에 빠져 음악을 그만두려고 했으나, 도저히 음악을 포기할 수가 없었습니다.

사실 사건에 연루된 가수들이 이때 회복을 못하고 사라진 경우가 많았죠.

다행히 조용필 씨는 이 시기를 슬기롭게 극복하지만, 이때 받은 충격은 그의 인생 전반에 큰 영향을 끼쳐 결국 사람을 잃게 만듭니다.

그렇다면 조용필 씨는 이 고난을 어떻게 헤쳐나갈 수 있었을까요.

 

그는 이 시련의

나는 이 시간을 나 자신을 갈고닦는 훈련으로 삼았다.

그러던 중 우연히 TV에서 본 판소리의 매력에 반해 창법을 완전히 바꾸게 됐다.

소금물을 뱉어 목이 아팠고, 판소리 연습으로 창법을 바꿨다.

그는 원래 부드러운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지만, 이 기간 동안 그는 전성기의 목소리와 노래 스타일을 발전시켰습니다.

그러는 동안 나는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몰래 야경에 나갈 수밖에 없었다.

너무 잔혹해서 무대에 오르는 것도 금지되고 출국도 금지됐다.

그러다가 해제됐고, 해제 직후 발표된 곡은 조용필이 1980년 작곡한 ‘창밖의 여자’다.

이번 앨범은 국내 최초로 100만 장의 판매고를 기록하며 10년의 슬프고 쓸쓸한 망각을 끝내고 정상 궤도에 올랐다.

 

 

여기에 실린 그가 작곡한 ‘단발머리’ 또한 그 인기가 대단했죠.

1집부터 이미 대한민국 최고의 대스타가 되었고, 꾸준히 음반을 발매하는데요.

이 시기 언제쯤 조용필 씨의 아버지를 인터뷰한 적이 있는데 이런 얘기를 했다고 해요.

“내 아들이 누가 봐도 대한민국에서 지금 돈을 제일 많이 버는데, 아직까지 자기 집 하나 없이 전세 살고 있다. 아무래도 매니저가 됐든 누가 됐든 중간에서 해 먹는 것 같다. 기자가 한번 알아봐 주라”라고 했다고 해요.

이에 대해 해당 기자가 말하기를 “아버님 누가 중간에서 해 먹는 게 아니라 아드님은 100을 벌었다 치면 90 이상을 음향 장비 악기 등에 전부 투자하고, 해외에서도 구하기 어려운 1등급 장비로 모두 맞추려 하니까 돈이 없는 겁니다”라고 답했다고 해요.

거기다가 그 엄청난 음향 장비를 운송하려고 덤프트럭을 두 대씩 사서 끌고 다녔다고 합니다.

최정상의 자리에서 오히려 더 나아가기 위해 음악에 그 모든 걸 재투자했다는 것인데요.

또한 조용필 씨로 인해 ‘오빠 부대’가 만들어지며 우리나라 최초로 조직적인 팬 문화가 형성되었습니다.

 

내놓는 음반마다

성공을 거듭하며 70년대에 ‘남진 씨’, ‘나훈아 씨’의 뒤를 이어 80년대는 조용필 씨의 시대가 되었어요.

지금까지 무려 190곡이 넘는 히트곡을 자랑하고 있죠.

그렇게 잘나가고 있었는데 그는 사람들이 기함할 결정을 내립니다.

80년대에 나왔다 하면 1등, 연말 대상이었는데, 1987년 공식적으로 연말 시상식 수상을 거부하는 결단을 내린 것인데요.

급기야 92년부터는 방송 활동 중단을 선언하며 tv 출연을 극도로 자제합니다.

그 후 콘서트로 본인의 주 무대를 옮겼어요.

그러나 당시 우리나라 콘서트의 무대 환경은 열악하기 그지없었습니다.

조명 몇 개 반짝반짝하고 폭죽 터뜨리는 것이 거의 전부였죠.

그걸 개선하기 위해 해외 일류 공연들을 전부 공부하며 분석했고, 무대 총감독까지 직접 하며 모든 열정을 쏟아부었습니다.

모든 좌석에서 골고루 들릴 수 있는 사운드, 어떤 각도에서든 화려한 조명, 그리고 무빙 스테이지 등에 돈을 쏟아부어 무대에 30억을 쓰기까지 했다고 하네요.

 

또한 1979년부터

결성된 ‘위대한 탄생’이라는 조용필 씨의 백업 밴드는 각 분야 최고의 멤버들이며, 최고의 악기와 장비 그리고 대우를 해주어 그의 음악은 노래만 좋은 게 아니라 사운드가 엄청나다고 젊은 층들도 인정하고 있습니다.

또 조금씩 편곡을 하면서 진화를 거듭해 세월이 흘러도 그의 음악은 세련되게 느껴진다고 해요.

그러나 초기 몇 년은 tv에서 안 보이니 사람들의 관심이 적었고, 그때만 해도 가수를 직접 보러 콘서트에 간다는 문화가 대중화되지 않았을 때였어요.

그래서 관객이 좀 적었는데 점점 입소문을 타고 주목을 받으면서, 그 이후로 현재까지 만석 행진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이 당시에 밤무대에 나가서 노래 몇 곡을 부르면 수십억을 준다고 했지만, 한 번도 간 적이 없다고 해요.

이렇게 뮤지션으로서 이룰 수 있는 거의 대부분을 이뤘는데도, 그는 자기 인생은 실패작이라고 말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아버지가 음악을 반대하자 금지된 것을 먹으며 목숨까지 내건 그는 음악을 너무나 지나치게 사랑했습니다.

사건 때 음악을 할 수 없다는 절망감은 그에게 큰 상처와 충격을 주었습니다.

 

두 번 다시

그런 끔찍한 일은 당하고 싶지 않았어요.

과거에는 연예인이 아무리 돈을 많이 벌어도 무시받던 시절이라 연예인 하나 정도는 기사로 언제든지 보내버릴 수 있었죠.

음악이라는 세상에서는 거칠 것이 없었지만, 실제 성격은 소심했던 그는 언론을 굉장히 두려워했습니다.

자기의 목숨과도 같은 음악을 못 하게 만들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많았어요.

그런 두려움이 결국 사랑하는 여자마저 잃게 만들었습니다.

탑스타가 된 그는 1981년 박지숙 씨와의 약혼 사실을 공개했는데요.

약혼 기간 중 배우 이미숙 씨와 염문설이 납니다.

그는 결혼을 미루다가 갑자기 1984년 극비리에 절에서 기자 7명만 초대해서 깜짝 결혼식을 올렸어요.

이미숙 씨와의 스캔들 기사를 터뜨리려 한다는 제보를 받고 그 기사를 막으려고 급하게 결혼했다는 말이 있었어요.

훗날 조용필 씨는 그 당시에 대해 이런 말을 합니다.

“그때는 매스컴이 너무나 무서웠다”

결국 4년 만에 성격 차이라고 하며 합의 이혼했죠.

이혼 당시 조용필 씨는 자신의 재산 대부분을 주었으며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비겁했다. 인기를 위해 사랑을 버렸고, 음악을 위해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남겼다. ”

이렇게 그의 젊은 시절은 음악 때문에 두 여자에게 상처를 주고 말았습니다.

 

그는 세상도

잘 모르고 돈 개념도 없었지만, 오로지 음악만큼은 욕심이 너무 많은 사람이었어요.

1992년 ‘밤으로 가는 쇼’ 방송에 조용필 씨는 주인공으로 출연했고, 개그우먼 이성미 씨도 함께 나왔어요.

그때 그는 아직 재혼을 하지 않았죠.

그녀는 조용필 씨가 외로움 때문에 술과 담배를 많이 하는 것 같다고 하며 자신도 모르게 실수로 조용필 씨의 진짜 속마음을 폭로하고 말았습니다.

말해도 되냐고 주저주저하다가 이렇게 말했어요.

“조용필 씨가 술을 마시면 ‘자신의 인생은 실패다’, ‘너는 애라도 있지 않냐'”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그 당시 조용필 씨는 자기에게 또 한 번 결혼할 기회가 생긴다면 아이를 가지고 싶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심지어 우연히 쇼핑하다가 아기 신발을 보고 너무 예뻐서 사다가 tv 장식장에 올려놓고 들여다본다는 얘기까지 했어요.

“너무너무 이쁜 그 애기 신발이 있더라고요. 그게 너무 이뻐서 사다가 집에 이렇게 놨는데 가끔씩 그걸 봅니다”

그런데 그렇게 아이를 원했으면서 그는 1994년 45살에 자기보다 한 살 더 많은 안진현 씨와 결혼합니다.

더구나 그녀는 전 남편에게 아이까지 보낸 이혼녀였죠.

이게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안진현 씨는 그가 음악 작업을 할 경우 그의 근처에 접근조차 하지 않으며, 그가 마음껏 작업에 몰두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고 해요.

그녀 또한 음악을 공부한 적이 있고, 뮤지컬 활동도 한 적이 있다고 해요.

그래서 음악 하는 사람들의 스타일을 이해해 준 것이고, 특히 음악에 완전히 미쳐 있는 조용필 씨에게 더더욱 좋은 배우자였던 것이죠.

 

이런 그녀가

지병으로 심장병이 있기는 했지만, 결혼 10여 년 만에 갑자기 황망하게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조용필 씨는 식음을 전폐하고 통곡하고 통곡하다 쓰러지고 말았어요.

자식에 대한 간절한 바람마저 포기하고 선택한 사랑이었는데 그 심정이 어땠을까요.

2003년 안진현 씨가 세상을 떠나자 무려 10년간 신곡을 내지 않았어요.

그리고 마침내 내놓은 2013년 19집 앨범에서 내놓은 노래가 ‘바운스’였죠.

바운스는 나오자마자 젊은 아이돌 가수를 제치고 1등을 했고, 당시 초등학생들도 따라 불렀을 정도로 인기가 있었어요.

 

그때 그의

나이 60대 이게 가능했던 이유는 조용필 씨는 지금도 현재 나오는 국내 아이돌 음악뿐만 아니라 전 세계 아티스트들의 음악을 항상 듣고 분석하기 때문입니다.

상처를 딛고 다시 음악의 세계에서 끊임없이 변화하고 발전하는 음악의 장인이 되어 나타난 것입니다.

최근 근황으로는 또 정말 오랜만인 9년 만에 신곡을 선보였죠.

‘찰나’와 ‘세렌게티처럼’ 두 곡 모두 김이나 작사가와 함께 작업했어요.

70대가 되어서도 음악의 트렌디함을 잃지 않고 젊고 단단한 나이 들지 않는 목소리에 다들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올해 말에 20집 정규 앨범을 발매한다고 합니다.

그가 외로움을 음악으로 승화시킨다고 생각하니 왠지 짠하네요.

지금이라도 좋은 사람 만나면 안 될까요.

Leave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