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을 고생만 하면서 살아오더니 결국.. ” 배우 전원주 갑작스러운 청천벽력 소식..” 불과 하루밤 사이에 그녀에게 찾아온 시련..

전원주는 1939년에 개성시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릴 적

전원주는 집에서 인삼을 키우며 자랐기 때문에 어머니는 종종 인삼뿌리 가지치기를 시키셨습니다.

인삼뿌리를 잘 다듬으면 일당을 받을 수 있었다. 많은 양을 잘 다듬으면 더 많이 받고, 대충 다듬으면 적은 월급을 받습니다. 전전주는 어릴 때부터 열심히 일하면 좋은 보상을 받는다는 것을 배웠다. 그들은 알아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6·25전쟁이 터지자 보따리만 들고 피난해야 했던 전전호 가족은 맨땅에 발이 묶인 것과 같은 어려움을 겪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도넛과 떡을 만들어 노점상에 팔았고, 전전주에게도 매일 나무 쟁반에 도넛을 담아 팔도록 했다.

집에 돌아가기 전 재산을 모두 팔아야 했고, 팔고 나면 어머니가 용돈을 줬다고 한다.

비단 가게를 차릴 자금이 있었던 어머니는 가게에 갈 때마다 떡을 만들어 가게에 놓아 손님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맛있는 떡을 먹은 손님들은 빈손으로 떠나지 않고 비단을 가지고 갔다고 합니다.

 

 

그렇게

어머니는 열심히 일하셔서 결국 집과 땅을 사서 형제들과 나눌 만큼 충분한 돈을 벌었습니다.

따라서 전주의 어머니는 치마만 입고 사업 능력이 뛰어난 여성이었다.

원래 개성의 북한 상인들은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일하는 것으로 유명했습니다.

또 마당이 넓은 집에 사시던 어머니는 큰 가마솥에 밥과 국을 끓여 배고픈 사람들에게 나눠주었다. 이후 전전주가 배우로서 역할을 옮겨갈 때 어머니는 밥을 들고 영화 촬영장에 가서 먹여주곤 했다. 훌륭해.

생명을 바치면서도 천성적으로 어머니를 공경하는 전전주는 어머니의 권유로 숙명여대 국어국문학부에 입학한다.

여자아이들이 초등학교에 보내지도 않던 시절, 우리 어머니는 굉장히 개방적인 분이셨어요. 지금도 약혼자 중 선생님이 1위였다고 한다.

어릴 때부터 개성이 없었던 전전주의 경우 어머니는 좋은 직장을 마련해주기 위해 교직을 선택했다.

 

 

교사가 되고

전원주는 어느 중학교에 담임을 맡았지만, 작은 키 때문에 칠판에 글씨 쓰기도 힘들었고, 가르치는 학생들이 심지어 키가 더 커 혼낼 때도 얼굴을 들고 혼내야 했다 보니, 교사에 대해 점점 회의감이 들게 됩니다.

자신과 적성에 맞지 않는다 생각한 전원주는 급기야 학교를 그만두고 마는데요.

전원주는 외모는 비록 그저 그랬으나 목소리가 예뻐 성우로 데뷔를 하게 되었고, tv가 없던 시절 성우로 들어가 해설과 연기를 하며 전성기를 보내게 됩니다.

당시 잘나가는 성우로 영화의 주인공 여배우 목소리도 많이 맡을 정도로 전원주는 맹활약했지만, 그런 딸이 연예인을 한다고 했을 때 어머니는 ‘팔자 센 여자들이나 연예인을 한다’라며 반대하셨고, 전신 거울을 보여주며 ‘네 낯짝을 봐라. 네가 연예인 얼굴이냐. 자기 자신을 알아야지. 그래서 내가 선생을 만든 건데 팔자가 어떻게 되려고 이러느냐’라며 심하게 반대를 하셨다고 합니다.

 

게다가 tv

방송이 개국하며 라디오에서 브라운관으로 활동 무대를 옮겼지만, 전원주가 얼굴이 따라주지 않아 밑바닥 역할만 맡게 되자 어머니는 동네 사람들 보기 매우 창피해하시게 되는데요.

늘 앞치마를 두르거나 아기를 들쳐 업고, 가정부, 무속인, 사극의 주모 역할만 맡게 되니, 어머니는 전원주가 늘 일등이길 바랐지만 단역을 전전하는 모습에 속이 많이 타게 됩니다.

이후로도 전원주의 무명 생활은 3년도, 5년도 아닌 무려 30년이나 지속되는데요.

당시 여배우들 사이에도 시샘이 많아 서로 무언의 신경전을 많이 했는데, 역할이 늘 하찮았던 전원주는 배우들로부터도 늘 무시당하기 일쑤였고, 너무 서러워 화장실에서 울기도 많이 했다고 합니다.

그럴 때마다 그녀에겐 동료 여운계가 많은 위로를 해주었다고 하는데요.

그렇게 둘은 여행도 다니며 절친한 친구가 되었고, 지금도 전원주의 침대 옆엔 여운계 사진이 있어 힘들 때 혼자 사진을 보고 이야기를 한다고 합니다.

 

그런 전원주에게

어머니는 좋은 자리에 시집을 보내려고, 여기저기 알아본 끝에 그 당시 의사 집안에 잘생긴 훈남에게 시집을 보내게 되는데요.

하지만 결혼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만 불행이 닥치게 됩니다.

 

 

어느 날 남편이 피를 토해 폐결핵 진단을 받았습니다.

그리하여 결혼한 지 3년도 채 되지 않아 전전주는 남편을 하늘나라로 보내고 과부가 되었다.

자책하는 딸에게 어머니는 “엄마, 잘못했어요. 평생 책임지지 마세요.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할 수 있고, 아이를 키우고 살 수 있습니다. 엄마가 다 도와줄게.”

그러나 어린 나이에 아들을 혼자 키우는 것이 두려웠던 전동주는 마침내 친구의 돌 생일날 경상도 남자를 만나 사랑에 빠지고 어머니에게 소개를 하게 된다. 그 사람이 재혼을 하기 위해서요.

그러나 처음 인사할 때 남자는 제비처럼 보였고 흰 신발에 빨간 넥타이, 머리 기름을 매고 있었기 때문에 어머니는 남자를 보자마자 떠나가며 전전주에게 “같이 들어가도 돼. 아니면 이 남자와 데이트를 하든가.

전원주는 이 남자를 너무나 사랑해서 마침내 그 남자와 데이트를 하게 된다.

이 사람도 전전주처럼 아들을 낳았다. 전전주 부부는 겨울에 난방을 하지 못해 5만원짜리 새 단칸방에서 두 아들을 키우고, 물이 새는 집에 연탄 살 돈이 없어 비가 오는 날에는 길거리까지 운전해야 했다. 생계를 위해 연탄을 모으십시오.

어느 날 집에 돌아온 엄마는 찢어진 스웨터를 입고 추운 겨울 집에 서 있는 딸을 보고 바닥에 쓰러져 큰 소리로 울었습니다.

더욱이 전전주와 새 남편은 부부로서 행복했지만 큰 슬픔을 겪었고 무려 6번의 유산을 겪으며 더 이상 아이를 갖지 못했다.

이후 그녀는 당시를 회상하며 ‘자궁을 너무 많이 긁어 혼수상태에서 깨어나지 못했다’고 말했다. 내가 깨어났을 때 어머니는 나를 위해 정수된 물을 부어주시고 기도하고 계셨습니다. 사람들은 이제 그것을 이해하고 싶어하지 않았습니다. 나도 정말 부끄럽다.” 첨단 시설이 부족한 시대에 현명하지 못한 절차로 인해 생명이 위협받았던 시절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그녀는 친정

엄마에게 피임도 못 한다고 많이 혼났는데, 유산 과정에서 병원에서 약도 먹고 쓰러지고 정말 너무 힘들었지만 스스로 몸을 망가뜨리면서까지 그녀가 지키고 싶었던 건 ‘안정된 가정’ 하나였던 것인데요.

“전 남편 아들에, 현 남편 아들이 있는데 새아기까지 생기면 안 되겠더라. 그런 가정은 더 불안하다”라며 결국 철칙을 지켰지만, 여기서 또 하나의 문제가 생기게 됩니다.

전원주의 아들이 초등학교 1학년 때 학교에서 “넌 왜 아버지와 성이 다르니?”라는 질문을 받았다고 털어놓자, 전원주는 꿈에도 생각 못 한 아들의 말에 큰 충격을 받게 됩니다.

전원주는 아들의 그 내면을 몰랐다며 “재혼한 남편도 성을 맞추자고 했지만, 아들의 조상과 핏줄을 지켜주려고 했던 일이 되레 큰 상처를 남긴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라고 말했는데요.

이후에도 전원주는 너무나 바쁜 연기 활동으로 식구들을 돌아보지 못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아들이 죽고 싶기까지 했었다는 사실을 털어놓자 전원주는 기가 막히며 너무나 큰 충격에 휩싸이게 됩니다.

 

게다가

그녀는 이후 입 큰 여자가 너무 많이 웃는다고 괴롭고, 혐오감을 준다는 황당한 이유로 40일간 방송 정지까지 당하게 되는데요.

연기 생활 50년 중 30년 동안 가정부 역할만 한 그녀는 “주인공은 조금만 얘기해도 나보다 돈도 더 많이 받는다. 그러나 나는 밥상 들고 이리 뛰고 저리 뛰어다녔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애까지 업고 뛰어다녔다”라며 정말 너무 서러웠다고 회상하기도 했는데요.

‘나는 안 풀리고 힘든 길만 가나’라는 생각에 보기 싫은 큰 입을 성형수술할까도 고민하던 전원주는 인왕산에 갔다가 결국 ‘답답한 사람은 망설이지 말고 들어와라’라는 푯말이 적힌 점집에까지 들어가게 됩니다.

그런데 점쟁이는 전원주를 보자 “입에 복이 많다. 지금은 힘들어도 노년에는 입에서 확 받쳐줄 것이다. 조금만 기다리면 노년이 좋아진다”라며 입을 그대로 두라고 권하게 되는데요.

전원주는 그 말을 듣고 결국 성형 수술을 포기하게 됩니다.

이후 전원주는 혼자 괴로움에 길을 걷던 중에 시장에서 깔깔깔 웃는 아줌마의 목소리를 듣게 되는데요.

 

전원주는

그 웃음을 듣고 속이 뻥 뚫리는 느낌을 받으며 ‘바로 저거구나’라며 영감을 받게 됩니다.

이후 그녀는 집에서 매일 거울을 보며 웃음을 연습했는데, 아이들이 “엄마 그만 좀 해. 무서워. 무서워 귀신 나올 것 같아”라고 할 정도였고, 남편마저도 “당신 미쳤냐”라며 화를 내는 바람에 전원주는 밖으로 나와 길거리에서 웃음을 연습하게 됩니다.

전원주는 자신을 어필하기 위해 방송국 연출자 앞에서도 캐릭터 맞는 역할이 있으면 섭외해달라는 의미로 우습지도 않으면서 맨날 깔깔깔 웃는 얼굴을 보이고 다녔는데요.

그런데 그녀의 간절한 마음이 통했던 것일까요.

전원주의 그 작전이 드디어 방송국 피디들로부터 환영받기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웃는 사람 얼굴에는 침 못 뱉는다는 말이 있는데, 침을 못 뱉는 정도가 아니라 그때부터 전원주의 인생에는 행운이 펼쳐지기 시작하는데요.

그 웃음으로 ‘대추나무 사랑 걸렸네’의 하성댁으로 캐스팅이 된 전원주는 많은 사랑을 받았던 국민 드라마에 이후 장장 7년 8개월이나 출연하며 드디어 인기 배우의 반열에 오르게 됩니다.

 

그녀는

뜨거운 태양 아래 하루종일 논밭에서 일해도 전혀 힘들지 않을 정도로 행복했다고 합니다.

이 드라마 이후 농촌 사람들은 ‘전주 하성댁’을 알아보기 시작했고, 몇 년 후 그들의 삶을 바꾼 CF는 온 국민을 충격에 빠뜨렸다.

그러다가 전전주는 배우로서 전성기를 맞이하며 많은 돈을 벌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녀는 수십 년 동안 어려운 삶을 살았고 한 푼도 낭비하지 않았습니다.

벌어들인 돈은 모두 모아두었고, 신발이 변색되거나 손상되면 꼭 수선해 주었습니다.

샘플로 화장품을 만들고, 옷을 협찬하거나 할인해서 구매하고, 20년 된 옷도 곰팡이 피고 수선해서 입는 등 ‘패션은 어차피 왔다가 가고, 복고 패션이 대세’라고 생각했다.

 

빨래도

손빨래를 많이 했고, 잘 때는 모든 전기 코드를 뽑았는데 기상 한 시간 전에는 무의식적으로 전기장판 코드를 뽑았습니다.

또 빈그릇운동본부 홍보대사를 맡아 밥이나 음식도 남편하고 먹을 만큼만 준비해 일절 버리는 법이 없었고, 수십 년 전 시집올 때 쓰던 물건도 아직까지 쓰는 게 많을 정도로 웬만한 물건은 버리지도 않고 재활용해서 쓰레기도 별로 나오지 않았는데요.

녹차도 두세 번 우려먹고 남는 것은 얼굴 화장품으로 재활용했고, 연말이나 명절 때 집에 선물이 쌓여도 한 쪽에 보관해 놓고 옛날 것을 닦아서 썼습니다.

또한 콩을 삶은 물을 버리지 않고 마셨고, 밥 지을 때도 넣고, 시간은 돈이라는 생각에 핸드폰도 꼭 필요한 말만 하고 딱 끊었는데요.

그렇게 전원주는 나중에는 은행에 가면 번호표를 뽑을 필요가 없는 호사까지 누리게 되는데, 그 이유는 바로 그녀가 은행 예금액으로 VIP가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게다가 웬만한 거리는 뛰어다니고 하루에 서너 군데 뛰는 바쁜 스케줄에도 매니저 없이 활동했는데, 그녀는 지방 스케줄에도 정확한 시간에 도착할 수 있다며 자가용이 아닌 무궁화호 기차를 애용하고 있습니다.

또한 스케줄을 끝내고 집에 들어가면 드러눕고 싶지만, 아무리 파김치가 돼도 살림살이를 파출부 없이 모두 직접 했는데요.

 

그래서 그런지

연예인 손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투박하지만, 이런 그이기에 손이 고운 처녀들을 보면 일단 며느리 감이 아니라고 생각하기도 한답니다.

전원주는 이렇게 자신에게는 금욕에 가까울 정도로 아끼지만, 주변의 어려운 이웃들에게는 오히려 잘 베푼다고 하는데요.

어릴 적 배고픈 사람들에게 밥을 지어 나누어 주시던 어머니를 보고 자란 전원주는 사랑나눔전국네트워크와 노인의료나눔재단 등 수도 없이 많은 기관에 홍보대사로 임명되며 공익 활동에 참여했고, 연천군과 남해군 김제시, 원주시, 고령군, 광주시, 여주시, 양평군 등 셀 수도 없이 많은 지자체에서 그녀를 홍보대사로 서로 모셔가기 바빴습니다.

“바빠서 아플 틈도 없지만 몸을 움직여야 보약을 안 먹고 건강할 수 있고, 나중에 연예인 실버타운 건립 등 뭔가 뜻있는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활짝 웃으며 말하는 전원주.

하지만 그렇게 건강했던 그녀도 어느 순간 건강에 적신호가 켜지기 시작하는데요.

 

그녀는

작은 키를 커버하기 위해 굽 높은 구두를 자주 신었더니, 어느 날 지하철을 탔는데 허리가 어찌나 아픈지 자신도 모르게 ‘악’ 소리를 지르면서 주저앉게 됩니다.

병원에 갔더니 ‘척추관 협착증’이라는 진단을 받게 된 전원주는 이후 맹장에도 문제가 생기며 맹장 수술까지 받았고, 급기야 몇 년 전 남편을 하늘로 보내고 우울증과 건망증에 시름하게 되며 기억력도 떨어지고 사람도 못 알아보겠다며 ‘치매 증상이 오는 것 같다’고도 털어놨는데요.

전원주의 남편은 간암으로 십 년을 병상에서 투병하며 열여섯 번이나 수술을 한 끝에 그만 얼마 전 하늘로 떠나고 말았는데, 바쁘게 일하러 다니느라 남편의 인종도 보지 못했다는 전원주는 남편에게 “이제 편안한 세상에서 있어라 곧 따라가겠다. 많이 밉기도 했는데, 지금은 미운 감정도 하나도 없다. 당신이 정말 보고 싶다”라며 남편과 하늘에서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기도 했습니다.

사실 전원주는 과거 어머니도 중풍으로 쓰러져 13년이나 병상에 누워 있다가, 딸이 유명해진 것을 보지 못하고 돌아가신 바람에 평생의 큰 한으로 남아 있다고 하는데요.

속 썩였던 어머니께 효도하고 싶었지만, 부모는 자식이 효도할 때를 기다려주지 않더니 이제 평생 고락을 함께한 남편마저도 떠나고, 결국 자식마저도 이런저런 병에 시달리며 죽음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느끼고 있는 전원주.

어느덧 구순을 향해가는 그녀가 부디 오래도록 건강을 잃지 않기를 바라며 너무나 힘든 인생을 살아온 전원주에게 여러분의 따뜻한 응원을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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