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디 1년만 더 살게 해주세요…” 마지막 김영희 유언 내용에 후배 서장훈이 눈물을 참을 수 없던 안타까운 이유..

2월의 첫날,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여자 농구 은메달리스트 김영희가 향년 6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는 비보가 전해졌습니다.

1979년부터

87년까지 한국 화장품 소속 선수로 뛰었던 김영희는 84년 올림픽에서 한국 여자 농구가 은메달을 획득하는 데 핵심적 역할을 했습니다.

키 205cm로 우리나라에서 여자로서는 가장 큰 피로 알려진 김영희는 이름보다는 ‘코끼리 센터’라는 애칭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 해 점보시리즈에서 한국 여자 농구 사상 최고인 60득점을 하면서 개인 타이틀 5관왕에 올랐습니다.

올림픽에서 은메달을 획득해 귀국 후 카퍼레이드도 진행됐습니다.

 

 

올림픽에서 핵심적 역할을 하며 스타로 부상했지만, 농구 코트를 떠난 그녀에게 남겨진 것은 고통스러운 삶 그 자체였습니다.

그러나 여러 합병증으로 오랜 투병을 하던 도중 결국 별세했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떠나는 마지막까지 그녀는 힘든 생활을 토로하였습니다.

올림픽 은메달리스트였음에도 힘든 생활을 이어나가야 했던 김영희의 삶을 되돌아보며 기리는 시간을 가져보겠습니다.

김영희의 몸과 키가 계속 커져가는 것은 바로 ‘거인병’을 앓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계속 크는 것이

‘거인병’인지조차도 몰랐고, 키가 2m를 넘으면 유능한 농구 선수가 될 수 있다는 생각에 사춘기 때 치료받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1986년 아시안게임까지 뛰고 나서 이듬해 11월, 훈련 도중 반신 마비가 와서 앞이 안 보여 실명 위기까지 처했었습니다.

알고 보니 끊이지 않고 샘솟는 성장 호르몬 때문에 뇌종양이 생겨 머리에 있는 큰 혹이 시신경을 누르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한기범 선수는 마르는 증상이었고, 반대로 그녀는 커지는 증상이었습니다.

올림픽을 마치고 왔을 때도 이미 몸이 엄청 커져 있는 상태로 당시 소속팀 감독은 그녀가 살이 쪄서 온 줄 알았을 만큼, 당시에는 병에 대한 정보가 너무 없었습니다.

병원에 입원해 있으면서도 다시 코트에 복귀할 날만을 손꼽아 기다렸습니다.

 

 

하지만 당뇨병과 위궤양 등 합병증이 찾아와 그녀를 괴롭혔습니다.

 

그때부터

병마와 싸우기 시작했고, 삶의 전부라 여겼던 농구 코트도 떠나게 됩니다.

농구를 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 더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습니다.

당시 진통제만 하루에 15알 넘게 먹어야 했고, 뇌 수술을 받고 나서 외출을 하면 등 뒤에서 사람들이 ‘여자야, 남자야. 저것도 인간이냐’하면서 웃었습니다.

그런 소리가 듣기 싫어서 바로 다시 집에 들어가게 됐고, 하루는 중학생 20명이 대문을 두들기며 ‘거인 나와라’라고 소리를 지르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한 ~4년 정도 집 밖으로 나가지 않았고, 불안증, 우울증이 심해져 밤에 영하 15도까지 내려간 날에 난방도 틀지 않고 문을 열어놓고 혼자 우는 날도 많았습니다.

김영희는 “밤이 무서웠어요. 겨울이면 우울증이 더 심해져 삶이 파괴될 정도였어요. 해서는 안 될 시도까지 했어요”라며 벼랑 끝으로 내몰렸던 아픈 기억을 떠올렸습니다.

 

 

뇌의 종양이

다시 커져서 두 번째 수술을 받았지만, 머릿속에 큰 혹 하나는 제거하지 못했고, 설상가상으로 결핵까지 걸려 이가 빠지기 시작했습니다.

결핵은 나았지만 몸 상태가 온전치 못했고, 무릎이 아파서 제대로 걸을 수 없을 정도로 이미 힘든 상태였습니다.

은퇴하고 나서 한국 화장품에서 대리점을 개설해 주었고, 몸이 좀 나아지면서 1990년부터 3년 정도 일에 몰두했지만 아버지가 암에 걸려 투병을 하게 됩니다.

어머니는 딸과 남편의 병간호를 했고, 딸 몰래 눈물 흘리며 ‘우리 딸 불쌍해서 어쩌나’라고 걱정하며 지내던 중 갑자기 뇌출혈로 쓰러집니다.

하지만, 1998년 뜻하지 않게 59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그녀는 ‘엄마를 따라가야겠다’라고 마음먹으며 식음을 전폐했습니다.

‘엄마 없이는 살고 싶은 이유도 살아야 할 이유도 없다’라는 생각에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후 1년여 동안 생과 사의 갈림길에 서서 힘들게 지냈습니다.

엄마에 대한 죄책감과 미안한 마음에 엄마를 따라가겠다고 몸부림치자,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남동생이 올케와 함께 그녀를 붙잡고 대성통곡하며 ‘제발 죽지 말라’라고 밤낮으로 애원했습니다.

남동생 때문에 다시 살아야겠다고 마음을 고쳐먹은 그녀는 먹을 것을 입에 대기 시작했고, 몸을 추스르며 동생 내외와 함께 아버지 병수발을 도왔습니다.

선수 시절 번 돈과 한국 화장품 대리점을 넘기면서, 받은 권리금 등은 자신과 부모님의 치료비로 다 써버렸습니다.

세 차례의 암 수술을 받았음에도 2000년에 아버지도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그녀에겐 무관심이 따랐습니다.

공로로 받은 것은 그녀에게 쥐어진 훈장 몇 개가 전부였습니다.

2003년부터 그녀를 경기위원에 위촉해 병원비 일부를 지원하기도 했습니다.

우울증과 불안증에 시달리던 그녀가 아픈 마음을 치유할 수 있었던 것은 집 근처 시설에서의 장애인 봉사였습니다.

자신이 겪는 아픔과 우울증은 장애 어린이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비록 자신의 심신은 병들어 있지만, 낮은 곳으로 임한 결과 정신적인 아픔을 덜어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던 김영희가 생명의 위험에 처했고, 두 달간 입원 치료를 받았다는 소식이 전해집니다.

일어서는 연습을 해야 할 정도로 일어서는 것조차 버거운 상태였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혈당 체크와 인슐린 주사를 맞고 약을 먹어야 했습니다.

2005년부터 그녀의 집을 자주 오갔다는 한 이웃은 김영희의 집을 청소해주고, 음식을 해서 동네 어르신들을 모두 불러 다 함께 식사를 했습니다.

김영희는 ‘언니 시어머니가 화장실에서 미끄러지면서, 엉덩이뼈 금이 갔는데 제가 그때 음식을 좀 대접해 드렸다”라고 했습니다.

 

이웃 언니는

쓰러진 김영희를 처음으로 발견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심각한 것은 ‘S상 결장’이었습니다.

이에 대해 주치의는 ‘김영희 상태가 굉장히 심각하다며 쓰러진 지 열흘 만에 의식을 찾았다’라고 했습니다.

주치의는 “S상 결장에 꼬임이 굉장히 심해서 장내에 가스가 가득 차 있고, 혹시나 ‘이러다 돌아가시진 않을까’ 걱정이 된다”라고 전했습니다.

이웃 언니는 당시를 회상하며 “전화를 붙잡고 얘기를 하는데 한쪽에 마비가 와가지고 말을 제대로 발음도 정확하지 않은데, 내 목소리를 듣더니 막 울더라. 저는 병원 밖에서 울고 김영희는 병실에서 울고 그랬다”라고 했습니다.

방송에 나온 김영희의 모습은 심상치 않아 보였습니다.

“서울 올림픽을 대비해서 준비 중 선수촌에서 훈련 도중 쓰러졌어요. 한쪽 다리와 팔이 마비 오고 앞이 안 보였어요. 갑자기 쓰러졌어요. 의사가 ‘어떻게 훈련했냐’라고 혹이 너무 커졌다더라고요. 조금만 더 있었으면 죽었을 거라고 했어요. 병원에서 사형 선고를 내리더라고요. 운동을 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목숨을 내놓느냐 운동이냐’ 둘 중 하나를 택하라고 했어요”

올림픽 은메달로 인한 체육연금으로 매달 70만 원씩 지급되지만, 그녀는 이번에는 “입원해서 치료비가 많이 나왔는데, 어떤 때는 보름도 안 돼서 7천 원만 남을 때도 있다”라고 자신의 상황을 설명했습니다.

 

또한

‘후배 농구 선수 서장훈과 과거 대표팀에서 함께 운동했던 허재 감독이 응원차 돈을 보내줬다’라며 ‘정말 마음이 따뜻하고 고맙더라’라며, ‘두 사람이 정이 많고 겉모습만 보면 안 된다’라고 고마움을 전했습니다.

한기범 역시 그녀의 소식을 듣고 직접 찾아와 격려의 말을 건넸습니다.

그녀에게 큰 키는 축복이었지만, 그것은 농구 선수일 때뿐이었습니다.

30년 넘게 투병 생활을 하며 제대로 된 생활도 할 수 없었던 그녀는 이렇게 세상을 떠났습니다.

부디 그곳에서는 더 이상 어떠한 아픔도 없이 하고 싶었던 것 원 없이 하며 편히 쉬시길 바라겠습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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