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김지미 또 다시 안타까운 결심을…” 어느덧 83세 그녀의 최근 폭로된 충격적인 실체… 하다못해 이젠 가족들마저도…

김지미는 김명자라는 본명으로 1940년 충남 대덕에서 태어났습니다.

8남매 중

넷째인 그녀는 아버지가 대기업을 운영할 정도로 꽤 부유했고, 그녀가 초등학교 시절에는 외제차를 타고 통학했다. 과거 스타들은 가난하고 가족을 먹여살려야 했기 때문에 데뷔했다고 생각하지만 그녀는 조금 달랐다.

김지미는 원래 외교관이 되기 위해 고등학교 때 영어를 공부했고, 당시 서울 명동에서 배꽃이라는 홈카페를 운영하고 있었다. 그녀가 이곳을 자주 방문했을 때 검은색 고무장화를 신은 이상한 남자를 만나 영화에 출연해 달라는 제안을 받게 된다.

그 사람은 당시 막 영화감독 데뷔를 앞두고 차기작에 출연할 배우를 찾기 위해 캐스팅에 바빴던 김기영 감독이었다.

김 감독은 김지미의 눈에 띄어 명동에서 광화문 자택까지 따라가며 역할을 제안했다.

하지만 김지미는 서울대를 졸업한 형을 따라 미국 유학을 준비하고 있었고, 당시 미국 유학을 위한 여권 인터뷰가 대사관에서 예정돼 있었기 때문에 김 이사는 제안을 거절했다.

그러나 김 감독은 여러 차례 김지미의 집을 방문해 그녀의 데뷔를 설득하기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했고, 결국 김지미는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당시 가족들의 극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화여고의 대표 미인 소리. 김지미가 듣던 또 다른 언니가 가족도 모르게 영화에 출연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가족들은 난리가 났고, 김지미가 배우가 되고 싶다고 밝혔을 때 저항이 덜해 결국 부모님도 알게 됐다. 그것도 동의했다.

 

 

 

이후 김지미는

감독의 연락을 받고 영화사 사무실의 교복 차림으로 찾아가게 되는데, 영화사 사장은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기용하길 망설였지만, 김 감독은 기지를 발휘해 교복 대신 어른 옷으로 갈아입히고, 시나리오의 장면 하나를 골라 즉흥으로 찍어서 보여주자, 그걸 보고 나서야 김지미의 캐스팅이 확정되며, 그때부터 여고생 김명자에게는 김지미라는 예명이 생기게 됩니다.

연기 트레이닝도 받아본 적 없는 김지미는 tv 방송도 없던 시절 영화가 어떤 것인지도 모르고, 촬영 때 이렇게 하라고 하면 그렇게 해야 하나 보다는 식으로 했는데, 최무룡, 김진규 등 영화계 선배들이 ‘김지미라는 배우가 하나 나왔다는데 어디 한번 보러 가자’라고 하며 촬영장에서 자신을 지켜보자, 그녀는 엄청난 쑥스러움을 느끼며 그렇게 영화 촬영을 마치게 됩니다.

이후 김 감독의 다음 작품에도 출연하게 된 김지미는 당시 남동생 역할이었던 아역 시절의 안성기와 함께 용산역에서 석탄을 훔쳐 팔아 생계를 잇는 가난한 처녀 역할을 맡게 되는데요.

이때 김 감독은 김지미가 미모 탓에 가난한 배역이 맞지 않을 것 같아 걱정을 했지만, 김지미가 얼굴에 석탄 가루를 덕지덕지 묻히고 남루한 차림을 입는 등 준비를 갖추고 나오자 깜짝 놀라움을 금치 못하게 됩니다.

그렇게 어설프게 시작한 배우 활동은 첫 영화가 성공하자마자 캐스팅 제안이 물밀듯이 밀려오게 되는데요.

당시 한국 영화는 1955년에 15편이 제작되더니, 56년에는 30편, 57년에 37편, 58년에 74편, 59년 111편 등 점점 편수가 늘어나며 전성기를 맞이하였고, 김지미도 한꺼번에 37편까지 겹치기로 촬영을 한 적도 있을 정도로 총망 받는 시내에서 화려한 스타로 빠르게 입지를 다지게 됩니다.

 

겹치기

출연이 잦아지다 보니 그중 한 배우와 여러 편의 영화를 동시에 찍는 경우도 있었는데요.

이 촬영 현장에서 ‘철수’라 불렀던 사람을 다른 촬영 현장에서 ‘민우’라고 불러야 하는데 잘못 부른 적도 있었고, 그때는 후시 녹음을 하던 때라 그런 실수들은 더빙 때 바로잡기도 했었습니다.

 

 

하지만 위기의 순간도 있었는데, ‘사랑이 가기 전에’라는 영화를 찍던 도중 배우 황해가 운전하는 오토바이 뒷좌석에 탔다가 오토바이가 잔차 레일에 걸려 넘어져 15미터 이상 아스팔트 바닥에 얼굴이 쓸리게 되는데요.

얼굴 전면과 코의 피부가 파열되어 배우 일을 영영 그만둘지도 모르는 상황에 몰리며, 3개월 이상 입원을 한 김지미는 일본의 성형외과에서 재수술을 받는 등 천신만고 끝에 겨우 회복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윤정희, 남정임, 문희 ‘트로이카’의 엄앵란까지 다른 여배우들은 로맨스 영화로 경쟁할 때, 김지미는 20대 때도 할머니 분장을 하고 노인 역까지 하는 등 오직 김지미만이 다양한 역할로 맹활약했는데요.

 

이목구비가

그녀는 균형 잡힌 아름다운 몸매, 길고 곧은 다리, 가느다란 팔을 자랑합니다. 그녀는 당시 한국에 있던 존 포드 감독으로부터 헐리우드 진출 제의까지 받았지만, 미지의 세계로 가게 되면 어떤 대우와 보장을 받게 될지 전혀 알지 못했다. 확실하지 않습니다.

이어 김지미는 한국 영화계를 군림하며 여러 작품을 만든 홍성기 감독을 만났다. 그러다가 홍 감독이 고작 스무 살밖에 안 된 김지미에게 집요하게 결혼을 청하자, 당시 너무 어렸던 김지미는 “이렇게 그냥 결혼해야 하나?”라고 물었다. 보고 싶어서 서둘러 결혼식을 올렸다”고 말했다.

결혼식이 끝난 뒤에도 결혼식장에서 바로 영화를 촬영, 촬영인지 진짜 결혼인지 모를 정도로 긴장되고 긴박한 상황 속에서 결혼하게 된 김지미는 이후 홍성에 출연했다. -기 감독의 <춘향전> . 그러나 동시에 신상옥 감독이 ‘성춘향’이라는 영화도 만들었기 때문에 두 영화는 설을 앞두고 피할 수 없는 대결에 직면하게 됐다.

‘춘향전’은 김지미 외에 눈에 띄는 스타가 없었지만, ‘성춘향’에서는 김징규가 이도령 역, 허장강이 방자 역을 맡은 등 조연들의 유머러스한 연기가 돋보였다. 인기를 끌며 38만명의 관객을 동원한 김지미의 춘향전은 대성공을 거두었다. 나는 그것을 수집할 것이다.

김지미는 이후에도 다른 흥행작을 만들며 입지를 굳건히 지켰지만 당시 출연료는 30만원, 집값은 300만원이었다. 제작비를 충당하기 위해 남편에게 600만원을 주었지만, 이후 홍 감독은 작품이 계속 흥행에 실패하면서 결국 홍 감독과 별거하게 되었고, 김지미는 결혼 4년 반 만에 이혼을 결심하게 됐다.

 

 

게다가

그 무렵 김지미는 배우 최무룡과 촬영을 하는 경우가 상당히 찾았는데, 여기서 촬영이 끝나면 같이 이동해 저기서 다시 촬영하고, 저기서 끝나면 또 그다음 장소로 같이 이동하는 등 가족보다도 더 많이 시간을 함께 보내며 서로 밤낮없이 얘기하고 러브신 하고 하다 보니 자연스레 친해지게 되는데요.

최무룡은 배우였던 아내 강효실과 이미 결혼한 유부남이었지만 김지미와 결국 외도를 하게 되더니, 그렇게 김지미는 최무룡과 결혼까지 하게 되며, 이 일로 두른 간통죄로 법정 구속까지 되게 됩니다.

심지어 간통 사건이 밝혀진 시기는 아들 최민수가 태어난 지 열흘 만이었는데, 이미 최무룡에게는 10년 동안의 결혼 생활에 세 딸과 아들이 있었기 때문에 김지미는 대중들로부터 많은 욕을 먹게 되는데요.

하지만 그녀는 최무룡과의 결합을 위해 그때 가진 모든 것을 강효실 측에 주었고, 간통에 대한 비난 여론 못지않게 솔직한 이들의 사랑을 지지하는 팬도 많았다고 합니다.

게다가 결혼 후에도 김지미의 인기는 흔들리지 않았는데, 돈줄을 쥔 투자사들은 김지미를 기용하지 않으면 제작비를 대지 않겠다고 영화사를 압박하기도 했고, 또 한 감독은 김지미에게 ‘꼭 출연해 달라’며 ‘난 돈이 없습니다. 도와주시오. 돈 벌면 개런티 드리겠습니다’하고 해서 출연료 없이 출연해 주기도 했는데요.

 

그렇게

김지미는 엄앵란, 최은희, 최지희 등 동시대의 배우들이 나이를 먹으며 차츰 일선에서 물러나는 와중에도 활발한 활동을 이어갔고, 심지어 어느 하루는 밤 12시까지 한 영화를 찍다가 그 후부터 해 뜨기 전까지는 또 다른 영화를 찍을 정도로 겹치기를 수십 편씩 하기도 했습니다.

게다가 그녀는 영화인으로서의 의무감과 책임감으로 tv 드라마에는 한 편도 출연하지 않았고, 큰돈이 들어오는 cf도 영화로 얼굴을 팔아 광고를 찍는 게 내키지 않아 거절했는데요.

영화배우만으로도 이미 늘 남들보다 두 배 이상 최고 액수를 받으며 최고의 자리를 지켰지만, 최무룡과는 안타깝게도 7년 만에 결별을 하게 됩니다.

최무룡은 배우에서 감독 및 제작자로 돌아서는 과정에서 총 15편의 영화 제작에 줄줄이 실패하면서, 지금 돈으로 환산하면 100억 대나 되는 무려 3천만 원의 빚을 지고 부도를 내고 말았는데요.

이혼 과정에서 최무룡은 ‘사랑해서 헤어진다’라는 웃기면서도 씁쓸한 희대의 유행어를 남기기도 했습니다.

게다가 김지미 역시 이혼 후 서서히 활동을 줄이더니, 76년 이후 6년 동안은 아예 활동을 중단하기까지 하게 되는데요.

 

당시에

바로 장안을 떠들썩하게 했던 나훈아와의 스캔들이 터지게 되는데, 노래를 잘 하는 나훈아가 김지미의 집에서 열리는 파티에 참석해 노래를 몇 번 한 적이 있는데, 이것을 계기로 가족처럼 지내다가 나훈아가 군 제대 후 일이 없던 시기에 둘은 연인 사이로까지 발전하게 됩니다.

그러나 최고의 인기 가수이자 연하남인 나훈아와의 결합에 대해 당시 언론은 ‘부도덕의 대표적 케이스’라는 맹비난을 퍼부었는데요.

결국 김지미는 당시 영화계와 연락을 끊은 채 대전에서 ‘초정’이라는 음식점을 운영하며 살림에 몰두하게 됩니다.

김지미는 나훈아와의 스캔들에 대해 결혼 관계는 아니라고 주장하며, ‘연하의 남자와의 긴 연애’라고 표현했는데요.

실제로도 두 사람은 결혼을 하지 않은 채 76년부터 82년까지 동거만 했는데, 김지미는 평범하게 식당을 하며 살기를 원했던 반면, 나훈아는 가수의 꿈을 놓지 못해 복귀를 하게 되면서 둘의 동거에 금이 가기 시작했고, 그러다 자연스럽게 두 사람 사이가 멀어지며 결국 김지미는 나훈아와도 결별을 하게 됩니다.

이혼 후 나훈아는 바로 14살 연하의 가수 정수경과 4년간 동거를 하다가 1985년 결혼식을 올리게 되는데요.

이 때문인지 김지미는 나훈아를 만난 건 잘못한 것 같다며 나훈아와의 동거를 결국 후회하게 됩니다.

게다가 당시 영화계는 에로물 일색의 영화만 제작되는 바람에 김지미도 무척이나 짜증이 났고, 캐스팅 연락이 와도 의욕도 안 생기고 ‘영화판이 이렇게 가면 안 되는데’라고 개탄하며 보내던 중이었는데요.

예술성 없이 흥행만을 위한 영화계에 신물이 난 그녀는 결국 ‘지미필름’이라는 영화 제작사를 설립해 자신이 직접 영화를 제작했는데, 시대가 바뀌며 기존 활동을 오래 한 영화인들이 설자리가 줄어드는 게 안타까웠던 그녀는 중년이 된 자신 역시 스스로 영화들을 제작해서 출연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그녀는 어느 날 임권택 감독이 의욕적으로 제작하는 영화 ‘비구니’로부터 캐스팅이 되며 의욕을 불태우게 되는데요.

50대 중반에 이르러 모처럼 대작의 기회를 만나며 삭발까지 감행했던 김지미였지만, 그만 뜻밖의 좌절이 찾아오게 되는데 바로 불교계에서 제작 중단을 요구하고 나선 것이었습니다.

‘비구니’가 종교를 세속화하고 ‘비구니’를 모독하는 외설적인 내용이라는 이유에서였는데요.

 

결국

영화는 압력에 굴복하고 제작이 중단되면서 김지미는 그녀의 미래 연기 경력을 밝게 해줄 중요한 직업을 잃게 되었다.

이로써 그녀는 배우로서 좌절감을 느꼈고, 큰 충격을 받았고, 이는 평생 지울 수 없는 아픔이 됐다.

그러다 어머니의 심장병으로 만난 심장내과 의사 이종구 원장을 만나 결혼하게 됐다.

김지미는 7~8개월 동안 매일 아침, 저녁 두 통의 러브레터를 보내주는 남편의 모습에 감동했고, 결혼 후 처음으로 월급쟁이 아내로 살아가는 소박한 행복을 느꼈다.

그러나 이재록 박사의 부인인 김지미는 최무룡의 사망 소식을 듣게 되었고, 김지미는 심장마비로 쓰러져 사망했으나 눈물을 흘리며 최무룡의 장례식을 찾았다.

“나는 그와 가족을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함께 현장에서 고난을 겪으면서 영화를 배우는 10대들이었다”고 말했다.

“고인은 인간적이고 예술적인 기질을 지닌 사람이었으며, 그의 삶은 마치 영화 같았습니다.”

“인생의 마지막 불꽃을 영화에 바치겠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지만 안타깝게도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났습니다.”

“영화계 후배이자 영화산업협회 이사장으로서 영화사에 영원한 업적을 남긴 이 분을 내 손으로 보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후에

김지미는 이종구 박사와도 처음엔 월급쟁이 한 편으로 소박했던 삶을 살았지만, 남편에게 “항상 네 그러세요”라며 큰소리 한 번 치는 날도 없이 격식만 차리다 보니 거리감만 생기게 되었고, 후에 남편이 월급쟁이를 박차고 나와 강남에 병원을 차리면서 불화까지 생긴 끝에 결국 갈라서게 되는데요.

‘자신과 결혼했던 사람 중 누가 기억에 남느냐’라는 질문에 그녀는 ‘그래도 최무룡이 인간성이 참 좋았다’라며 ‘대신 성격 좋고 동료애 많은 것 때문에 맺고 끊는 게 부족했다’라고 회고했습니다.

최무룡도 후에 한 매체에서 “김지미와는 홍콩에서 첫 밤을 보냈다”라는 것까지 밝히기도 했지만, 김지미는 “서울에서 처음 남녀 관계가 이루어졌다”라며 자신의 기억은 다르다고 말하기도 했는데요.

 

그녀는

또한 “결혼은 인간 대 인간으로 만나 가장 편한 상대와 해야 한다는 걸 제가 이 나이가 돼서야 깨달았어요. 집안 좋고 돈이 많다고 해서 그 집에 딸을 시집보내려고 하지 마세요. 딸이 불행해져요”

“저는 조카들에게 다른 것은 보지 말고, 그 사람의 장래에 희망을 걸 수 있다면 그것으로 된다고 말합니다”

“완전하게 갖춰진 사람을 만나려고도 하지 말라고 하지요”

“완전하게 갖춰진 것을 얻으려면 그만큼 희생이 필요하니까요”라고 밝히기도 했습니다.

파란만장했던 인생을 돌아오며 김지미도 이렇게 인생의 참뜻을 깨닫게 되었지만, 그런 그녀도 이제 어느덧 80대 중반의 나이가 되었는데요.

쉽지 않은 인생을 살아오며 산전수전을 거쳐온 그녀의 남은 인생에 행복만이 가득하기를 기원하며 배우 김지미에게 여러분의 따뜻한 응원을 부탁드립니다.

Leave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