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년생 트로트 가수 금잔디의 눈물겨운 고백에…” 그녀가 사우나에서 발견된 사연에 대해 확인해보실 수 있어요.

지금은 트로트 전성시대라고 부를 정도로 트로트에 대한 열풍이 대단한데요.

사실

트로트라는 장르가 예전에는 중장년층 세대들에게만 인기 있는 음악이었다면, 최근에는 코흘리개 꼬마도 흥얼 걸리는 게 트로트 음악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갈수록 젊어지는 트로트는 노래를 부르는 가수들도 덩달아 젊어지고 있는데요.

긴 무명 생활을 보내고 메들리 음반으로 고속도로의 여왕이 되어 이젠 장윤정, 홍진영에 이어서 트로트의 여왕까지 바라보고 있는 가수 금잔디.

금잔디는 데뷔 22년 만에 가장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데요.

 

 

또한 얼마 전 대한민국 최고의 가수 나훈아가 후배 가수들과 작곡가들을 초대해 저녁 식사를 대접한 적이 있는데, 당시 수십 명의 후보 중에 나훈아가 가장 만나고 싶은 후배로 그녀가 뽑히며 영광의 자리를 함께 가지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늘 밝고 건강한 모습을 보이며 대중들뿐만 아니라 선배 가수들로부터도 많은 사랑을 받은 그녀는 평소에도 구김살 없는 행동을 보여줘 귀한 집에서 화초처럼 자랐을 것 같지만, 인생사 호사다마라고 했던가, 정작 인간 금잔디의 인생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녀는

한때 수상한 아빠를 따라가 소리를 지르며 해 뜨는 게 무서워 항상 이불로 창문을 다 가려놓고 지내야 했고, 또한 매니저가 돈을 들고 도망가는 바람에 인생을 자포자기하며 수중에 지폐 한 장이 없자, 비행기의 승무원들 사이에 누워 있어야 했던 금잔디 그녀의 가슴 아픈 인생에 대해 말해보고자 합니다.

1979년 강원도 홍천에서 태어난 금잔디는 어린 시절 철없는 아버지로 인해 집안이 바람 잘 날이 없었는데, 당시 그녀의 아버지는 손찌검, 외도, 도박 등 나쁜 남자가 하는 건 모조리 다 했다고 했습니다.

하루는 어머니가 어렵게 금잔디의 교복 값을 모아 아버지에게 교복을 찾아와야 내일 애를 입힐 수 있다고 말하며 교복 좀 찾아달라고 20만 원을 주었으나, 하지만 그때도 그녀의 아버지는 20만 원을 가지고 가서 화투를 쳐서 결국 교복 값을 다 잃고야 말았습니다.

하루는 어머니가 며칠째 화가 나 있길래, 그녀가 ‘왜 그러냐’고 했더니 아빠가 수상하다고 했고, 그래서 두 사람이 아빠의 뒤를 쫓아 어느 다방에 들어가 보니 다른 여자와 어깨 동무를 하고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아빠의 외도를 보게 된 그녀는 당시 교복을 입은 채로 대걸레 머리를 빼서 아빠와 외도녀에게 다가가 소리를 지르고, 대걸레를 휘두르며 그야말로 다방을 다 휘저어 놓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그녀의 아버지가 늘 노름과 외도를 하다 보니 생활도 안 되고 집도 저당이 잡혀서, 나중에는 마이너스 통장까지 쓰다가 결국에는 부도 처리를 하면서 당시 집 안에는 온통 압류 딱지가 붙게 됩니다.

 

 

급기야

10원 한 장 못 가지고 옷만 입은 채 온 가족이 집을 나와야만 했습니다.

그럼에도 음악을 좋아했던 그녀는 사실 태어나기 전부터 음악과 인연이 있었는데, 당시 어머니가 임신했을 때 외할아버지는 하루 종일 타령을 했고, 아버지 차에서는 늘 트로트 메들리가 흘러나와 말을 배우기 시작한 뒤로는 구성지게 뽕짝을 부르는 꼬마로 동네에선 유명인사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성인이 되어서도 트로트가 좋았던 그녀는 공주대 실용음악과를 다니며 무능한 아버지를 대신해서 밤에는 여덟 군데의 밤업소를 다니며 노래를 불러야 했고, 그런 와중 어느 날 평소와 똑같이 밤업소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는데 마침내 소속사라는 개념의 매니저 한 명을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 그때 매니저라는 사람이 가수를 하려면 이런 밤무대 일들을 다 그만두라고 하자, 당시 유일한 생계 유지 수단인 밤무대를 어쩔 수 없이 다 그만두게 되었고, 그렇게 해서 첫 음반을 발표하긴 했으나 기대와는 달리 제대로 된 무대 한번 서보지도 못하고, 안 그래도 힘든 형편이 더욱 힘들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당시 보증금 500에 월 30 월세에 살고 있던 그녀는 결국 월세 낼 형편도 못돼 보증금마저 깎아 먹고 말았고, 또 한 해가 뜨면 주인 아주머니가 찾아오니까 해 뜨는 게 무서워 항상 이불로 창문을 가려놓은 채 언제 가는지도 모르게 해놓고 있다가, 해가 지는 시간이 돼서야 그때 밖으로 나가곤 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 집마저 쫓겨난 그녀는 당시 오갈 데가 없어 찜질방에서 매일 옥수수만 먹으며 버텨야 했는데, 그런 와중에도 사람들의 시선이 두려워 매일 먹는 옥수수가 너무 싫었음에도 마치 간식으로 먹는 듯이 맛있는 표정을 지어야 했을 때 너무 서럽고 힘들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다시 무작정 밤무대를 찾아다니며 자신의 이름과 사진이 담긴 앨범을 들이밀며 관계자들에게 노래를 하게 해달라고 부탁을 해야 했고, 그래도 다행인 게 이후 노래를 열심히 하는 모습을 예쁘게 봐준 관계자들의 소개로 마침내 새로운 제작자를 만나, 2004년 ‘박수빈’이라는 이름으로 또 한 번 앨범을 내게 됩니다.

그렇게 ‘박수빈’이라는 예명으로 새롭게 데뷔한 그녀는 평생 꿈이었던 가요 무대까지 나가며 이번에야말로 일이 잘 풀리는가 하고 안도해 숨을 내쉬던 순간, 당시 매니저가 돈을 들고 도망가는 바람에 또다시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두 번이나 가수로 실패한 그녀는 결국 마음의 상처를 너무 크게 받아 인생을 자포자기하며 하루하루를 그냥 살아가게 되는데, 그때도 밝은 빛이 싫어 낮에는 어두컴컴한 pc방을 전전하고 밤에는 잠깐 외출하는 생활을 하며 모아두었던 돈도 눈 녹듯 사라져 수중에는 지폐 한 장 없는 상황까지 오게 됩니다.

한편 이 무렵 돈 들고 도망간 매니저 말고 또 다른 매니저였던 최지웅 씨가 어느 순간부터 전화도 안 되고 연락이 두절된 그녀가 걱정돼 찾아갔더니, 너무나도 형편 없이 사는 모습을 보고 자신의 목걸이를 풀어주며 ‘밥은 꼭 먹으라’라며 당부의 말을 남기자 당시 금잔디가 펑펑 울면서 나를 응원해주고 믿어주는 분들을 위해서라도 꼭 다시 노래를 하겠다는 각오를 다지게 됩니다.

그렇게 다시 한번 힘을 낸 그녀는 2008년 또 한 명의 운명 같은 남자를 만나게 되는데, 바로 지금의 소속사 사장으로 당시 성인가요 앨범을 제작하겠다는 다른 몇몇 관계자들을 만나봤지만, 다들 음악보다는 유행을 추구했고, 그런데 지금의 소속사 대표는 자신의 음악적 생각과 마치 맞춘 것처럼 일치하자 두말 없이 계약하게 됩니다.

 

하지만

소속사 대표가 사실 이전에 벌였던 일들이 거듭 실패하는 바람에, 당시 금잔디 앨범을 제작할 돈이 없었고, 설상가상 그녀 역시 모아둔 돈 한 푼 없어 날로 생활이 궁핍해지면서 결국 또다시 옥수수만 먹으며 하루하루를 연명하게 됩니다.

그렇게 이 무렵 이러다간 죽도 밥도 안 될 것 같아 대표와 매니저 그리고 그녀는 더욱더 적극적으로 투자자를 만나기 시작했고, 그런데 대부분의 투자자가 염불보다 잿밥이라고 앨범에 투자를 하겠다는 생각보다 다른 쪽에 욕심을 드러내게 됩니다.

이처럼 당시 3명 모두 투자자들에게 이상한 제의를 받았는데 세 사람 모두 ‘가수를 안 하면 안 했지. 절대 그런 일은 안 하겠다’라고 마음을 모았고, 그런 와중 2004년 ‘박수빈’으로 활동할 당시에 많은 사랑을 보내준 한 팬이 찾아와 그녀의 어려운 사정을 듣고, 자신의 집을 팔아 3천만 원의 앨범 제작비를 건네주게 됩니다.

이렇게 한 편의 도움을 받아 ‘잔디’라는 이름으로 대중들 앞에 서서 노래를 하게 되었고, 그리고 이때 그녀의 메들리 앨범도 대박이 나면서 마침내 길었던 무명 생활을 청산하고 본격적으로 고속도로 여왕으로 거듭나게 됩니다.

그렇게 이후부터 그녀는 정말 단 하루도 쉬는 날이 없을 만큼 바빴고, 또한 그때는 로봇처럼 누가 먹여주면 받아먹고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노래만 부르다 보니, 그러다 점점 몸에 과부하가 걸려 결국 2016년 심각한 공황장애가 오고야 말았습니다.

 

당시 그녀는

두통부터 시작이 돼서 감기가 왔나 싶어 ‘내일 스케줄이 있으니까 오늘 빨리 감기약을 먹고 쉬어야겠다’ 하고 그냥 감기약을 먹고 누웠는데, 그런데 누움과 동시에 일어나지도 못하겠고 아무것도 먹지 못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이후부터는 수시로 심장이 조여와 집 안까지 차를 타고 행사를 가야 하는데, 너무 답답해서 가는 도중에 차가 수시로 서야만 했고, 그래서 결국 그때부터 차를 탈 수가 없어 비행기를 타고 공연을 하러 갔으나 고도가 높아지면 또다시 심장이 조여오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비행기에서도 숨쉬기 힘들어했던 그녀는 당시 승무원들에게 양해를 구하며 비행기 바닥에 누워 있어야 했고, 그러다 승무원들이 지나가면 다시 쪼그려 앉아 있기를 몇 번이나 반복하며 지옥 같은 시간들을 보내야만 했습니다.

이처럼 그녀는 그토록 바라던 인기 가수가 되자마자 우울증에 폐쇄 공포증에 공황장애까지 겪으며 정말 이러다 하늘로 가겠다 싶을 정도였고, 그러다 어느 날 고속도로에서 잠깐 쉬는데 어르신들이 tv 속에 노래하는 금잔디를 보고 너무 좋아한다며 화면을 어루만지는 모습에 ‘아 나를 저렇게까지 좋아해 주시는데 힘을 내야겠다’라고 긍정적인 생각으로 바꾸니 점차 아픈 몸도 좋아지기 시작했습니다.

한편 이 무렵 어린 시절부터 집안을 힘들게 했던 아버지가 허구한 날 빚을 만들면 그녀가 갚아주고 갚아주고를 반복하다가, 이번에도 2천만 원이 안 되는 돈을 빌렸다가 이자가 불고 불어 1억 원의 빚을 지고야 말았습니다.

 

그런데

당시 맞 보증을 썼던 사람이 금잔디가 가수로서 잘 되는 걸 알고 ‘당신 딸 이렇게 잘 되고 있는데. 왜 안 갚냐’라고 하면서 압류를 걸고 고소를 하게 되었고, 그렇게 서로 보증을 서서 썼건 어쨌건 아빠가 진 빚이 맞다고 생각한 그녀는 또다시 아버지의 빚을 갚아주면서, 훗날 그녀의 고백에 따르면 1998년부터 2016년도까지 였으니까 무려 18년간 부모님의 빚을 갚아드렸다고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금잔 뒤 그녀가 고백하길 “누군가가 말하기로 트로트를 제대로 부르려면 인생부터 알아야 된다고 하던데, 그래서 과거 나의 상처들이 어떤 면에서는 좋은 약이자 경험이 된 것 같다. 그리고 나이가 있다 보니 주변에서 결혼 얘기를 많이 하는데, 하지만 바람 잘 날 없던 우리 아빠를 보고는 결혼이나 남자에 대한 생각이 전혀 없다”

“그래서 나 스스로가 여자로서의 삶이 망했다고 생각하는 게, 20대, 30대에만 해볼 수 있는 연애조차 거의 하지 못했고, 사실 가정을 꾸릴 수 있는 시기도 이미 끝났다. 그래서 나는 결혼에 대한 꿈은 아예 없고, 대신 내 인생의 결말은 음악 부자였으면 좋겠다”

“금잔디라는 가수, 금잔디가 남긴 노래, 금잔디를 만든 매니지먼트, 나는 그거면 충분하다”라고 말했습니다.

앞으로도 지금 행복한 모습 그대로, 좋은 모습 보여줬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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