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년생 불트 가수 박서진이 탈락임에도 불구하고 가장 먼저 한 선행…” 놀라운 그의 이야기를 확인해보실 수 있습니다..

박서진은 1995년에 경상남도 사천에서 ‘박효빈’이라는 이름으로 태어났습니다.

어린

시절 가난한 집안 형편에 형 3명 중 2명이 갑상선암과 만성 신부전증으로 투병까지 하면서 그의 집은 형들을 치료하기 위해 집도 팔고 가진 재산을 다 팔았는데도 빚이 점점 불어나게 되는데요.

그렇게 치료비에 전 재산을 다 쏟아부었지만, 형들은 결국 세상을 떠나게 되었고, 뒤이어 어머니마저도 하혈을 하게 되는데 병원에 갔더니, 자궁암이라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까지 접하게 됩니다.

박서진의 부모님은 뱃일을 하며 생계를 꾸리셨는데, 어머니가 투병으로 더는 일할 수 없게 되자 결국 박서진이 다니던 학교까지 자퇴하며 아버지의 뱃일을 돕고 나서게 되는데요.

 

트로트

가수를 꿈꾸면서도 집안 사정으로 학업을 그만두고 어부가 된 삼천포 소년의 이 이야기는 KBS ‘인간극장’을 통해 방영이 되면서 방송 후 그를 돕겠다는 곳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인간극장’을 보고 그에게 반찬과 도시락을 보내는 곳도 있었고, 옷과 생활용품 등을 후원받기도 했는데요.

박서진은 어릴 때부터 툭하면 집에 빚쟁이들이 돈 받으러 쳐들어오곤 했을 정도로 집안 형편이 어려웠고, 심지어 가난해서 학교에 수학여행비도 못 내고 급식비를 못 낸 적도 많았을 정도였습니다.

그 과정에서 자신은 열심히 살아서 돈 때문에 굶는 일은 없게 하자고 각오를 다졌다고 하는데요.

어릴 적부터 박서진의 부모님은 일로 바빠서 아들을 돌볼 수가 없다 보니 항상 아들을 배에 함께 태우고 다니셨다고 합니다.

배에서는 항상 트로트 가락이 흘러나왔다 보니 박서진은 아기 때부터 자연스럽게 트로트에 친숙할 수 있었던 것인데요.

 

 

그가 트로트 가수를 꿈꾸기 시작한 건 초등학교 3학년 때 동네 노래자랑에 나간 것이 계기였습니다.

장윤정의 ‘짠짜라’를 부르는 자신에게 열광하는 사람들을 보며 박서진은 이렇게 박수받고 환호 받는 트로트 가수가 되리라고 마음먹게 되는데요.

어떤 아저씨는 꼭 껴안아 주면서 ‘정말 잘했다’라고 해 주고, 어떤 아주머니는 울면서 ‘삼천포를 대표하는 가수가 되라’라고 했으며, 또 어떤 아저씨는 아이스크림 사 먹으라고 용돈 1000원을 주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초등학교 6학년 때는 전국 노래자랑에도 나가기도 했는데요.

예심을 통과해서 본선 무대에는 올랐지만, 아쉽게도 입상에는 실패했던 박서진.

그러다가 충청대에서 개최한 트로트 가요제에 출전해서 은상을 받게 되는데, 그것을 본 SBS ‘스타킹’ 프로그램 작가의 섭외를 받아 박서진은 13살 때 그 프로의 ‘리틀 장윤정’으로 출연하게 됩니다.

그리고 4년 후 박서진은 다시 한번 ‘스타킹’ 프로에 나갔다가 선배 장윤정을 만나게 되는데요.

 

방송에서는

어머니의 병환으로 자신이 뱃일을 하게 된 사연이 소개가 되었고, 장윤정과 듀엣으로 노래도 부르게 되었는데, 장윤정은 그런 박서진의 처지를 안타까워하며 어머니의 치료를 돕고 싶다고 말하게 됩니다.

박서진은 그 마음만으로도 감사했는데, 다음 날 ‘스타킹’ 작가가 계좌번호를 물어보길래’당연히 ‘출연료를 주려고 그러나 보다’ 했다가 통장에 찍힌 금액을 보고 깜짝 놀라게 되는데요.

알고 보니 그것은 출연료가 아닌 바로 ‘장윤정’이라는 이름으로 큰 금액이 입금이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도움이 절실히 필요할 때 기꺼이 손을 내밀어 도와준 분들 덕분에 희망을 품고 용기를 낼 수 있었다고 털어놓은 그는 ‘스타킹’ 방송으로 조금씩 팬들이 생겨나게 되는데요.

팬카페 운영진이 ‘인간극장’에 출연을 신청하면서 박서진은 같은 해 ‘인간극장’에도 나가게 됩니다.

‘인간극장’을 통해 박서진의 안타까운 가족사는 더 자세하게 공개되는데요.

 

그의 부모님은

재혼한 부부로 재혼하기 전에 아버지 쪽에 형이 세 명이 있었다가 형들이 병에 걸리면서 부모님의 빚이 점점 불어났지만, 형들이 끝내 세상을 떠나면서 어머니까지 암 판정을 받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아버지를 도와줄 사람이 필요해 박서진이 고등학교를 자퇴했다는 사연이 소개되며, 많은 시청자들에게 그의 대단한 효심이 알려지게 되는데요.

게다가 아버지마저 당뇨병이 있어서 무리한 조업을 하다가 저혈당이 와서 쓰러질 뻔하기도 했고, 또한 밤에만 활동하는 야행성인 장어를 잡기 위해 밤샘 작업을 했기 때문에 박서진은 한창 자랄 나이에 밤에 잠도 못 자고 아버지를 돕느라 요즘 청년치고는 작은 172cm밖에 자라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박서진의 머릿속엔 뱃일을 하면서도 언젠간 가수로 성공해서 부모님을 편하게 해드리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는데요.

생선을 안 먹을 정도로 바다 일을 싫어했는데도 부모님을 위해 그렇게 뱃일을 했던 그는 가끔 지역 축제에서 연락이 와 외출할 때면 몸에서 비린내가 나는 게 걱정되어 씻고 또 씻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러다 어느 날 경남 울산 지역 방송인 JCN 트로트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결국 박서진은 18살에 가수의 꿈을 이루게 되는데요.

그때 우승 상금으로 1000만 원을 받으며 그는 드디어 첫 앨범을 내고 가요계에 데뷔를 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당시 행사 섭외 연락이 들어와도 한 번 장어잡이를 나가면 보름씩 나가야 하다 보니 힘들게 이뤄낸 가수의 꿈이 자꾸 멀어지자, 부모님은 박서진을 서울로 보내기로 결심하시게 되는데요.

 

하지만

앨범만 내면 방송 출연 제의가 줄줄이 들어올 줄 알았던 박서진은 아무도 찾지 않는 현실의 냉혹함과 부딪히게 됩니다.

앨범을 홍보하기 위해 라이브 카페에서 노래하고 길거리 공연도 하고 밤무대에도 섰지만, 쥐꼬리만 한 수입에 결국 월세까지 밀리며 결국 그는 우울증에 걸리게 되는데요.

게다가 돈을 주면 방송에 출연시켜 주겠다는 업자들이 그에게 접근하며 박서진에게 1000만 원을 요구했는데, 그때 가지고 있는 돈이 150만 원 남짓밖에 없었던 박서진은 돈을 다 보내주었으나 결국 사기를 당하고 말게 됩니다.

그런데 기가 막힌 것은 그 돈을 찾기 위해 사무장에게 30만 원을 주고 고소했다가 사무장마저 돈을 받고 잠적한 것이었는데요.

결국 그렇게 계속된 사기를 당하고 잘 곳마저 없어진 박서진은 지인 가게의 차가운 바닥에서 자고 옆 병원 건물에서 씻으며 거의 노숙자처럼 생활하게 됩니다.

 

이후

그는 각설이 품바 팀을 알게 되며 품바 공연에 합류했다가, 그들이 장구를 치며 노래를 부르는 걸 보고 자기도 장구를 치면서 노래를 부르면 특이하겠다는 생각이 들어 장구를 배우게 되는데요.

다른 트로트 가수와 차별화된 경쟁력을 갖고자 장구를 배운 건 바로 그의 가수 인생의 신의 한 수가 되었습니다.

당시 장구치며 노래하는 건 각설이 무대에서나 하는 거라며 격이 떨어진다고 박서진을 욕하는 선배들도 있었지만, 그는 굴하지 않고 오히려 장구를 제대로 배우고자 장구 명인을 찾아가 가르침을 받게 되는데요.

 

 

그렇게 전국의 장터를 떠돌아다니며 각설이 판을 벌였던 그는 선배 가수 박구윤으로부터 ‘장구의 신’이라는 애칭까지 얻으며 조금씩 인지도를 쌓아갔고, 결국 ‘아침 마당’에까지 출연해 ‘도전 꿈의 무대’에서 5주 연속 1위까지 차지하게 됩니다.

당시 3승에 도전할 때는 역시 무명이었던 임영웅과도 함께 했었는데요.

‘아침마당’을 통해 본격적으로 유명 가수의 대열에 오르기 시작한 박서진은 3년 후 MBC ‘나는 트로트 가수다’ 프로에서 조항조, 김용임 등 기라성 같은 가수들과 경연을 펼치며 상위권이 성적을 기록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렇게 잘나가던 프로에서 그는 또 한 번의 불운을 만나게 되는데요.

 

보통 가수들이

무대에서 소리를 잘 듣기 위해 이어폰을 착용하는 경우가 있는데, 4라운드 2차 경연에서 이어폰이 수신 불량으로 들리지 않자 박서진은 도중의 노래를 잠시 멈추는 실수를 하게 됩니다.

당시 그는 음향 장비의 이상이기 때문에 NG 후 다시 갈 수 있을 줄 알고 노래를 끊었다가, 그렇게 할 수 없음을 깨닫고 가까스로 계속 불러 노래를 마치게 되는데요.

결국, 자기 자신에 대한 자책으로 견딜 수가 없었던 박서진은 경연의 규칙과 공정성을 지키기 위해서 자진 하차를 선택하게 되는데 자신이 무대에서 그런 실수를 했는데도 계속 이어가게 되면 선배들과 프로그램에 누가 될까 봐 그는 그렇게 결정을 한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이후 박서진은 임영웅을 스타로 만든 프로그램 ‘미스터 트롯’에는 다른 가수들을 위해 출연을 양보하게 되는데요.

‘미스터 트롯’ 전만 해도 임영웅보다 더 유명 가수였던 그는 출연을 양보한 이유를 밝혔습니다.

“출연 제의가 여러 번 왔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내키지 않았어요. 팬들도 있고 방송 활동도 많이 하는 저보다는 무대에 설 기회가 절실한 분들이 오디션에 참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출연 제의를 계속 거절했죠”

‘후회되지 않느냐’라는 질문에 박서진은 손사래를 치며 “오히려 ‘미스터 트롯’으로 트롯 가수들이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트로트가 더 발전하고 사랑받게 되었으니, 그들과 함께 활동하며 자신이 설 무대도 덩달아 많아지고 트로트의 격이 높아졌다”라고 말했는데요.

 

또한 어느

여름 장맛비가 퍼붓는 와중에도 대구 달성에서 펼쳐진 한 무대에 오른 박서진을 보기 위해 멀리서 공연장을 찾은 그의 한 팬에게 공연장을 찾은 이유에 대해 묻자 “장구를 치며 기존 트로트와는 전혀 다른 느낌으로 노래하는 박서진 가수에게 빠져들었다”라며 “‘인간극장’을 통해 바다로 간 트로트 소년을 보면서 여리지만 강한 모습에 호감을 갖고 있었는데, 무대 위에서는 또 다른 매력을 발산했다. 청아한 음색과 꾸밈없는 표정에 반했고, 신명나는 장구 퍼포먼스의 신선한 충격과 감동을 받았다”라고 말하며 그의 팬이 된 이유를 털어놨습니다.

또한 경기도에서 왔다는 한 중년 여성 팬은 “갱년기 우울증을 심하게 앓던 어느 날, 병문안을 온 동생이 박서진의 공연 영상을 보여줬다. 그 모습이 잊히지 않아 종일 그의 노래를 들으며 우울증을 극복했다”라며 박서진을 ‘종합비타민이자 만병통치약’이라고도 표현했는데요.

또 그에게는 호스피스 병동에서 지내는 한 여성 팬이 있었는데, 3개월 동안 웃지를 못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박서진은 그 팬을 찾아 병문안까지 갔다고 합니다.

병실에 들어선 순간 그 팬은 박서진을 보고 드디어 활짝 웃었다고 하는데요.

일주일 뒤에 그 팬은 결국 세상을 떴는데, 장례식장에서 그의 아들이 박서진의 손을 잡고 눈물을 뚝뚝 흘리며 ‘어머님의 웃는 모습을 보게 해 줘서 너무 감사하다’라고 전했다고 합니다.

또한 어린 시절 출연했던 ‘전국 노래 자랑’의 MC 송해가 별세했을 때도 추모 특집 프로에 출연해 고인의 명복을 빌기도 했던 박서진은 결국 최고의 스타로 도약하기 위해 결단을 내리며 ‘미스터 트롯 2’의 참가를 결정하게 되는데요.

 

그는 어머니의

자궁 암이 좋아지지 않았고, 당뇨를 앓고 있는 아버지도 여전히 아직도 배를 타고 계시기 때문에 임영웅처럼 최고의 스타로 한 단계 더 도약해 부모님을 편하게 모시고자 결국 제작진의 참가 요청을 수락하게 됩니다.

그는 ‘미스터 트롯 2’ 출연하는 내내 최고의 노래를 선보였고 각종 인기투표에서도 최상위권을 유지하며 다른 참가자들을 압도했는데요.

하지만, 우승이 가장 유력시되며 제2의 임영웅 같은 대스타 탄생이 초 읽기에 들어간 상황에서 그만, 박서진은 데스매치에서 충격의 패배를 당하며 결국 ‘미스터 트롯 2’에서 그만 아쉬운 하차를 하게 됩니다.

너무나 유력한 우승 후보였던 그가 충격의 탈락을 하게 되자 많은 매체는 심사에 의문을 제기하고 나섰는데요.

하지만 박서진 본인은 오히려 대인배답게 “화장실에 가면 “아름다운 사람은 머문 자리도 아름답습니다”라는 글귀가 붙어 있다”라며 “팬 여러분은 아름다운 사람이기 때문에 머문 자리도 아름다웠으면 좋겠다. 앞으로 경연에 참여하시는 모든 분들 응원해 주시고 악플은 마음속으로만 간직해 주시고, 저에게 악플을 보내는 분들은 ‘그렇게라도 해야지 속이 풀리나 보다’라고 생각해 주시고 가볍게 넘겨달라”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미스터 트롯 경연은 끝이 났지만 나에게는 새로운 출발이라고 생각한다. 결과와는 다르게 좋은 일들이 많이 일어나고 있다”라며 “이번 경연을 참여하면서 여러 좋은 사람들도 많이 만나고 몰랐던 사실도 알게 되고, 나에게는 행복한 시간이었다. 여러분도 슬퍼하지 마시고, 기뻐해 달라”라면서 팬들에게 당부의 메시지를 덧붙였는데요.

탈락을 당하며 또다시 시련을 겪었지만, 아쉬워하거나 이의를 제기하기보다는 오히려 다른 참가자들을 응원해 달라며 박서진은 끝까지 최고의 매너로 팬들을 다독였던 것입니다.

그는 집안 형편이 어려운 아이들이 자신 같은 상처를 받지 않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요즘은 여유가 될 때마다 틈틈이 연세대 세브란스 병원 어린이 병동을 후원하고 있다고도 하는데요.

비록 우승의 꿈은 이루지 못했지만, 이렇게 실력과 인성에서 이미 최고임을 증명한 박서진.

그동안 수많은 역경과 시련을 딛고 현재의 자리까지 올 수 있었던 것처럼, 그가 앞으로도 어떤 또 다른 시련이 닥쳐도 모두 이겨내고 최고의 가수로 발돋움할 수 있기를 빌며, 그리고 박서진의 부모님의 건강과 먼저 하늘로 간 박서진의 형들의 명복을 빌며, 가수 박서진의 앞날에 여러분의 뜨거운 응원을 부탁드립니다.

 

한편

기부도 꾸준히 실천하고 있다.

“제가 어렸을 때 가난하게 살다 보니 많은 분이 도와주셨다. 나중에 크면 받았던 걸 다시 베풀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가 할 수 있는 선에서 베풀고, 저에게 받은 분들이 저와 같은 생각으로 나중에 또 베풀 수 있다면 좋겠다”며 미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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