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주인공 가수 신성의 이야기에 앞서 결혼을 앞둔 청춘 남녀가 정겹게 대화를 나누고 있습니다.
그러다
남자가 머뭇거리다 말을 건네길 “나 사실은 연예인이야”라고 말하자 여자는 크게 웃으며 “네가 연예인이면 난 미스코리아다”라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남자는 “본인이 진짜 탤런트”라며 강변하게 되는데 이 이야기는 드라마 속 장면이 아닌 탤런트 김명민이 밝힌
실제 무명 시절의 이야기인데.
훗날 그 여성은 남편이 연기 대상을 수상하자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이처럼 스타에게 무명 시절은 어쩌면 통과 의뢰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막상 스타를 꿈꾸는 자에게 무명 딱지는 삶을 절망의 구렁텅이로 몰아넣기도 합니다.
오늘의
주인공 가수 신성 역시 한때 가요제 상금 300만 원을 못 받아 부산까지 쫓아갔지만 가요 무대에 올려주겠다고 하자 또 300만 원을 입금해야 했는데.
이후 미스터트롯에서 임영웅 영탁 장민호와 한 팀을 이뤄 당연히 톱3 안에 들 거라 생각했으나 결국 본인만 떨어지자 솔직히 그때는 살고 싶지 않았다고 고백한 가수 신성의 파란만장한 인생에 대해 말해보고자 합니다.
가수 데뷔
1985년 충남 예산에서 4녀 1남 중 막내로 태어난 신성은 당시 아버지가 딸만 넷을 놓다 보니 아들을 기다리고 기다리다 40세가 되어서야 그를 낳았는데.
그런데 태어나던 날 딸이라고 거짓말을 해야 명이 길다고 해서 가족들은 아버지에게 일종의 몰래카메라처럼 또 딸이라고 거짓말을 했다는데.
그날 저녁이 되어서야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고 아버지는 엄청나게 기뻐했다고 하죠.
한편 신성의 혼칠한 외모와 가수 dna는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것인데.
젊은 시절 아버지의 별명이 배우 신성일로 훗날 아버지의 고백에 따르면 당시 발에 차이는 게 여자였고 또한 노래도 잘해서 예술단으로부터 ‘가수를 좀 해보지 않겠느냐?’는 제의를 많이 받았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아들 신성도 학창 시절 공부보다는 예체능에 관심이 많아 친구들과 어울려서 춤을 추기 좋아했다고 합니다.
고등학교 때는 밴드팀에 드럼으로 열심히 활동하고 대학교 때는 축제 때 무대에 올라가 노래를 하면서 그렇게 점점 가수의 꿈을 꾸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당시 부모님께서는 절대 연예계 쪽 일은 하지 말라며 그가 가수가 되는 걸 엄청나게 반대했는데.
그러면서 공무원이 되길 바랐는데 하지만 신성이 예전부터 공부에는 담을 쌓는 바람에 대학 졸업 후 어쩔 수 없이 여느 또래 청년들처럼 취업의 문을 두드리게 됩니다.
그렇게 신성의 20대는 평범한 직장 생활을 해야 했고 하지만 직장을 다녀도 어디에 가요제가 있다하면 늘 거기다가 신청을 해서 나가고 또 상도 타고 하다 보니 당시 그의 마음은 자꾸 콩밭에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때문인지 직장 생활이 맞지 않았던 거는 일자리를 몇 번이나 옮겨 다녀야 했는데 당시 사무직부터 공장의 2교대 생산직 식물 관리 등 꾸준히 하는 게 없었고 그러다 하루는 충남 예산의 전국 노래자랑이 열리자 이번에도 역시나 바로 쫓아가 신청하게 됩니다.
그런데 노래가 천성이었던지 그는 덜컥 최우수상을 받더니 또 상반기 결산에 가서 장려상까지 받고 말았고 그러자 이때 결국 부모님도 두 손 두 발 다 드시고 하루는 그를 불러 “이왕 시작한 거 열심히 해봐라”며 그의 가수 활동을 허락하고 지원하게 되는데 이때가 그의 나이 30살이었습니다.
냉혹한 현실
이처럼 다소 늦은 나이에 가요계에 데뷔했던 만큼 당시 신성은 굉장히 기대가 컸었고 그래서 앨범만 내면 박현빈, 장윤정 같은 인기 가수가 금방 될 거라 예상했으나 모든 가수가 그렇듯 이상과 현실은 냉혹하기도 너무나 달랐습니다.
우선 무시당하는 게 일상이었던 그는 행사장에 가게 되면 바로 노래를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순서가 밀리고 밀려 1시간에서 2시간은 기본이고 심지어 3시간도 기다리곤 했는데.
그래서 그때는 늘 “어 너 나중에 해 좀 빠져 있어”라는 말을 들으며 그야말로 기다림의 연속이었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힘들었던 건 바로 생활고였는데.
말이 좋아 가수지 사실 수입은 거의 없었는데 특히 초창기에는 자신을 알려야 한다는 뜻 때문에 무대에 올라 노래를 하고 출연료를 못 받아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이런 무대에 서는 걸 영광으로 알라는 소리만 듣고 그냥 돌아와야 하는 날이 비일비재했습니다.
그럼에도 무명 시절에는 건방지다는 소리를 들을까 봐 감히 행사 비용을 달라는 말을 하지도 못했고 또한 받는다고 해도 돈 대신 행사장에 있던 상품이나 다른 물건들로 받기가 일쑤였습니다.
그러다 가끔 진짜 돈을 받을 때는 그 돈으로 의상을 구입하느라 생활비는 꿈도 못 꾸고 사실상 무보수 행사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행사조차 없을 때는 집안이 농사를 지으니까 주로 밭에서 작물 작업을 하며 그러다 “며칠날 뭐가 있으니까 와라” 하면 또 농사 짓다 가서 노래하고 다시 집에 와서 밭일을 하는 이 생활을 무려 8년간 지속해야 했습니다.
이와 관련해 그가 고백하길 “무명 시절 생활고에 많이 시달렸다”
“한 번은 어디 가요제에 나가서 대상을 받고 상금 300만 원을 받아야 하는데 그걸 못 받아서 부산까지 쫓아갔는데 못 받은 적도 있다”
“또 한 번은 어떤 나쁜 사람들이 우리 부모님에게 접근해서 아들 가요 무대에 올려준다며 돈을 요구한 적도 있다”
“당연히 사귀지만 부모님 입장에서는 아들이 가수라고 하는데 tv도 못 나오고 하니까 출연시키고 싶어서 400만 원 달라는 거 깎아서 300만 원을 보내고 말았다”
“그 때 내가 그 얘기를 듣고 말리려고 했으나 이미 입금을 했다고 해서 알아보니 역시나 사기였다”
“그리고 내가 돈을 못 버니 나이가 서른이 넘었는데도 부모님이 땀 흘려 농사지은 돈으로 생활비를 충당해야 했다”
“내가 가수라고 하지만 나아지는 건 전혀 없고 매일 똑같고 그런데 나이는 들어가고 솔직히 부모님 뵐 면목도 없었다” 라고 했습니다.
아무튼
이처럼 무명 생활 기간이 길어 하루하루를 힘들게 살던 와중 설상가상 2017년 겨울 아버지가 뇌경색으로 쓰러져 더는 농사를 지을 수 없는 상황이 되었는데.
결국 누나들도 “이제 그만할 때도 되지 않았냐 그 정도면 됐다”며 도무지 나아지지 않는 동생의 가수 생활을 말리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이대로 접기에는 너무 억울했던 거는 아쉽기도 하고 그래서 가족들에게 딱 이야기를 했던 게
“올해까지만 제대로 해보겠다”
“딱 1년만 시간을 달라 그럼에도 성과가 없으면 과감히 정리하겠다”고 했는데 그래서 그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도전했던 게 바로 <아침마당 꿈의 무대>였습니다.
그렇게 도전한 아침마당에서 1승을 하고 그 뒤로 2승도 하다 3번째 도전은 아쉽게도 떨어졌고 하지만 다시 패자 부활전부터 시작해 결국 우승을 하더니 마침내 가수 신성의 이름을 전국적으로 알리게 됩니다.
당시 심사위원으로 나왔던 설운도가 심사평으로 “얼굴도 그렇고 질투가 난다”
“마치 임영웅을 보는 것 같고 여심을 살살 녹인다”
“속이 뻥 뚫린다”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아침마당 우승 이후 그는 고정 프로만 4개를 하며 사람들로부터 tv만 틀면 나온다는 소리를 듣게 되었는데.
쓰러진 아버지
하지만 당시 아버지가 앞서 얘기한 대로 뇌경색으로 쓰러지고 6개월 정도 병원 생활을 하다 퇴원했는데 퇴원한 지 3개월 만에 이번에는 갑상선 암을 판정받고 말았습니다.
심지어 또 얼마 안 돼서 아버지가 교통사고까지 당하며 당시 집 안에는 우환이 엄청나게 생기고 말았는데.
그래서 결국 신성 그가 아침마당 5승을 하고 한창 활동할 시기 무려 1년간 모든 활동을 접고 아픈 아버지 곁에서 정성껏 보살피며 아버지를 대신해 농사에 전념하게 됩니다.
이와 관련해
신성의 어머니가 고백하길 “우리 아들이 아버지가 쓰러지는 바람에 고생을 참 많이 했다”
“아침 마당 이후 가수로서 이제 겨우 빛을 보나 했는데 서울에서 1년 살다가 와서 아버지부터 살리고 본다고 하더라”
“그 때 내가 내려오지 말라고 해도 엄마 혼자 어떻게 하냐 아빠 몸도 저런데 하며 결국 집에 왔다”
“아들도 꿈이 있을 텐데 마음고생을 많이 했을 거다” 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자신의 꿈보다 부모님의 건강이 우선이었던 신성은 가수 생활을 잠시 뒤로 한 채 아버지의 곁을 지켰고 그러자 천만 다행으로 점차 아버지의 건강이 좋아지게 됩니다.
아무튼 이후 2019년 <미스트롯>을 시작으로 대한민국에는 트로트 열풍이 불자 그는 속으로 예감했던 게 신인 여가수들의 멋진 경연을 봤으니 남자 가수들한테도 반드시 기회가 있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1년 뒤 그의 생각대로 미스터트롯 예심 공고가 뜨자 누구보다 가장 앞장 지원을 했고 그리고 본선 1차부터 올하트를 받았는데.
이후
팀전에서도 장민호, 영탁, 임영웅 등과 함께 댄싱킹을 열창해 이번에도 올하트를 받고 다음 라운드에 진출하게 됩니다.
그렇게 아침마당 이후 미스터트롯에서도 승승장구하던 그가 하지만 복병을 만난 것은 3라운드인데.
당시 신동부의 김경민에게 결국 무릎을 꿇고 탈락하고 말았습니다.
이때를 그가 고백하길 “솔직히 말씀드리면 데스 매치에서 탈락한 며칠간은 살고 싶지 않을 만큼 고통스러웠다”
“우승은 아니라도 최종 탑7 안에는 거뜬히 합류할 수 있다는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본선 진출 후 장민호, 영탁, 임영웅과 함께 했던 현역 a조와 합숙을 하며 많이 친해졌는데 그런데 그들과 헤어지는 순간 밀려드는 상실감과 박탈감을 당시에는 도무지 감내하기가 힘들었다”
“천신만고 끝에 붙잡은 동아줄을 놓아야 한다는 사실과 오랜 무명 가수 생활을 하면서 겪은 서러움을 누구보다 알기 때문에 그런 감정들이 더 크게 증폭시켰는지도 모른다”
“그 때는 엄청난 충격이었지만 그럼에도 어쩌면 힘들어하는 것조차도 나에게는 사치라 생각했다”
“아직 신인이기 때문에 얼마든지 견딜 수 있다고 생각하고 또한 반드시 전화 위복의 기회가 올 것이라고 확신했다”라고 했습니다.
아무튼 이후 아쉽지만 그와 함께 했던 현역 a조의 사람들은 그야말로 인생 역전을 하며 엄청난 사랑을 받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신성에게도 정말 전화위복의 기회가 오게 되는데 바로 2022년 겨울 <불타는트롯맨> 경연이었습니다.
불타는 트롯맨 신성
하지만 결코 만만치 않았던 게 당시 그의 번호가 95번이었는데 이는 데뷔한 순서로 그만큼 신선함이 떨어지다 보니 경연 내내 기존에 보여주던 모습을 벗어나야 한다는 부담감과 고충이 많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와 관련해 신성 그가 고백하길
“시청자분들도 신선하고 새로운 인물을 원하실 텐데 나는 현역 가수여서 그런 느낌이 전혀 없었다”
“심지어 ‘저 친구는 왜 또 나온 거야?’ 같은 반응에 눈치가 보이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강력한 한 방을 보여줘야 한다는 압박감과 기존에 보여줬던 모습을 벗어나야 한다는 부담감이 경연 내내 따라 다녔다”
“하지만 이러한 모든 과정 또한 스스로 겪으며 이겨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라고 했습니다.
아무튼
이후 현역 가수로서의 저력을 보여주며 마침내 결승까지 올라갔고 그런데 이때만 하더라도 폭발적인 인기라기보다 순위가 하위권이었던 그는 결승 1차 무대에서도 8위로 시작을 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앞서 얘기한 대로 현역 가수는 신선한 느낌이 떨어진다고 판단해 결승 1차전에서 큰 변화를 줘보자는 마음으로 단 한 번도 시도하지 않았던 댄스트롯을 선보이게 됩니다.
하지만 숨 쉴 틈 없는 노래에 안무까지 소화하려니 그는 한계에 부딪혀야 했는데.
그럼에도불구 정말 하얗게 불태우자 덕분에 참신하고 뜨거운 무대가 탄생해 마침내 그의 순위도 수직 상승하게 됩니다.
이처럼 8위로 시작한 결승전은 그의 엄청난 노력과 진심을 다한 무대로 준우승이라는 영예를 거머쥐게 되었는데.
그리고 최종 순위가 발표됐을 때 준우승의 심경으로 “결승까지 온 것만으로도 진심으로 영광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아쉽거나 그런 건 전혀 없고 정말 꿈을 꾸는 기분이었다”
“사실 지금도 믿겨지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신성 그가 고백하길
“3개월간의 대장정 불타는 트록맨을 통해서 배우고 얻은 것이 많아서 가수 활동에 많은 보탬이 될 것 같다”
“그리고 부족한 나에게 투표를 해주신 여러분 덕분에 2위라는 영광스러운 준우승을 하게 되어 감개가 무량하다”
“물론 아직은 달려가야 할 길이 더 많이 남았고 어찌 보면 지금 나에게 가장 절실한 일이 음악적 성취와 자리 매김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꼭 이루고 싶은 소망은 사실 가수로서의 성공보다 부모님의 건강이 첫 번째다”
“다른 건 모두 감수하더라도 부모님의 건강이 회복되셨으면 좋겠다”
“내 일신의 안위와 성공을 위해 몸이 불편하신 부모님 곁을 지키지 않으면 성공이 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러니 지금 가진 게 없고 어려워도 부모님을 모시고 멋진 곳에 여행도 가고 한 번이라도 더 맛있는 음식을 대접하는 게 진정한 자식의 도리가 아닌가 싶다라고 했습니다.